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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도 Nov 17. 2019

공식적인 뉴요커 되는 법

뉴욕에 오면 누구나 뉴요커가 되는 줄 알았다. 이 문장의 결론이 예측가능하듯, 뉴요커는 뉴요커만의 분위기가 있었고 그것은 서울촌년은 그 발톱 만큼도 따라가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래도 뉴욕에 왔으니 외모까진 아니어도 흉내는 내야할 게 아닌가. 손쉽게 공식적인 뉴요커의 일을 따라하기로 했다. 패션테러리스트에 가까운 내가 갑자기 뉴요커처럼 입을 수 없기에 차라리 그 편이 마음이 편했다. 


서류 몇 장이 보증하는 미국 비자가 우리가 뉴욕에 머물러도 되는 사람임을 입증해주긴 했지만 신분증을 내야할 때마다 종이나 여권을 내보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뉴욕에 살고 있음을 보여주는 신분증, 뉴욕ID카드를 만드는 일이 첫번째 임무였다. IDNYC라고 불리는 이 신분증은 이민 여부에 관계없이 뉴욕에 합법적으로 거주하는 사람이라면 발급받을 수 있다. 그런 만큼 신분증이 보증하는 범위도 제한적이었다. 나이와 본인확인 정도의 역할로만 사용된다. 


맨해튼 아래, 로워 이스트사이드 부근에는 뉴욕 시청을 비롯해 뉴욕의 행정처들이 모여있다. 옛날 기둥과 장식이 멋진 웅장한 건물들은 저마다 뉴욕 시법원, 가정법원, 결혼 증명서 발급소,메트로폴리탄 교도소, 연방정부 관공서 등 굵직한 역할을 담당했다. 이중 'New York County Criminal Court' 법원 건물 안에 IDNYC 발급을 도와주는 센터가 있어 방문했다. 비자, 집주소, 여권 등 중요한 서류들을 챙겨간 후, 그곳에서 몇 가지 서류를 작성하고 신분증에 포함될 사진을 찍게 된다. 


뉴욕의 공무원은 매우 느리기 때문에 한국처럼 빠른 일처리를 기대하지 말라는 말을 하도 많이 들은 터라 기대를 버렸는데 막상 말이 잘 통하지 않는 이민자들을 매일 상대하느라 마인드컨트롤을 열심히한 탓인지 흑인 공무원 아줌마는 친절한 편이었다. 2주 후에 우편으로 ID를 발급받았다. 


뉴욕에 도착하자마자 ID를 받아야 되는 이유는 사실 신분증명 보다는 다른 목적에 있었다. 뉴욕의 유명한 미술관, 박물관, 동물원, 식물원 등 굵직굵직한 문화를 공짜로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잘한 것을 포함하면 수십 가지의 뉴요커 혜택을 누릴 수 있다. 


메트로폴리탄 뮤지엄, 모마, 자연사박물관 등은 한 번 가려면 20달러가 훌쩍 넘는다. 그렇다고 뉴욕에 사는데 딱 한 번만 갈수도 없고 갈 때마다 그 돈을 내고 즐길 수도 없다. 뉴욕의 임시 시민일지라도 뉴욕에 거주하며 뉴욕에 (비싼) 세금을 낸다면 이런 통큰 이익을 놓칠 순 없다. 낸 세금에 비하면 조삼모사가 아닐 수 없긴 하다만. 



다음 공식적인 뉴요커의 절차는 뉴욕의 도로, 블록체계를 아는 것이다.


서울과 다른 블럭 체계에 익숙해지면 비로소 뉴요커의 궤도에 올라섰다고 볼 수 있다. 뉴요커가 가장 많이 이용하는 대중교통은 지하철이며, 걷는 것과 자전거 또한 복잡한 뉴욕과 어울린다. 그 기본은 뭐가 어디있는지 길을 잘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뉴욕에선 10명 중 1, 2명 정도가 구두를 신고 나머지는 원피스를 입든 짧은 치마를 입든 나이키 운동화를 신는다. 그도 그럴 것이 한 번 탈 때마다 지하철 요금으로 3달러가 나가다보니 웬만한 20분, 30분 거리는 그냥 걸어다니는 것이다. 뉴욕이 통근 인구 중 걷거나 자전거 사용이 많은 도시 중 하나인 이유가 애석하게도 돈 때문이었다. 차나 버스로 가는 것보다 걷는 게 빠를 정도로 미친 교통량도 한몫하긴 하지만. 


처음엔 무슨 스트릿이니, 애비뉴니 당최 이해가 가지 않았고 외우려해도 뭐가 뭔지 모르니 잘 까먹었다. 나같은 길치가 뉴욕에서 구글맵없이 돌아다니는 건 불가능이겠구나, 지레 겁을 먹었다. 서울의 도로명 주소에 비해 복잡하게 만들었다고까지 한탄을 했다. 2주 정도 후에야 서울의 주소들이 엉망이라는 걸 알게 됐다. 자연스럽게 스트릿과 애비뉴로 구분되는 뉴욕의 블럭 체계에 완전히 적응하면서 부터였다.


