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책회의- 변화
말을 적었다.
대화가 필요해서 20시간을 쏟아낸 적이 있다. 누구라도 상관없었다. 그저 사람이라면 어른 사림이라면 계속해서 이어서 말했다. 계속 말하고 싶어 재미있게 말하는 걸 터득했다. 그리고 계속 말할 수 있었다. 주말이면 이어져 왔던 나의 말하기는 이제 글쓰기로 바뀌고 있다. 차이를 아직도 다 아는지 알 수 없지만 처음엔 말하기를 적었던 것에 불과했다. 그저 머릿속에서 나오는 것을 빨리 적어 낸 것이다. 입 대신 손으로 적었던 것이다.
그래서 내가 뭘 말한 건지 마침표를 찍지 못하는 것이다.
벌써 깨닫았다고 말할 순 없지만 이젠 글로 말한다. 쓴다. 사색하고 떠오르면 새어나가지 못하게 입을 다물고 가만히 적어본다. 적다 보면 이렇게 쓰게 된다. 이렇게 변신한다.
두 발을 움직일 수가 없다.
눈길이 간다.
손가락이 쉴 새 없이 움직인다.
사색한다.
니체가 되었다.
칸트가 되고 싶다.
아이히만을 이해한다고 말하고 싶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에 그리스인 조르바처럼 큰소리치며 화를 낸다.
완벽한 어둠 앞을 걷지 못했다. 떠밀려 어쩔 수 없이 한 발을 내디딘 순간 사라져 버린 그 어둠은 아직도 내 기억 속에서 망설임으로 남아 있고 두려움으로 나를 막아선다. 인생은 가만히 있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 밤이 되고 아침이 오듯 두려움도 잊어버린다. 더럽혀진 것들이 분리되어 버려지기 전 다시 보게 되듯 나의 어둠을 본 그날의 승선권을 보고 찢어버린다. 위에서 아래로 겹쳐서 한 번 더 찢어버린다.
어두웠던 내 방에 햇볕이 들어온다. 그 빛을 보고 빛 쪽으로 엉덩이를 옮긴다. 엄마 품으로 들어가 안기는 아기처럼 따스함을 가진다. 그리고 나는 엄마에게 속삭인다. '스삭쓱싹' 연필소리와 조용히 '째착째깎' 거리는 초침소리와 함께 가만히 귓속에다 속삭여 본다. 깨지 않는 꿈이기를 바랐건만 엄마는 별처럼 사라진다. 그 완벽한 어둠도 방 한 구석에서 숨어 있었던 것이다. 나의 연필소리에 엄마는 사라지고 어둠은 나타났다. 불을 켠다. 어둠은 사라진다. 타고 있는 불 곁에서 내 망설임도 태워버린다. 서서히 타길 바랬건만 한 순간에 뜨거워진 나의 열정은 검디검은 재가 되어 쓰러져 버렸다. 나의 어둠은 나의 검은 재가 되었다.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땅 위에 누워 하늘만 바라보듯 방구석에 누워 천장만 바라 볼뿐이다.
바람을 가르며 달리던 그곳을, 숨 가쁘게 땅을 기어오르던 그 위를, 삐집고 들어가 막힌 숨소리를 듣던 그 속을 스치며 가만히 지워 버린다. 하나씩 하나씩 끄집어내고 이쪽저쪽 나누고 추억한 후 버린다. 비운다.
두 팔을 머리 위로 번쩍 들어 올려 다시는 주워 담지 않겠노라 산산조각 내 버리려고 던지려 할 때 검은 재가 되어 버린 내 두리가 땅 속으로 파고 들어가고 있음을 느낀다. 마침 하늘에서 떨어지는 빛 같은 빗물에 나는 땅 속 깊숙이 따라 들어간다. 던져버리지 못한 산산조각 내어 태워버리지 못한 나의 추악한 과거와 허망한 추억들은 땅 위에서 흩어져 버려 나와 분리되었다.
나는 멈춰있다. 가만히 서 있다. 내 손은 꿈틀대며 지렁이처럼 땅 속을 기어 다닌다. 내 발은 천천히 밑으로 밑으로 파고 들어간다. 내 목은 길어져 계속 뻗어져 나간다. 나의 어둠을 재가 되어 버린 나는 휘저어버린다. 낸 눈이 빗물과 함께 스며든 한 줄기 빛을 찾아낸다. 나는 완벽한 어둠을 가르고자 빛으로 나의 머리를 안테나처럼 쭈뼛 세운다. 그렇게 땅 위로 올라온 나의 머리는 새싹이 되었다.
스며들었다. 마침 그때 있었으면 하고 무언가를 바랄 때 '대책회의'는 나에게 마침 다가왔고 나는 스며들었다. 때로는 어둠을 밝힌 빛처럼 태워버릴 불처럼 젖어든 물처럼 나를 밝히고 사라지게 하고 다시 태어나게 했다.
달리면서 생각을 지우려고 했던 나는 산책하며 사색을 그리고 있으며 술 한 잔에 농담 한 그릇으로 헛소리를 지껄이며 어둠이 시작되었다. 이제는 물 한 잔과 따뜻한 차 한잔으로 어둠의 끝을 책소리와 시작한다. 어둠의 시작과 끝은 이렇게 같이 어둡다. 그러나 노을과 여명은 다른 것이다. 나는 이제 여명을 보게 된다.
참을 수 없는 분노에 욕지껄이를 내뱉던 나의 더러운 입은 더 이상 가식뿐인 세상과는 단절하듯 담배연기로 온몸을 소독하던 하얀 연기처럼 하늘로 흘려보낸다. 나를 흘려보낸다.
말 목을 베던 그 사람처럼 나를 쾌락으로 이끌던 나의 다리와 나를 탐욕으로부터 꺼내 줄 두 손은 돌아가지 않겠노라고 베어버렸다. 눈은 지나가는 빨갛고 부드러운 살결의 아름다움에 고개를 돌렸지만 이제는 하얀 눈 속으로 드러난 검은 흙색을 보듯 종이 위에 글자만 볼 뿐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하얀 눈 위에서 만끽하고 있는 것이다. 베어버린 손은 움켜쥐기만을 원했던 모든 것을 잡지 못한다. 엄지와 검지를 중지가 받치면서 써 내려가는 글자를 위해 책장을 넘기기 위해 뜨거운 숨을 불어 녹여야만 쓸 수 있는 나의 유일한 친구가 된 것이다. 이렇게 나는 변했다. 아니 나는 변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