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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네미 Aug 29. 2021

프로 그만둬러

  “이번엔 선생님 무섭다고 그만 안 두냐?”     


  부모님 나의 스케이트 수강 소식을 전했을 때 전화기 너머 아빠가 가장 먼저 하신 말씀이다. 내가 어릴 적 부모님은 이런저런 학원에 다닐 수 있게 해 주셨는데, 아빠의 말마따나 뭐하나 진득하니 끝까지 배운 것이 없다. 선생님이 무섭다며 얼마 안 가 그만두기 일쑤였다. 그렇다. 나는 ‘프로 그만둬러’다.      


  그러나 나를 '잘 포기하는 사람'으로 단정 짓기엔 억울한 면이 있다. 그 시절의 선생님들은 고작 초등학생에 불과한 나를 어찌 그리도 잘 때리셨는지. 손을 봉긋하게 올려야 한다며 자로 손등을 내리치던 피아노 선생님을 시작으로, 킥판으로 엉덩이를 때리던 수영 선생님, 음이 틀렸다고 ‘귀싸대기’를 날리던 바이올린 선생님까지... 부위 부위마다 찰지게 때리시 선생님들 덕분에, 학원 가기 전날에는 악몽을 꾸고, 당일이 되면  멸망을 빌 정도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고민하고 고민하다가 부모님께 학원을 그만두고 싶다고 토로했건만 해결책인 줄 알았던 부모님은 오히려 나의 나약함과 참을성 부족을 지적하곤 하셨다. 강한 사람만 살아남을 수 있던 90년대다.

 

  30년이 지난 지금, 2021년의 한국은 체벌을 통한 교육이 존재하지 않는 나라로 변했다. 나도 꼬꼬마 어린이에서 웬만한 선생님보다 나이가 많은 30대 후반의 어른으로 성장했다. 이렇다 보니 선생님이 날 때린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런데 왜! 나는 이토록 스케이트에 가기 싫은 것인가!       






  핑계를 조금 대보자면 오늘따라 너무 아프다. 누가 때려서 아픈 건 절대 아니 오해는 금물. 오로지 나의 저질 체력으로 인한 근육통 때문이다. 지난번 수업 이후 통증이 시작됐는데 처음에는 한숨 푹 자고 나면 금방 회복될 줄 알았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어째 하체 쪽의 뻐근함이 더 심해졌다. 어기적거리는 걸음걸이가 아주 볼썽사납다. 내 평생 허벅지와 엉덩이에서 근육통을 느껴본 적이 없었기에 어찌 걸어야 하는지 대비가 전혀 안 되어 있었다. 내 허벅지와 엉덩이에게 고통을 안겨줘서 미안해야 하는 건지, 그동안 운동을 한 번도 안 해준걸 미안해해야 하는 건지 헷갈렸다. 아마 나 혼자 스케이트를 배웠다면 고민할 거리도 없이 오늘은 쉬었을 거다. 아플 때는 쉬어줘야 된다는 운동 유투버의 영상만 골라보며 마음의 위안을 삼았겠지.   


  그러나 빙판의 매력에 홀딱 빠져버린 6세, 8세 두 아들에게는 스케이트를 빠진다는 것은 상상도 못 할 일이다. 수업이 끝 순간부터 그다음 수업 날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는 그들. 매일같이 '몇 밤 자야 수업이야?'를 물어보더니, 오늘 아침엔 '스케이트 간다!' 외치며 눈을 떴다. 이런 아이들에게 엄마가 근육통이 심하니 오늘은 조금 쉬자라는 말은 도저히 할 수 없었다.


  수업 한 시간 전부터 가자고 재촉하는 통에 결국 끙차, 엉덩이를 일으켰다. 그래, 애들만 데려다주고 난 옆에서 쉬자.




  7월 말. 가만히 있어도 등줄기에 땀이 흐를 정도로 푹푹 찌는 무더위다. 잔뜩 달궈진 프라이팬 같은 주차장에 차를 댔다. 차 문을 열자마자 몰아닥친 바깥 열기가 에어컨으로 겨우 만들어놓은 냉기를 순식간에 없애버렸다. 주차장에서 빙상경기장 입구까지는 걸어서 2분 거리 남짓. 짧은 거리지만 뙤약볕 밑에서는 멀게만 느껴졌다.


  비틀비틀 걸어 겨우 도달한 입구를 지나, 아이스링크장으로 들어갔다. 새하얀 얼음판이 펼쳐진다. 한증막 속에서 버티다 냉탕으로 뛰어든 듯 청량함이 온몸으로 퍼졌다. 순식간에 여름에서 겨울로 넘어오는 간 이동을 한듯한 느낌. 새빨갛게 익은 얼굴이 점점 진정된다. 캬, 한 여름에 즐기는 겨울이라니. 힘들어도 오길 잘했다.

      

  스케이트장은 참 색다른 공간이다. 농구장이나 축구장 같은 보통의 체육시설과는 분명 다르다. 현실에 1m 정도 비켜나있는 듯한 묘하고 신비한 느낌. 빙판 위의 사람들 동화에서 튀어나온 듯 매력적이다. 피겨 스케이트 학생들은 요정 같은 몸짓으로 눈길을 끌고, 스피드 스케이트 선수들은 마치 피터팬 같이 날쌔게 빙판 위를 질주한다. 여기에 1일 체험으로 온 연인들과 가족들이 만들어내는 웃음소리까지 더해져 더욱 동화나라처럼 느껴진다.


     

꿈과 환상의 나라, 빙상경기장.






  "씽씽 타다 보면 걱정이 떨어져 나가요."

     

  어릴 적 스케이트를 배운 친척동생이 한 말이다. 초등학교 2학년 때, 1년 정도 레슨을 받았다고 하는데, 대학원생이 된 지금까지 이런저런 스트레스가 쌓이는 날이면 빙상장으로 가서 스케이트를 탄다고 한다.  

    

  벽에 기대어 선수 레일의 사람들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바람처럼 빠른 속도로 질주하는 모습은 보기만 해도 상쾌다. 친척동생의 말 따라 어떤 고민이라도 머릿속에 못 붙어있을 것 같다. 아무리 심각한 걱정이라도 휙 날아가버릴 것 같은 짜릿한 속도감. 활주를 끝낸 스케이터들이 왜 하나 같이 환히 웃고 있는지 이해가 갔다. 아직은 초보이기에, 스트레스를 털기보다는 오히려 가득 얻는 처지인 나로서는 부럽기만 하다.

       

  그래, 쉬어서 뭐하겠나. 한 번이라도 더 타자. 스케이트장의 묘한 분위기에 휩쓸려 '프로 그만둬러'인 나의 의지가 다시 타올랐다. 그러자 땅땅하게 뭉쳤던 하체 근육이 약간은 말랑말랑해진 느낌이 들었다. (내 마음이 말랑말랑해졌을지도)

 

  사물함에서 아이들의 스케이트와 더불어 내 스케이트도 가지고 왔다. 아직은 동화의 나라에 불시착한 지극히 민간인스러운 나지만, 어서 나도 이 신비의 나라에서 제대로 역할을 할 수 있기를. 바람을 가득 담아 힘껏 스케이트 끈을 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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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스케이트를 타게 됐지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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