서울에서는 주소만 보고 어디를 찾아가기 힘들다. 큰 건물을 찍고 거기서 왼쪽이냐 오른쪽이냐를 구글지도로 확인 후 걸어가는 방향이 맞나 체크를 해야한다. 뉴욕은 어디 스트릿, 어디 애비뉴라는 주소 두 개만 딱 알면 구글맵이 없어도 길치도 쉽게 찾을 수 있다. 맨해튼 시내는 엑셀 표 처럼 가로로 수십 줄, 세로로 10개 정도의 구획이 자로 잰듯이 나뉘어져 있기 때문이다.


동서(가로)로 되어 있는 길들은 'Street'이라고 하고, 남북으로 세로로 길게 뻗은 길들은 'Avenue'라고 부른다. 


만약 내가 32번 스트릿, 4번 애비뉴를 간다면 스트릿 마다 적혀 있는 표지판을 보고 걸어가면 된다. 현재 33번 스트릿에 있다면 한 블럭만 더 아래로 내려가면 32번 스트릿인 것이다. 지하철 역 또한 스트릿 이름으로 되어있어, 굳이 따로 검색하지 않아도 지하철이 서는 몇 개의 길만 알아두면 쉽게 역을 찾아 갈 수 있다. 


뉴욕은 길을 잃기가 어려운 도시다. 


어디에 뭐가 있는지도 한달 내로 외울 수 있다. 초반에만 가게를 찾으려고 길을 여러 번 물은 적이 있는데 그럴 때마다 뉴요커들은 "아 거기가는 거야? 몇 번 스트릿으로 가면되고, 오른쪽으로 가면 바로 보일 거야"라고 알려주었다. 보통 디테일하게 물어보면 "저도 모르겠어요"라고 하거나 "지도 찾아서 보여드릴게요"하는 것과는 달라서 신기했다. 왜 그런지는 살다보니 알겠다. 이 주소 체계에서는 그냥 그렇게 되는 게 당연해서 길을 모르는 게 이상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것이다. 길을 모르는 사람을 보면 절로 '아 투어리스트구나...?' 하게 된다.   


반면 남북(세로)으로 나눠진 길쭉한 길인 애비뉴는 맨해튼에 대략 10개 정도이지만 숫자 반, 명칭 반이여서 뉴요커도 애비뉴는 헷갈려하는 사람이 많다. 


내가 다운타운의 유명한 저렴하고 질좋은 뉴요커가 사랑하는 마트, '트레이더 조 Trader Joe'에서 장을 보고 우리 동네로 가는 버스를 탔을 때 라틴계 여성이 내게 물었을 때였다.


"그거 어디서 샀어?"


"72번 스트릿에 있어" 


"어디 애비뉴?"


당시만해도 애비뉴를 잘 몰랐었는데 내가 애비뉴를 찾아봐야 한다니까, 약간 미간을 찌푸리며 재촉하더라. 그 가게에 갔는데 애비뉴를 모르는 게 말이 안된다는 뉘앙스였다. "확실히는 모르지만 아마도 브로드웨이가 맞을 거야. 가기 전에 찾아봐"  라고 말하고는 버스에서 내렸다. 


앞서 언급했듯 뉴욕의 애비뉴 중 '브로드웨이'가 가장 유명하고 번화한 길이다. 이곳은 세계적인 뮤지컬 공연장이 밀집돼 있는 길이기도 하고, 맨해튼에서 가장 길다란 애비뉴이기도 하다. 브로드웨이가 맨해튼을 반으로 가른다고 봐도 무방하다. 무려 맨해튼의 아래쪽부터 위쪽까지까지 길게 29km나 이어지는 길이다. 그만큼 안전하기도 하고 구경거리가 많다. 잘 모른다면 브로드웨이만 쭉 따라서 걸어도 웬만한 뉴욕의 명소는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콜롬버스 써클, 센트럴파크, 록펠러 센터,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타임스퀘어, 브로드웨이 뮤지컬거리, 브라이언트 파크, 유니온스퀘어파크, 스트랜드 북스스토어, 플랫아이언 빌딩, 워싱턴 스퀘어 파크, 코리아타운 등 브로드웨이 부근에 밀집돼있는 유명한 관광지들이다.  


'오!' 이렇게 쓰다보니 나 좀 뉴요커 같아보이지 않나. 머리보다 발이, 마음보다는 몸이 먼저 뉴욕과 가까워졌다. 구글맵이 없어서 집에 못 가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없이 이 도시를 걸을 수 있다. 좋아해서 여러 번 가게 되는 베이글집, 피자집 한 두개 정도 생기는 걸 보니 어느새 나도 이곳의 일원이 되고 있었다.  


이사를 여러 번 다닌 서울에서도 그 동네를 하나 하나 익혀가면서 정이 들곤 했으니 뉴욕도 서울의 어느 동네처럼 내게 한동안 '우리 동네', '우리집'으로 불릴 것이다. 


뉴요커가 자주 가는 가게, 뉴욕에서 저렴하고 맛있는 맛집, 뉴욕의 숨겨진 명소, 뉴욕에서 알게된 사람들이 늘어갈수록, 내 서른둘 청춘이 푹 빠진 뉴욕이 고향처럼 느껴져 서울에 가기 싫을 만큼 뉴욕을 그리워하겠지. 가끔 서울이 그립기도 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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