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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네미 Oct 22. 2021

당직이라는 선물

         

나와 남편에게 인생을 살면서 겪은 최악의 시기를 뽑으라면 아마 둘 다 2017년을 뽑을 거다.  

  

그해 나는 갓 돌 지난 둘째와 네 살 첫째를 데리고 남편의 직장을 따라 낯선 지방 도시로 이사 왔다. 남편은 새로운 직장에서 일하느라 정신없고, 나는 도와주는 손길 하나 없이 홀로 두 아이를 돌봐야 했다. 특히나 남편은 일주일 2~3회  당직을 했다. 아침에 출근하여 종일 일하고, 밤에 당직하고, 다음 날 또 일한 다음에 저녁이 돼서야 퇴근하는 살인적인 스케줄.      


그러나 그때의 나는 남편의 수고를 보살필 여유가 없었다. 두 명의 영유아를 24시간 홀로 돌보는 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나의 한계를 넘어서는 일이었다.     


특히나 두 아이가 몹시 아프던 5월의 어느 날은 더욱 그랬다. 아이들이 쏟아놓은 음식 찌꺼기를 닦아내고, 토와 배변에 얼룩진 이불을 빨며, 아이들의 칭얼거림을 받아주기를 며칠째. 바짝 말라버린 정신을 가다듬고 한 모금의 위로를 얻기 위해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바쁠 테니 얼른 몇 마디만 하고 끊으려 했는데 이건 뭔가. 너무도 활기찬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뭐하냐 물어보니 동료들과 밥 먹고 산책하고 있다고 했다. 이 좋은 봄날, 나는 나가지도 못하고 잠도 못 잔 채 이리 집구석에서 썩어가는데 자기는 일한다는 아주 합법적인 핑계로 육아와 모든 집안일에서 벗어나 사람들을 만나며 시시덕거리고 있다니! 어찌나 약 오르던지. 그날 이후 남편이 당직하는 날이면 나도 모르게 비아냥거리는 소리가 나왔다.    


- 나 오늘 당직이야.

- 누군 밥도 제대로 못 먹고 거지꼴로 사는데, 오빤 또 사람들이랑 웃으면서 맛있는 저녁도 먹고 좋겠네.   

  

남편 입장에서는 미치고 팔짝 뛸 정도로 억울했을 것이다. 종일 시달리고, 또 밤새 시달릴 것이 뻔한 스케줄 가운데 잠시 동료들과 여유 시간을 즐긴 게 그리 죽을죄인가! 그러나 종일 두 영유아만 보느라 어른다운 대화를 한마디도 못 하고 사는 나에게 유일한 사회적 연결점이던 남편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여자 목소리도 언뜻 들려서 더 분노했을 수도)과 충족감을 채우고 있다는 것에 배신감을 느꼈었다.     


그렇게 우린 미친 듯이 싸웠다. 다행인 것은 수많은 언쟁과 눈물이 속에서도 시간은 성실히 흘렀다. 매일 분수토를 하며 이불 빨래는 무수히 양산해내던 둘째는 아직도 토를 자주 하지만, 스스로 변기로 걸어가 깔끔하게 토한 후 변기 물을 내릴 수 있는 6살이 되었고, 매 순간 엄마와 놀자고 징징대던 첫째는 만화 천자문에 홀딱 빠져 사는 초등학생이 되었다.     


내가 짊어지던 짐이 조금 가벼워지고 나서야 남편의 짐이 보였다. 남편의 짐은 예전보다 더 커진 듯했다. 직장의 일이 조금은 편해지고 당직 횟수도 줄었다고는 하지만, 오히려 남편은 아이들이 커나갈수록 가장이라는 짐을 더욱 막중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오늘 찾아온 당직의 날. 나는 36시간은 있어야 다시 만나게 될 남편의 뒷모습에 아쉬움을 담아 꼭 안아줬다. 아침을 먹던 아이들도 후다닥 달려와 아빠에게 인사한다. ‘아빠 회사 가지 마’와 ‘우리 아들들 잘 놀고 있어’를 반복하며 한 편의 영화를 찍고 나서야 비로소 끝나는 아침 출근.


여기서 웃긴 건 손을 애처롭게 뻗으며 아빠를 붙잡던 아이들은 현관문이 닫히자마자 태세 전환을 한다는 것.


- 엄마, 오늘 아빠 당직이라고 했지?

- 응.

- 그럼 오늘 스케이트 실컷 타겠다!     


아빠가 퇴근하는 날에는 저녁을 제대로 차려 먹어야 하기에, 스케이트 수업 끝나자마자 후다닥 나왔어야 했는데, 당직 날에는 스케이트를 타고 싶은 만큼 실컷 탈 수 있다는 걸 어느새 깨달았나 보다. 아빠 앞에서는 아쉬움이 뚝뚝 떨어지던 얼굴이 갑자기 환호성을 지르며 기뻐했다. (남편, 이건 몰랐지. 미안) 자식 다 소용없다.     

남편 당직 날에는 보통 스케이트 수업 후, 저녁은 대충 먹고, 도서관에서 밤늦도록 책을 읽고 집에 돌아온다. 별거 없는 스케줄인데, 아이들은 이걸 작은 파티처럼 즐거워한다. 덕분에 죽도록 외롭고 힘들었던 남편의 당직날이, 나에게도 작은 소풍처럼 느껴졌다. (남편 미안 2)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면 좀 더 서로의 애씀을 도닥여주고 위로해줄걸. 그때의 우린 너무나 많은 짐을 오롯이 홀로 지고 있었고, 그 힘듦을 탓하느라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어리석음을 저질렀다.


혹시 지금 길고 긴 육아의 터널을 홀로 걸어가는 분이 있다면 말해주고 싶다. 곧 터널의 끝이 보일 거라는 걸. 그러니 서로를 향해 쏘아대는 화살은 이제 잠시 땅에 내려놓고 서로 수고했다고 보듬어주라고. 어차피 자식은 떠나갈 녀석들이니, 끝까지 함께 인생을 살아갈 내 옆사람을 더 잘 챙기자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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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스케이트를 타게 됐지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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