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책을 읽는 이유
어린 시절 나의 절실한 소원은 5일 장이 서지 않는 것이었다.
7남매를 키우신 어머니는 고추밭이나 과수원에서 노동을 하고 어둑해져야 집으로 돌아오셨다. 어느 날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집에서 쉬고 계시던 아버지가 안 계셨다. ‘장 서는 날이구나. 오늘 또...’라고 생각할 때였다. 골목 끝에서 아버지의 노랫소리가 들렸다. 구슬픈 가락의 ‘울고 넘는 박달재’와 욕지거리, 상반되는 두 개의 소리가 진동했다. 그 소리에 가족 모두는 두려움에 떨었다. 술만 먹으면 눈빛이 달라지는 아버지. '잘 다녀오셨냐'는 인사에도 아버지는 그저 욕을 내뱉을 뿐이다. 잠시 후 밥상이 날아가 벽에 부딪혔다. 그릇들이 떨어지면서 방바닥에 나뒹굴었다. 무엇이 그리 마음에 안 들었는지, 밥상에 욕을 퍼부었다.
“술을 먹었으면 먹고 곱게 자지, 도대체 왜 그러는데?”
“이 년이 뭘 잘못 먹었나? 왜, 돈 좀 번다고 남편이 우습게 보이나?”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어머니의 한쪽 눈이 부어올랐다. 어머니의 눈에서도 나와 동생들의 눈에서도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렀다. 소리 죽여 울면서 다짐했다. ‘절대로!, 난 절대 아버지처럼 살지 않을 거야!’
세월이 흘러 상견례를 앞두게 되었다. 직장생활 중에 아내를 만났다. 아내의 부모님은 "가정 형편이 뭐 그리 중요하냐, 사람만 좋으면 된다."라며 나를 든든하게 생각해 주었다. 아내와 결혼한다는 행복감과 설렘으로 부모님을 모시러 시골에 갔다. 집에 도착해서 부모님께 인사를 드렸다. 그런데 어머니가 안대를 하고 계셨다.
"엄마, 눈은 왜 그래요?"
어머니는 한쪽 눈이 피멍으로 부풀어 있었다. 나는 절망했다. 한 갑이 넘어서도 아버지의 폭력은 여전했다. '상견례가 내일인데...'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상견례할 수 있을까? 마음속에 가득 찬 원망과 분노, 눈물을 감추며 상견례 장소로 이동했다. 무슨 정신으로 갔는지 모르겠다.
아내에게 집이 가난한 것과 시아버지 될 분이 술을 좋아하신다는 것은 말했지만, 술주정과 폭력은 차마 이야기할 수가 없었다. 어려서부터 항상 들어왔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아비에 그 자식이라는 말! 나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무슨 말을 한단 말인가!' 그저 모든 게 원망스러웠다. 차라리 아버지가 세상에 없었더라면...
“사돈 부인, 얼굴이 왜 그러세요?”
“시골에서 사과 적과(열매솎기)를 하다가 떨어지면서 나뭇가지에 얼굴을 부딪혔어요.”
어머니는 그렇게 둘러 됐다. 퉁퉁부은 눈으로 어머니는 애써 웃고 계셨다.
아버지의 술주정과 폭력에 어머니는 항상 ‘제발 네 아버지 닮지 마라. 네 아버지처럼 살지 마라’를 귀가 닳도록 말씀하셨다. 동네 어른들은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고, 저 애들도 크면 지 아버지하고 똑같을 거다.’라는 말을 수시로 하였다. 그때마다 ‘나는 절대 그렇게 되지 않을 거야. 절대!’라고 중얼거리며 머리를 흔들었다.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아버지와 닮아가고 있었다. 아이들에게 사랑을 표현할 줄 몰랐고, 식탁에서는 아이들과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놀아 주어야 하는지 몰라 어색하고 서툴기만 했다. 어느 날 집에 돌아와 보니 아내와 아들이 서로 부둥켜안은 채 울고 있었다. 아내의 손에는 아들의 통장이 들려 있었다. 아들이 세뱃돈과 용돈으로 모은 150만 원을 생활비에 보태 썼던 것이다. 그 돈만큼은 절대 손대지 말자고 아내와 약속을 했는데...
왜 이렇게 되었을까? 아내와 나는 옷 한 벌 제대로 사 입은 적이 없을 정도로 검소하게 살았는데, 집에 모아둔 돈은 없고 갈수록 빛만 커져갔다. 심지어 아파트 전세금을 돌려받지 못해 대출 이자가 자꾸 커져만 갔다. 마음은 피폐해져 갔다. 무능함을 들키기라도 한 것처럼 가족들에게 짜증을 냈다.
아내는 “아이들이 당신을 닮지 않았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어린 시절 그렇게 아버지를 닮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던 나이기에 너무 큰 충격을 받았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잠자리에 들어서야 눈물이 났다. 나는 나를 바꿔야만 했다. 어느 책에선가, 책을 읽으면 삶이 혁명적으로 바뀐다는 글을 본 것이 떠올랐다.
'그래, 이런 나라도 책을 읽으면 변할 수 있을지도 몰라.'
그때부터 책을 읽었다. 출퇴근길 버스와 지하철에서 책을 읽다가 정차 역을 지나치기도 했고, 길을 가며 읽다가 타인과 부딪힐 뻔하기도 했다.
미친 사람처럼 자기 계발서와 육아서를 읽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원망했던 나처럼, 아이들이 나를 원망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아빠의 퇴근시간을 두려워하기보다 행복함에 겨워 기다리기를 바라면서 그렇게 책을 읽고 또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