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서 혈혈단신 살아남기 (9)

세상은 살아볼 만한 곳이다.

by 지오바니

2003년 12월


나이트브리지(Knightbridge)에 있는 맥도널드 지점에서 인터뷰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강의실엔 나와 같은 구직자들이 가득 차 있고 다들 일자리를 구할 기회를 잡았다는 사실에 기뻐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나도 이제 한시름 놓고 오랜만에 느긋하게 인터뷰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앞 문이 열리며 익숙한 얼굴의 한 동양 여성이 들어오려고 하는 것이 보였다. 다름 아닌 내 룸메이트 H였다. 그녀도 일을 구하고 있었으나 맥도널드에 지원한 줄은 몰랐다. 그런데 그때 인터뷰를 진행하던 담당자가 그녀를 제지하기 시작했다. 이미 필요한 인원이 채워졌으니 오늘은 돌아가라는 담당자의 말에 그녀는 하는 수 없이 아무 말도 못 하고 다시 밖으로 나가야만 했다. 순간 조용해진 홀 안의 수많은 눈들이 그녀를 향했다. 오늘이 아니면 언제 또 인터뷰가 잡힐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지만 난 그녀의 얼굴에 가득한 실망을 읽을 수 있었다. 꿋꿋한 척 뒤돌아 서는 그녀의 뒷모습이 너무 슬퍼 보여 도저히 남의 일 같지가 않았다. 그녀가 창피할까 봐 손들어 아는 척도 하지 못했다.

여기가 무슨 대기업 면접장도 아니고 런던에서 바닥이라면 가장 밑바닥 일자리인 맥도널드 크루 면접장이건만 돈을 벌 수 있다는 가능성에 한 발짝 먼저 다가섰다는 것만으로도 괜스레 그녀에게 미안해진다. 한국이었다면 맥도널드 인터뷰 기회를 잡았다고 이렇게 기쁘진 않았을 텐데 여기서는 정말 작은 것,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에 너무 감사하게 된다.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어서 무서울 것도 없지만 그렇기 때문에 외려 단 하나라도 내 힘으로 얻게 된 것에 대해 정말 큰 의미를 두게 다.

작은 소동 이후 나는 무사히 인터뷰를 마치고 눈앞으로 다가온 크리스마스를 마음 편히 맞이할 수 있게 되었다.


먹고사는 일이 해결되자 내 마음에도 좀 여유가 생겼다. 크리스마스를 맞아 근처 교회에서 홈리스(노숙자) 대상으로 열리는 자선행사에서 자원봉사를 하기로 한 것이다. St. Jude 교회에서 열리는 크리스마스 맞이 연례행사다. 처음엔 솔직히 겁이 났다. '런던의 홈리스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위험한 사람들은 아닐까. 험한 사람들이면 어떡하지' 라는 걱정을 하며 교회에 도착했다. 약속시간보다 너무 일찍 도착해서 어색함에 어쩔 줄 몰라했던 것도 잠시, 오히려 그 시간에 많은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며 얼굴을 익힐 기회를 얻게 되었다. 영어 말하기 연습을 덤으로 한 것은 물론이고 말이다. 그리고 홈리스들에 대한 내 걱정은 정말 선입견이었다. 그들은 그저 집이 없을 뿐 평범하고 선한 사람들이었다.

자원봉사라고 해서 무언가 대단한 일을 한 건 아니다.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고 맛있는 음식을 나눠먹고 그저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 전부였다. 한국이나 영국이나 할 것 없이 나이 드신 분들이 외로운 건 매한가지인가 보다. 게다가 오늘 만났던 Paul 할아버지와 Danis 할머니는 집도 없는 분들이니 그 외로움이 얼마나 클지... 보는 내내 마음이 아팠다. 그 둘은 내가 그들의 이야기를 절반이상 못 알아듣고 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내 부족한 리스닝 능력은 아랑곳하지 않고 두 시간 넘게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누군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준다는 것에 고무된 그들은 내게 끊임없이 말을 걸어왔다. 다 빠진 앞니덕에 발음이 술술 새고 허리는 꼬부라졌지만 대화상대가 생긴 걸 기뻐하는 모습은 영락없이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고 신난 어린아이들과 다를 바 없었다. 그 모습에 차마 중간에 말을 끊을 엄두도 내지 못하고 '영어 듣기 연습 몰아서 하는거다' 스스로를 세뇌하며 최선을 다해 그들의 이야기를 끝까지 경청했다. 몸은 피곤했지만 그들이 기쁘고 즐겁다면 얼마든지 들어 주고 싶었다.


지금 나도 머나먼 이국땅에서 힘들고 어려운 현실을 살아내고 있지만 누군가에게 위로가 있다는 사실이 정말 뿌듯했다. 아주 오랜만에 현실의 궁핍함에서 벗어나 마음만은 큰 부자가 것 같았다. 도와주겠다는 마음으로 갔건만 오히려 그들을 통해 내가 마음의 위로를 받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리고 더불어 나에겐 돌아갈 집과 가족이 있다는 것, 아프지 않고 건강한 것, 이곳에서 먹고살 수 있는 일을 하게 된 것, 또 좋은 친구들을 만난 것, 모든 것에 또한 감사하게 되었다.


이렇게 보면 세상은 참 살아볼 만한 곳인 것 같다. 마음먹기에 따라 그게 어디든, 어떤 여건이든 감사할 이유는 항상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