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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도 Nov 17. 2019

뉴욕에 오기까지도 여행이었어

내가 한국을 떠나서 산다는 것은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해외여행 조차 20대 후반에야 처음 가보았고, 기껏해야 일주일 정도 외국에서 머문 것이 전부였다. 


외국에서 한달 살기가 유행할 때 조차 별 다른 희망을 품지 않았다. 한달 간 한국을 떠난다면 회사에서 짤릴 것이 분명하고, 퇴사 후 한달 여행 후 다시 이직을 한다면 그달의 대출금과 월세, 카드값을 감당할 능력이 없었으나 무엇보다도 머나먼 타지에서 홀로 살아간다는 것이 두려웠다. 


대학생 때 외국으로 어학연수나 교환학생을 갈 형편이 되지 않아 만약 외국에 간다면 워킹홀리데이를 신청해야했다. 하지만 내 발목을 잡은 건 의외로 돈보다는 혼자인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외로움을 달고 사는 나란 사람은 지금껏 혼자서 무언가를 해본 적이 거의 없었다. 혼자 여행을 간 적이라 해봐야 꼴랑 당일치기로 춘천에 가본 게 전부이며, 혼자서 살아보리라 다짐했지만 동생과 함께 자취를 했었다. 혼자서 식당에서 밥을 먹느니 둘이 먹는냥 거나하게 음식을 테이크아웃 해서 티비를 보면서 개걸스럽게 집에서 혼자 먹어치우는 걸 선호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싫었던 건 연애가 끝난 후 혼자가 되는 느낌이었다. 헤어진 후에는 친구들과 늦도록 술을 마시거나 하루 걸러 소개팅을 하면서 썸이든 연애든 어떤 연결고리라도 걸치고 싶어했다. 혼자서 무얼 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 요즘에도 나는 내 스스로 혼자가 되지 않으려고 발악했다. 겉으로는 혼자서 해 볼 기회가 없었다고 둘러댔지만 실은 혼자서 하는 법을 잘 몰라서, 잠시라도 혼자인 느낌이 주는 고독을 견디지 못해 이내 도망쳐버리곤 했다. 


그러니 서른 넘어 뉴욕으로 오게된 것도 순전히 내 의지는 아니었다. 준군이 박사 과정 이후의 커리어를 위해 외국 대학 연구실에서 일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여곡절도 있었다. 처음에는 뉴욕에서 살아본다는 게 신이 났지만 한 편으로는 겨우 마음에 맞는 회사를 찾은 터라, 서울에 남아 회사 일을 계속 하겠다고 말했다. 그것 때문에도 몇 번 다투었다. 하지만 그후 몇 달, 회사에서 발생하는 여러 문제들을 처리하느라 스트레스를 견디다보니, 굳이 뉴욕에 사는 걸 포기하고까지 다닐 수는 없겠더라. 


6년간 쉬지 않고 일했으니 이참에 잠시 쉬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쩔 수 없이 퇴사'라는 말은 가계에서 내 책임을 조금 전가할 수 있는 말이었다. 혼자 돈을 벌게 된 준군이 노는 나를 보고 부러워하면 나도 할 말이 있었다. 일하고 싶었으나 뉴욕으로 오는 바람에 못하게 된거라고. 거짓말이었다. 일하고 싶지 않은 차에 잘된 거지 뭐. 


급히 결정된 탓에 뉴욕에 오기 두 달 전에야 부랴부랴 이사 준비를 시작했다. 그 중 한 달은 작게라도 결혼식을 올리고 간답시고 결혼식 준비까지 병행했기 때문에 실제로 어떻게 뉴욕에 온지 모를 정도로 시간이 빨리 흘렀다. 


모든 게 처음이었다. 1년에 한 번 여행을 떠날 때 멀어봤자 4시간 거리 동남아로만 여행을 가서, 14시간이라는 장시간 비행도 처음이었고 영어만 쓰는 서방국가에 사는 건 더욱 낯선 일이었다. 


