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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호 Aug 27. 2021

인스턴트 음식 같은 영화, 개운한 맛이 없네

파이낸셜뉴스 게재, <역린> 영화평.

[김성호의 영화가난다 12]  <역린>


[파이낸셜뉴스] 요리사에게 필요한 재료를 줄 테니 원하는 요리를 만들라고 한다면 쓰고 싶은 재료만을 사용해 맛있는 요리를 내어놓을 것이다. 하지만 무작위로 많은 재료를 주고는 이를 모두 사용해 결과물을 내놓으라 한다면 냄비가 끓어 넘치는 엉망진창인 요리가 되기 십상이다.


섹스·노출·서스펜스·폭력, 우정과 가족 등 감동을 자아내는 요소들까지. 이상은 수십 년 동안 흥행 성공을 위한 기본적인 요소로 신봉된 덕목들이다. 영화의 성공과 흥행 성공이 동의어가 되어버린 현실 속에서 제작자들은 완성도를 다소 해칠지라도 수익과 직결되는 요소들을 포기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정해진 조리법에 따라 조리하는 인스턴트 음식과 같이 상업적 요소들의 기계적 배합을 통해 만들어진 영화들이란 깊이가 없는 싸구려 제품이 되기 십상이다. 이러한 영화들에 길들여진 관객들을 사로잡기 위해 제작자들은 더욱 자극적인 영화를 만드는데 골몰하고, 이는 작가들이 창조에 대한 고민 없이 끊임없는 자기복제를 거듭하게 하는 악순환을 초래한다.


더욱 큰 문제는 이러한 세태가 영화를 크게 상업영화와 예술영화로 구분지어 상업적 요소를 충분히 갖추지 못했다고 믿어지는 영화들의 설 자리를 근본부터 위협한다는 점에 있다. <역린>이 바로 그런 영화다.


현빈이 연기한 즉위 첫 해 스물 다섯의 정조. ⓒ롯데엔터테인먼트


정조 1년의 어느 날, 조선의 22대 왕 정조가 반대세력들에 의해 암살 위험에 놓인다.


할머니인 정순왕후와 조선 군사의 8할을 지휘하는 구선복 장군, 조선 최고의 자객집단까지 가담한 만 하루 동안의 암살시도가 135분에 이르는 러닝타임 속에 담겼다. 당파싸움 속에 병들고 무너져가는 조선을 일으키고자 했던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개혁군주는 이제 막 제위에 오른 젊디젊은 왕일 뿐이다.


영화는 상당히 긴장감 있게 진행된다. 선하지만 약한 왕이 강력한 세력으로부터 위협을 받는다는 설정이 긴장감을 자아내고, 공포 영화에서나 쓰일 법한 공격적 사운드 활용과 중간 중간 등장하는 강렬한 씬들이 극적 긴장감을 느슨하지 않게 잡아두는 장치로 기능한다. 두 시간을 훌쩍 넘는 러닝타임에도 영화가 그리 길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극장에 앉아 즐기며 지켜보는 것을 넘어 극장에서 나온 후에 느껴지는 여운과 사고의 측면에서 바라보면 이 영화가 매우 빈곤한 작품이라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 시나리오 상의 내용이 실록에 기록된 부분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보니 사극임에도 온전히 창작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바로 이러한 부분이 독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단 하루 이야기를 다루다보니 전반적인 상황묘사를 심도 있게 할 수 없다는 제약이 있었겠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정조가 처한 정치적 상황은 그저 피상적으로 묘사될 뿐이며 러닝타임 대부분이 왕의 암살이라는 단순한 상황묘사에 그치고 있다는 점은 치명적인 약점이라 할 만하다.


살수 을수를 연기한 조정석. ⓒ롯데엔터테인먼트


오직 한지민이 연기한 정순왕후만이 정치적으로 정조의 가장 큰 적으로 보여질 뿐이고 노론세력은 하루 동안의 이야기에서 철저하게 가려져있다. 조선 군권의 8할을 장악하고 있다는 구선복 장군 역시 피상적 이미지로만 등장한다. 그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결정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조금의 분량도 할애되지 않는 것이다. 심지어는 암살계획을 지휘하는 안동에서 올라온 양반은 얼굴조차 몇 번 등장하지 않는다. 이쯤되면 묻지 않을 수 없다. 대체 이 영화에서 정조는 누구와 싸우고 있는 것인가?


