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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네미 Oct 14. 2019

한바탕 부부싸움 후 그가 내민 것

신랑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평소보다 이른 퇴근이다. 갑자기 공기가 무겁게 느껴진다. 나는 등을 한껏 움츠리고 감자를 썬다. 마치 이 감자를 1.2cm로 써는 것에 집중하느라 신랑 들어오는 소리를 못 들었다는 듯이.


우리는 이틀 전 싸웠다. 꽤 심하게.



https://brunch.co.kr/@gokunbun2/30






신랑과 싸우고 난 직후에는 왜 화가 나는지 이유를 몰랐다. 그저 서운함과 분노가 뒤엉켜 눈물만 났을 뿐이다.


누군가와 내 마음을 나누고 싶었다. 그러나 신랑의 직장을 따라온 이곳에는 아는 사람 하나 없었다. 물론 웃으며 인사하는 어린이집 엄마나 놀이터에서 자주 보는 윗집 엄마도 있었으나 이런 속 깊은 사정까지 말하기는 나도, 그들도 부담스럽게 느낄 터였다. 멀리 떨어져 사는 탓에, 일 년에 한두 번 보기 힘든 내 오래된 친구들에게도 털어놓기 힘들었다. 앞 뒤 다 자르고 속상하다는 말만 하기에는 서로에 대한 소식의 끈이 두껍지 못했다. 그렇다고 친정부모님에게는 더욱 말할 수 없었다. 나는 별일 없이 잘 사는 딸이어야 했다.


한참을 울고 난 다음 노트북을 켰다. 그리고 하얀 공백에 내 감정을 털어놓았다. 한 글자, 한 글자. 머리 끝까지 가득 찬 감정을 두서없이 마구 쏟아냈다. 삭제하고 다시 쓰기를 수차례. 이 과정을 통해 나도 미처 몰랐던 나 자신을 발견했다. 그래, 그래서 화가 났던 거구나. 깊이 숨겨놓았던 마음을 마주 본다. 마치 셀프로 심리상담을 받는 느낌이었다.


글을 브런치에 올렸다. 때로는 알지 못하는 타인에게 내 마음을 더 편하게, 더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법이다. 예상치 못했던 많은 댓글이 달렸다. 생면부지의 나에게 건네는 따뜻한 댓글들을 보면서 많은 위로를 받았다. 선뜻 나눠주신 자신의 인생 이야기에 몇 번이나 더 눈물을 훔쳤다. 그리고 무엇보다 야속하게만 느껴지던 신랑의 입장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래, 그도 많이 힘들었겠지.


더 이상 내가 더 힘들다, 신랑이 더 힘들다를 따지고 싶지 않았다. 우리 모두 각자에게 주어진 삶의 무게를 버티고 있을 뿐이었다. 그 삶의 무게를 타인이 억지로 부여한 것도 아니었다. 부부가 상의해서 아이를 낳았고, 당직이 많은 직장에 들어갔다. 또 내가 직장을 그만두고 육아에 전념하기로 한 것도 오롯이 우리 부부의 결정이었다. 다만 그 힘듬을 이겨내는 방법이 서로 달랐을 뿐이다. 나는 가족과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으로, 신랑은 혼자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집으로 들어온 신랑은 인사 없이 안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 엉키고 꼬였던 나의 마음은 글쓰기를 통해, 그리고 댓글을 통해, 이미 다 풀린 상태였다. 이제는 사과를 하고 화해를 하는 단계만 남았다. 그런데 먼저 미안하다고 말을 건네는 건 또 다른 용기가 필요했다. '우선 저녁부터 먹고 아이들이 놀면 이야기를 해봐야지'  이런 생각을 하며 감자를 썰었다. 그런데 옆구리 사이로 쓰윽, 작은 상자 하나가 파고든다. 귀엽게 포장된 마카롱 세트가 조리대 위에 놓였다.


- 시내 나갔다가. 유명하다길래.


예전에 신랑에게 '여기 마카롱이 엄청 맛있대' 하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걸 기억하고 사 왔다니. 마음이 순식간에 말랑말랑해진다. 한번 싸우면 일주일은 우습게 냉전을 치르던 우리였는데. 10년이 넘는 결혼생활 동안 신랑이나 나나 많이 변했다. 쓸데없는 자존심 싸움은 서로의 진만 뺀다는 걸 이제 서로 깨달은 거겠지.  



예쁜만큼 맛도 좋았던 마카롱.






고기를 잔뜩 넣은 된장 전골이 상 가운데에서 보글거렸다. 아이들과 신랑이 참 좋아하는 메뉴. 오늘은 특별히 신랑에게 고기를 더욱 많이 덜어줬다. 금세 밥 두 공기 뚝딱한 아이들은 오늘따라 둘이 떼굴떼굴 잘 논다. 나는 신랑과 마주 앉았다.


- 있잖아. 주말에 내가 화낸 건….


나는 지난 주말의 일을 찬찬히 말했다. 이미 글을 쓰며 내 마음이 정리되었으므로, 신랑을 비난하는 말은 없다. 어느 부부 전문가가 말했던 '나 대화법'이 자동으로 나왔다. 신랑은 식탁에 놓인 마카롱을 만지작 거리며 찬찬히 들어줬다. 중간중간 '그랬구나' 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내 마음을 가장 아프게 했던 지점을 입 밖으로 꺼냈다.


- 나는 오빠가 대화도 없이 그저 휴대폰만 하고 있으면 이제 나와 아이는 같이 시간을 보낼 가치도 없게 된 것처럼 느껴져.


신랑은 깜짝 놀라면서 전혀 그런 게 아니었다고 손사래 쳤다. 그리고 우리는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정말 피곤해서 그런 거다. 다만 가족을 남보다 편하게 생각한 것은 있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더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이 맞는데, 편하다고, 내 피곤에만 집중해서 내버려 둔 건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이 가족의 가치를 허투루 생각한 건 절대 아니다.


눈물이 핑 돈다. 마음을 헤아려주는 말이 고맙다.

신랑이 내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 앞으로 더 잘할게.

- 나도 더 잘할게.


나는 신랑의 손을 마주 잡고 흔들었다. 그리고 옆에 다가가 꼭 껴안아줬다. 동료애가 싹튼다.


그래, 완벽한 인간이 어디 있겠는가. 내가 부족하듯, 신랑도 연약한 인간일 뿐이다. 자기의 힘듬만을 내세우며 서로 비난하기보다는, 솔직하게 마음을 털어놓고, 더 잘하겠다는 약속을 하는 것만 해도 충분하다. 비록 내일이 되면 다시 엉망이 될지라도 말이다. 문제가 생기면 그때 가서 또 싸우면 될 일이다.


- 엄마 아빠, 왜 갑자기 사랑해?


네 살 아들의 해맑은 질문에 웃음이 터진다.


싸우고, 화해하고, 울고, 웃고.

이 모든 게 인생이라는 여정의 한 과정이겠지.

마카롱을 한 입 물었다. 입안 가득 기분 좋은 달콤함이 퍼졌다.

이전 01화 그는 항상 피곤하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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