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만의 외근인지 모르겠다. 새로운 파트너 기업을 만나고 그들과 좋은 관계를 맺는 것이 내 업무 중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하루 종일 이곳저곳 다니며 쉴 새 없이 말을 하다 보니 벌써 주변이 어두컴컴하다. 약 8시간 동안 한 달치 말할 분량을 다 떠들었더니 손가락 하나 까딱 못 할 만큼 진이 빠졌다. 하지만 그 덕에 입사 후 지금까지 밤낮으로 날 괴롭히던 불안감은 조금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잘할 수 있는 일, 내가 맡은 일을 꽤 잘 해내고 있다는 실감. 그 덕이다. 내 몫을 해내고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게 된 것이 얼마만이던가. 오랜만에, 일을 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감을 되찾은 것만으로도 감사한 하루였다.
오늘을 기회로 한국 사무국내 팀원 한 명을 처음으로 만났다. 매일 화상으로만 보던 얼굴을 직접 보니 어색함은커녕 오랜만에 그리웠던 친구를 만난 듯 너무 반가워 덥석 안아버렸다. 입사 후부터 쭈욱 화면 안에만 존재하던 동료들은 나의 수많은 궁금증과 질문들을 쏟아내기엔 심정적으로 많이 멀었다. 당장 업무에 적응하기 위해 알아야 할 것이 산더미인데 업무 시간이 제각각 다르다 보니 급하다고 전화를 걸 수도 없어 애가 탈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처럼 바로 옆에서 눈을 마주치고 궁금한 걸 바로바로 해결해 주는 사람과 같이 있자니 그간 막혔던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다. 이전 회사에서 재택근무를 할 때도 일주일에 한 번은 출근해서 동료와 맛있는 것도 먹고 수다도 떨고 몰랐던 회사 가십도 주워듣는 것이 꽤 큰 활력소가 되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 날은 업무 집중도도 올라갔다. 화상으로 얘기하면 수다 떨기가 어렵다. 오디오가 물려서 둘이 동시에 얘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말을 들으며 감탄사를 뱉을 수 없는 건 생각보다 꽤 큰 폭으로 수다의 맛을 떨어트린다. 눈을 정확히 마주치고 있지 못하다는 것도 친밀감을 떨어트리는 주된 이유다. 결론은 100% 원격근무가 업무의 효율성을 조금은 저하시킬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사람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은 사실이었다. 그래서 내 업무의 20%를 차지하고 있는 외근이 꽤 마음에 든다.
본사에서도 이를 모를 리가 없다. 전 세계에 퍼져 있는 전 직원이 1년에 한 번 이상은 꼭 한 자리에 모인다. 1년에 2회 유럽과 미국에서 무역박람회를 개최하는 우리 회사의 특성상, 그중 하나는 꼭 방문하게 된단다. 러시아가 전쟁만 일으키지 않았다면 아마도 여름에 유럽에 갈 수 있었을 텐데... 한 나라의 정신 나간 독재자가 거시적인 세계 경제뿐만 아니라 이국땅 한 개인의 삶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오늘 만난 동료는 나이보다 훨씬 앳된 얼굴을 하고 있다. 언제나 차근차근 나지막이 말하면서도 할 말은 전부 하는 그녀에게 저절로 신뢰가 간다. 처음으로 외근을 나온 나를 지원하고자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달려와 준 그녀를 보며 전 회사에서나를 따돌리던 그 무리가 떠올랐다. 물리적으로는 바로 손 닿을 곳에 있었지만 심리적으로는 너무 먼 곳에 있던 그들. 몸과 마음의 거리가 비례하지 않을 수도 있음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한 달 동안 너무 안달복달하던 내 모습에 스스로 지쳐갈 때쯤 잠깐 쉬는 시간을 만난 듯한 하루다. 스스로 만든 부담감에 짓눌려 마음대로 일이 되지 않을 때마다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었다. 평생 이렇게 날 괴롭히며 살았기에 짓눌림에 내성이 생길 정도다.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는 이곳에서 오래 버티기 힘들 것임을 직감했다. 100% 나의 성과로만 평가받는 원격근무를 하며 매일 일희일비한다면 어떻게 제정신으로 하루를 살아갈 수 있을까. 업무에서의 실수나 어려움은 내가 겪는 것이 아닌 이 업무를 맡은 담당자로서의 문제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그 어려움과 자연인으로서의 나의 삶이 뒤엉키지 않을 수 있다. 이는, 해야 할 일을 끝냈어도 여전히업무 공간을 떠날수 없는원격근무자로서 익혀야 할 필수 덕목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