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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도 Nov 17. 2019

가족을 남겨두고 떠나는 일

우리 가족은 유독 해외 여행과 거리가 멀었다. 아빠의 출장 덕에 엄마와 나까지 딱 한 번 며칠 일본에 가본 것을 빼고는 해외 여행을 간 적은 없었다. 그러니 가족 중 누군가가 해외에 살게 될 줄도 상상 하지 못했다. 해외에 가본 적이 거의 없으니 두려움이 커져서 용기조차 갖지 못한 것도 한 몫했다. 그 핑계로 네 식구가 흔한 해외여행 한 번 떠난 적이 없었다. 어학연수나 교환학생도 가본 적이 없기에 우리 가족은 따로 멀리 살아봤자 1시간 이상 거리에 살아본 게 전부다. 그래서 내가 뉴욕에 간다고 했을 때 엄마는 많이 슬퍼했다. 


미안하지만 나는 그 반대였다. 가족을 떠나는 일이 어딘지 홀가분했다고 해야할까. 내겐 가족이 다소 버거웠다. 장녀로서 그리 대단한 보탬이 되는 건 아니지만 월급 중 50만원 정도는 엄마, 아빠에게 보냈으며, 4살 차이 나는 동생에게도 10만원에서 20만원 정도의 용돈을 준다거나 필요한 전자기기를 사주었다. 


그러다보니 가끔은 도망치고 싶기도 했다. 그 돈을 모아 혼자 여행을 떠나고 싶기도 했으며 왜 나는 흙수저인걸까, 금수저 부모 밑에서 자랐으면 내 인생은 어찌 달라졌으려나 망상하기도 했다. 심하게 원망한 건 아니었다. 스스로 개척한 내 인생도 그럭저럭 옅게라도 빛이 드리우고 있었으니까. 


그저 너무 힘들고 지쳐서 다 때려치고 싶을 때, 어디 기대고 싶을 때 그런 든든한 빽 하나 없다는 걸 상기할 때면 한없이 무너져내리곤 했다. 25살짜리 여자애가 가족까지 신경을 쓰고 산다는 건 해보지 않은 이상 상당히 고통스러운 일이다. 자기 자신조차 버거운 나이가 아니던가. 자리를 잡는 건 고사하고 사회의 나락에 떨어지지 않기 위해 이리저리 발버둥치던 나는 마음 속 깊은 곳에는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물론 용기가 없어 오랫동안 생각만 품었다. 그건 서른 넘은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게 실현될 줄은 몰랐는데, 갑작스럽게 뉴욕으로 이사를 가게 된 거다. 뉴욕에 와서도 한동안은 가족이 보고싶진 않았다. 동생을 통해 한국에 있는 엄마가 가게세를 내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다시금 스트레스를 받을 뿐이었다. 가족의 일이란 도무지 외면할 수가 없었다. 피가 섞였다는 건 때론 가혹하다.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부모님도, 미비하게나마 장녀인 나도 인생을 희생하고 견디기에 충분했으니까. 엄마, 아빠가 나와 내 동생에게 그렇게 했듯, 나도 늦기 전에 할 수 있는 선에서 당장의 효도를 행하고 싶었기 때문에 더 괴로워했던 지도 모르겠다. 


3개월은 즐거웠고, 그후부터는 식상하게도 가족을 생각했다.


뉴욕 거리를 걷다보면 한 블록이 멀다하고 한국인을 만날 수 있다. 타임스퀘어에 있는 쉑쉑버거는 뉴욕 최대의 관광지답게 한국인들이 꽤 많았다. 우리 테이블 앞에도 한국인 가족이 서있었다. 40대 중반의 엄마, 아빠 그리고 20대 초반의 외동딸이 뉴욕여행을 온 것 같았다. 아줌마는 실내에서까지 셀카봉을 들고 사진을 찍는 아저씨를 나무라했다. "여기선 안찍어도 돼. 아 그것좀 내려놔~"라면서. 그들의 딸은 줄이 긴 픽업 창구에서 가족들의 쉑쉑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멀리 초등학생 남매 두 명을 둔 한국인 4인 가족이 주문 하는 게 보였다. 아빠는 애들에게 하나를 나눠먹으라고 말하면서, 밀크쉐이크를 먹을 거냐고 묻고 있었다.


그때 문득 한국에 있는 우리 가족이 너무 보고 싶었다. 


우리 가족은 해외여행도, 국내 여행도 그리 많이 간 편이 아니었다. 가족의 해외 여행은 특히 새로운 경험이다. 외국에선 무인도에 떨어진 것처럼 낯설어 같이 간 사람에게 의지하게 되기에 보다 더 끈끈해진다. 또 그간 경험하지 못했던 것들을 함께 경험하며 공통의 추억이 늘어간다. 이야깃거리가 늘어가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 우리 가족은 그게 어떤 느낌인지, 뉴욕여행 온 초등학생보다 모른다. 


뉴욕의 쉑쉑버거는 지나치게 짰다. 베이컨은 바짝 말라서 거의 소금맛이 날 지경이었다. 그래서인지 자꾸 눈물이 났다. 10달러나 주고 사먹었는데 맛이 없어 울음이 터져나왔다. 해외여행은 생각도 못하고 살아온 엄마 아빠가 너무 보고싶어졌다. 가족이 싫다면서도 그게 진심이 아니었나보다.


얼마 전 본 기사에서 어느 초등학교 선생이 반 아이들에게 해외 여행 안가본 사람, 손을 들어보라고 했단다. 반에서 3명이 손을 들었다고, 해외여행에 가보지 못한 그중 한 아이의 엄마가 인터뷰를 했더라. 애가 집에 와서 자기만 못가봤다고, 다른 친구들은 전부 다 해외여행을 갔다고 주눅이 들었다고 했다.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나는 바로 그 자리에서 울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엉엉 울면서 집에 가서는 엄마 아빠에게 떼를 썼으려나. 아니면 엄마 아빠가 마음이 아플 걸 알고 혼자 속으로 울면서 복수를 다짐했으려나. 어린 나는 지금보다 훨씬 성숙했으니 아마 후자일 것이다. 엄마 아빠를 구슬려 춘천이라도 가서 닭갈비와 막국수를 먹는 걸로 만족했을 거다. 그때의 나라면 '돈 많이 벌어서 엄마, 아빠랑 해외여행 가야지' 하고 큰 꿈을 꾸었을 거다. 


지금의 나는 되려 그때보다 작아졌다. 왜 우리 가족은 해외여행 한 번 못가봤냐고 궁시렁되는 글이나 쓰는 걸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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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어딜가든 내 것만 늦게 나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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