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좋기는 합니다만..
게임 디자이너라고 모든 그림을 다 잘 그리는 것은 아닙니다. 고냥이 일러스트를 뽑아내는 디자이너들은 로보트를 못 그리고, 메카닉 디자인하는 친구들은 말캉한 젤리풍 디자인을 못하지요. 기계와 무기가 강점인 저는 일본향 미소녀를 못 그립니다. 사랑과 정의의 이름으로 악당들을 쳐부수는 샬랄라 소녀들은 제 취향도 아니거니와, 해부학적으로도 이해가 안 됩니다. 저 정도 눈 크기면 눈알이 머리 밖으로 나와야 하고, 쪽집개로 뽑아 올린듯한 콧날에는 콧구녕도 없잖아요. 총천연색 머리의 뼈마른 소녀들이 30kg은 족히 넘어 보이는 참마도를 휘두르는 걸 보고 있으면.. 그냥 토목을 할걸 그랬나 싶은 생각도 듭니다.
이분들 직업은 대부분 기사 아니면 마법사입니다. 특이 사항으로는 레벨이 높아질수록 헐벗고 다니는 특징이 있습지요. 그래서 고명하신 분들일수록, 맨살 때리는 것보다 갑옷을 맞추기가 더 힘들 것 같은 복장을 하고 다니십니다. 전문용어로는 ‘비키니 아머’라고 하는데, 대충 금속으로 만든 비키니에 장갑과 부츠를 신은 여자 사람을 상상하시면 얼추 비슷한 그림이 나올 겁니다. 그래도 전쟁에 나가는데 맨살은 좀 그러니까, 썬탠 오일을 아낌없이 발라주면 대력적인 전투 준비가 끝납니다. 암튼, 저는 그런 종류의 그림을 못 그립니다. 그래도 이때까지는 디자인과 프로그램 중간에 끼어있는 업무를 하고 있어서 예쁜 여자 사람 그릴일이 없었습니다. 다행이지요. 아니, 다행이었지요.
여차저차하여, 비키니 갑옷을 입은 금발 여자 기사를 그리게 되었습니다. 옛날 같았으면 그냥 외주를 쏘고 치웠겠지만, AI님 덕분에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요즘엔 AI 님들이 워낙 그림을 잘 그리시잖아요. 그래서 닝겐이 대략적인 스케치와 색칠을 한 다음, AI님께 한번 넣다 빼서 마무리한다는 완벼칸 계획이 나왔거든요. 왜때문인지 세상이 점점 발전하면서 일이 계속 늘어나는 느낌이 들지만.. 뭐.. 일이 없어지는 것보다는 낫지요.
그림을 상상만으로 그릴 수는 없으니 레퍼런스가 있어야 합니다. 가장 좋은 건 역시 금발벽안 초미녀를 섭외해서 헐벗고 있어 달라고 하는 것이지만, 그랬다간 회사가 아니라 집에서 목이 잘릴 수 있습니다. 게다가 이 경우의 ‘목이 잘리다.’는 비유적인 표현이 아닙니다. 차선책으로는 역시 초절정미녀인 마나님께 마들을 부탁하는 방법이 있습니다만, 너무 안타깝게도 마나님은 금발벽안이 아닙니다. 경국지색에 절세미녀에 섬섬옥수까지 다른 조건은 다 완벼칸데 그놈의 금발이 아니라서.. 그저 아쉬울 뿐이지요.
알리를 뒤져서 빨개벗은 남자 인형 하나, 여자 인형 하나를 샀습니다. 고르고 골라서 관절은 금속제로 되어있고, 팔다리는 이중으로 구부러지며, 송구락, 발꼬락 세트가 다 들어 있은 애들로 장바구니에 담았습니다. 최저가로 샀으니까 굳틀리한 쇼핑입니다.
