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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그라미 Jan 11. 2022

브로커로 살아간 6개월, 한 사장과의 이별

내 남자 이야기 (64)

브로커 생활을 하면서 수개월을 함께 했던 한 사장과의 관계는 어느 한 사건으로 인해 종착역에 도착했다.


어느 날, 한 사장의 아바타로 '쩐주'측 금융브로커를 만나는 자리였다. 함께 나온 듯한 중년의 남자는 나름 번듯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는 갑자기 5대 어음 이야기를 넌지시 흘렸다.

"거. 부사장님. 아직 한참 젊은 분인데 한물 간 노인네 뒤치다꺼리 그만 하시고 좀 건설적인 일을 해보는 게 어때요? 아무리 봐도 물 건너간 공장인데... 죽은 자식 불알 만져봐야 어디 살아 돌아옵니까? 딱 보니 몇 개월 여기저기 쫓아다니느라 돈 버리고 시간 버리고... 열정만 저 깊은 땅속에 처박혀 버려서 한숨도 안 나올 처지가 된 것 같은데... 이제 느낌이 팍 오지 않아요? 쓸데없이 허송세월 보냈다고?"

"......"

"그러지 말고 많은 사람 만나봐서 알겠지만 이 바닥에 사기꾼 천지니까.. 그만 정신 차리고 우리 사무실로 들어와서 어음 일이나 배워봐요... 소문 들어보니 인맥도 나름 괜찮고 사업도 해봐서 일머리도 잘 안다고 하던데. 5대 그룹 융통어음 한 장이면 순식간에 팔자 고치고 하고 싶은 거 다 할 수 있어요."


도대체 이 사람은 뭐지? 나에게 뭐라고 지껄여대는 거야...


매일 눈앞에 캄캄한 암흑이 펼쳐지는 것 같은 내 처지가 한심스러웠던 시절. 자살을 떠올릴 정도로 스스로를 한탄하며 비관에 젖어 살던 시간이었다. 어딘가 손을 벌릴 수도 없어 어떻게 해서든 살아보겠다고 버둥거리다 이런 시궁창까지 발을 적신 것 같아 마음이 시렸는데... 이런저런 뼈 때리는 소리까지 듣게 되니 그야말로 멘탈붕괴를 느끼는 순간이었다.


한 사장의 간곡한 부탁으로 매번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희망이 없음을 알아가고 있었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미련을 두고 꾹 참고 있었던 것인데... 이제는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간 참담한 기분을 억누를 수 없었다.


그날 저녁 한 사장과 쓴 소주를 마시며 하루 동안의 미팅 결과를 보고하는 자리에서 솔직한 나의 심정을 이야기했다.

"한 사장님. 이제 그만 접으렵니다. 안 되는 건 안 되는 겁니다. 현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공장 포기하시고 형제들 재산 관련 재판에 올인하십시오. 뻣뻣하게 대들지 마시고 필요하다면 형네들 만나서 사과라도 하셔서 노후 준비도 하시고요."


나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솔직히 사장님의 조건과 주변 환경을 보여주시면서 하신 말씀을 듣다 보니 저도 내심 욕심이 생겼던 건 사실입니다. 어쩌면 정말 내 것이 될지도 모른다는 환상에 젖었던 것 같아요. 공장, 논현동 집, 포천 철원 땅.... 모두 제 삶에서 한 번도 가져보지 못했던 것들이라 곧, 금방이라도 내 것이 되지 않을까??라는 욕심 말이죠."


"한 번쯤은 꿈이라도 좋았어요.... 그런데 이제 꿈에서 깰래요."

"석아. 왜 그래? 그놈들이 뭐라고 했길래 그래? 나 배신하지 말어!. 나 곧 죽어.."

"배신이라뇨...? 제가 3개월 동안 계절이 바뀌는 것도 모르고 사장님 시키는 것 다하면서 미친놈처럼 돌아다녔는데요. 사장님이 건네준 돈 10원짜리 하나라도 허투루 쓴 적이 있었나요?? 그런데 배신이라뇨!!"

한 사장은 매일같이 모든 영수증을 받아 내가 사용한 출처를 검사했고 10원짜리 동전까지 남은 돈을 모두 회수했다.

"제가 강남에서 집까지 걸어 간 적이 몇 번이나 있었는지 아세요? 종로에서 걸어간 것은 말할 것도 없고요."

"아. 왜 말을 안 했어. 그렇게 힘들면 얘기를 했어야지...!"


아, 이런 사람 봤나. 정말 그가 몰라서 그런 건 아니었다.

"정말 모르셨다고요??"


우리 두 사람은 이후로 한숨을 내쉬며 아무 말 없이 쓴 소주만 삼켰다.

"배신이라고요? 그럼 배신으로 정리하세요!"


한 사장과 나의 악연은 그렇게 끝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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