뉴욕 외에도 몇 개의 선택지가 있긴 했다. 그와 나에겐 이번 외국 살이는 처음으로 누려보는 일탈이었으니 돈이 얼마가 들든 월급으로 모조리 충당할 예정이었으니 이후의 커리어와 나중의 계획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는 크게 중요치 않았다. 


그저 어느 나라, 어떤 도시에 머물 것인지만이 우리의 관심사였다. 스위스에 있는 대학교 연구실은 단연 1순위였다. 스위스 대학 교수와의 스카이프 면접을 앞두고 그와 나는 스위스 교통이나 집, 음식, 문화 등을 열심히 검색했다. 


"스위스에서는 강아지도 기차 패스를 구매해야한대. 귀엽다. 그 정도는 쓰자. 온도랑 여행다니게" 


김칫국을 너무 마신 탓인가. 본래 박사를 한 한국 대학에서 주기로 한 지원금이 다음해로 미뤄지는 바람에 일이 꼬여버렸다. 스위스 대학에서 반, 한국 대학에서 반을 지원해주기로 한 것이 어그러지면서 스위스행은 좌절되었다. "그래, 뭔가 순탄하다 했다, 우리가 스위스라니 처음부터 말이 안되긴 했어.." 


다음은 캘리포니아 샌디에고 대학이었다. 캘리포니아에 다녀온 사람들이 하나같이 평화롭다고 입을 모으는 곳이라 거기도 괜찮겠다 싶었다. 사실 어디라도 상관 없었다. 빨리 떠나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어디에 살더라도 서울보다야 나을 거라 생각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좋은 사수를 만난 적이 별로 없어서인지 회사에서 종종 만나게 되는 마음이 못된 사람들에 질릴 대로 질린 상태였다. 어디가 되었든 빨리 갈 수 있는 곳으로 가자고 그를 재촉했다. 


뉴욕이라는 도시는 두 글자만으로도 매력을 뿜어낸다. 뉴욕이 아닌 곳을 선택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지금이 아니면 평생 뉴욕에서 월급을 받으며 살아볼 기회가 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꿈을 높이 갖는다고 해도 특별한 기술도 없고 원어민처럼 유창하게 영어를 구사하는 것도 아닌 내가 구글 뉴욕지사에서 일을 할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심지어 뉴욕에서 받는 월급도 내 것이 아닌 남편의 돈이었다. 한 차례 나의 무능력함을 깨닫고 숨을 들이켰다.


둘 다 회사에 다니던 서울에서야 돈에 대해서 서로 터치할 구실이 많지 않았지만 뉴욕에서는 남편의 돈으로 생활을 해야했다. 글을 쓰는 직업이라서 뉴욕에서도 쓸 수는 있다지만 프리랜서 글쟁이로 돈을 벌어봐야 얼마나 벌겠는가. 한국에서 입던 옷들을 그대로 뉴욕에서도 입어야했고 뉴욕의 화려함은 고사하고 서울서 한달에 두 세 번 할까 말까했던 요리를 이제는 매일, 그것도 삼시세끼를 차려야 했다. 해먹는 게 싸다는 생각은 요리를 하는 사람의 노동력 가치를 싸그리 무시하는 처사라고 생각한다. 내가 요리를 하기 싫어서 그런 게 아니라. 


어쨌든 나와 남편, 그리고 우리 강아지 온도 셋은 뉴욕에서 무거운 짐을 풀었다.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서울에서와 큰 차이는 없는 삶이다. 


어디서든 삶은 똑같이 흘러간다. 


여전히 살은 빼지 못해 다이어트 압박을 받으며, 서울에서처럼 이곳에서도 겉돌며 살아가고 있다. 내가 오랫동안 살았던 서울이라고해서 그 안에 속한 느낌을 받는 건 아니었으니 말이다. 인생도 긴 여행이듯 이곳에 오기 전에도, 그 후에도 여전히 나는 여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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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어딜가든 내 것만 늦게 나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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