얼굴을 참고할 인형도 사야죠. 요즘에는 헐벗은 여자 인형에 각종 무기를 붙이며 노는 남자 사람용 소꿉놀이들이 나옵니다. 가격이 만만치 않지만, 큰맘 먹고 바로 결제. 선물로 받은 일러스트 집도 몇 권 있고, 미쿡 만화책도 두어 권 있으니 어떻게든 비벼 볼 수 있을 듯합니다. 이제 원화를 뽑고, 브러쉬업 같은 뒷일은 AI 님께 떠넘기면 됩니다.
근데..
뭔가. 어째..
쫌..
왜때문인지 유툽 추천 영상의 키워드가 확 바뀐 듯한 기분이가 듭니다. 후끈후끈한 성인용 인형 제조 영상이 올라오더니, 각종 여자 사람 인형 신제품 소식과 리뷰 영상으로 도배가 되었습니다. 아.. 구글님.. 아아.. 아마도 평소에 자주 보는 목공예 + 집 짓는 영상에다가 여자 사람 인형을 더해서, 성인용 여자 사람 인형 영상을 추천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하하..하하하..구글님..하하하하.:
사회 통념상, 우리는 다섯 가지 훈늉한 덕목을 갖춘 성인을 기려 오덕지인(五德之人)이라고 부릅니다. 아마도 여기서 말하는 오덕이란 문예, 기예, 서예, 예법. 그리고 궁예. 이렇게 다섯 덕목일 테지요.
구글님께서는 최근 저의 쇼핑 목록을 보시고, 이 정도면 능히 오덕이라 칭할만하다고 린정해 주신 것 같습니다. 어제부터는 광고탭에 핑크색 털 달린 수갑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대체 수갑에 털을 왜..아, 피부에 직접 닿으면 손목 시려울까봐? 구글님도 참, 세심하기도 하시지. 기기묘묘한 가죽 빤스도 추천해 주셨는데, 애들 동전 지갑을 만들어도 저거보단 원단이 많이 들 것 같습니다. 손재주 좀 있는 사람이면 운동화 끈만으로도 얼추 비슷하게 만들겠어요. 아마도 고명하신 디자이너분이 성심성의껏 디자인하신 모양새입니다만 제가 저걸 입었다가는 바로 잡혀갈 것 같습니다. 죄명이요? 도시에 멧돼지가 내려왔을 때, 멧돼지가 뭘 잘못해서 잡아가는 게 아니잖아요. 위험해 보이니까 잡는 거지요..
아..AI 님들 진짜..
AI 님들이 일상생활을 많이 바꾸실 것이라는 예상을 하긴 했습니다. 다만 그 방향과 속도가 지나치게 빠릅니다. 올해 송년 모임에서는 세 명이나 모가지가 날아간 소식으로 웃음꽃을 피웠습니다. 공교롭게도 셋 다 경력 20년이 넘는 프로그래머들입니다. 아, 그러고 보니 편집자도 한 명 짤렸네요.
그림 그려 주시는 AI 님들은 묘하게 현실 세계의 디자이너들을 완벼카게 복제했습니다. 뭐랄까 재능은 넘치는데 진짜 말을 오지게도 안 들어 쳐 먹는 천재를 그대로 복제하셔서, 이 냥반들이 진짜 필요한 그림은 안 그려주고 필요 없는 그림은 정말 기가 막히게 잘 뽑아 주십니다. 그래서 아직은 그림을 좀 못 그려도 말을 잘 듣는 닝겐이 차라리 일하기가 편합니다. 하지만 조만간에 걱실걱실 일 잘하고 UI 예쁘장한 분들이 나오실 거라는 건 우리 모두가 이미 알고 있습니다.
러다이트 운동을 하던 로동자들은 그래도 어디에 가서 뭘 뿌셔야 하는지는 알고 계셨습니다. 근데 저는 AI 님께 뗑깡을 부리려면 대체 어디로 가야 하는지 감도 안 잡힙니다. 경기 월세에 벤처 다니는 디자이너에게는 뭐랄까.. 이제야말로 미루고 미뤘던 목수일을 배울 때가 된 건가 싶습니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