정조가 처한 정치적 상황과 적대세력에 대한 묘사가 적다보니 암살음모를 저지하는 후반부 전개도 다분히 개연성이 떨어진다. 쿠데타 음모의 분쇄는 크게 세 가지 방향에서 이뤄진다. 하나는 반란의 주역인 구선복 장군을 극적으로 설득하며, 또 하나는 궁궐의 담을 넘어 암살을 기도한 세력을 힘으로 제압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정순왕후와 대면해 그녀를 무릎꿇림으로써 얻어진다. 얼핏 매끄럽고 자연스럽게 전개된 것도 같지만 조금만 떨어져 생각해보면 이 모두가 얼마나 황당한 일인가를 깨닫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노론의 실세로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여했으며 군권을 장악하고 역모에 가담한 인물이 그저 말 몇 마디로 설득될 리 만무하고, 노론이 실권을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장용영 군사들을 궁궐 내부에 배치할 수 있었다는 것도 비현실적이다. 또 노론의 수장처럼 그려지는 정순왕후가 정치적으로 패배하는 순간마저도 당혹스러울 만큼 급작스럽다. 굳이 이후의 역사적 전개를 살펴보지 않더라도 영화는 다분히 삼류 판타지스럽다. 감독은 이로써 무엇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일까? 비틀린 세상을 변혁하려는 개혁군주의 의지는 백마 탄 젊은 왕의 등근육보다도 조명 받지 못하고 있는데.


영화는 개연성을 높이는 대신 존재감 강한 캐릭터들을 통해 이야기를 끌어가려한다. 사실 이 영화의 가장 큰 특징은 조연급 이상의 캐릭터가 상당히 많이 등장한다는 점에 있다. 현빈과 정재영, 한지민, 조정석, 조재현, 박성웅, 송영창, 김성령, 정은채 등 이름 있는 배우들이 많이 출연했고 이들 모두가 주어진 분량만큼 각자의 드라마를 풀어내고 있는 것이다.


외로운 왕과 그를 지켜보는 심복들, 고아를 데려다 암살자로 기르는 집단과 그 안에서 피어나는 우정, 아들을 지키려는 어미의 모성과 궁궐의 암투에 희생되는 인물들, 그리고 틈이 없어도 악착같이 집어넣는 사랑이야기까지. 그야말로 온갖 드라마를 한 편에 구겨 넣은 꼴이 아닌가?


정조의 초상을 들고 있는 암살집단의 우두머리 광백. ⓒ롯데엔터테인먼트


이쯤되면 갑수와 을수의 엇갈린 운명이나 을수와 세탁방 나인의 비극적 사랑, 그들 모두의 비틀린 운명이 무엇을 위해 삽입된 것인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어린 나인을 바라보는 월혜의 애틋한 마음과 상책에 대한 왕의 마음 역시 마찬가지다. 가뜩이나 많은 캐릭터에 분산되는 관심을 잡아둘 구심점도 없는데 대부분의 캐릭터에 나름의 드라마까지 부여하다니 정말이지 이해하기 어려운 결정이다.


궁궐 안에서 벌어진 대결전 역시 실망스럽다. 감독이 누아르 영화를 너무 많이 봤는지 암살자들과 장용영 군사들의 결전에서는 김래원 주연의 <해바라기>나 원빈 주연의 <아저씨>의 클라이맥스 장면이 떠오를 정도다. 그리고 이로부터 이어진 엔딩씬은 폭소를 자아낸다.


<슈렉>시리즈의 '프린스 챠밍'을 연상시키는 백마 탄 현빈님이 스크린을 가득 채우고 바람을 맞으며 저 먼 곳을 지긋이 응시하다 들판으로 말을 달려 나가는 장면. 그리고 클로즈업. 이로부터 우리는 너무 멋을 부리다보면 오히려 비웃음을 살 수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런 장면에 만족할 수 있는 사람이라곤 현빈 팬클럽 회원들뿐이지 않을까?


적절한 노출과 서스펜스, 폭력과 액션, 우정과 사랑까지. 과연 이 영화가 온갖 화학조미료를 뿌려 만들어 놓은 인스턴트 음식과 다른 것이 무엇인가. 인스턴트 음식이 미식가를 만족시키지 못하듯 영화 속 단 하나의 드라마도 관객의 가슴에 가 닿지 못할 것이 틀림없다.



김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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