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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호 Dec 17. 2021

절망의 순간에도 연대를 이야기한다

파이낸셜뉴스 게재, <디태치먼트> 영화평.

[김성호의 영화가난다 15]  <디태치먼트>


메인 포스터 ⓒTRIBECA ENTERPRISES LLC


[파이낸셜뉴스] 토니 케이 감독의 마지막 영화다. 에드워드 노튼 주연의 1998년작 <아메리칸 히스토리 X>로 충격적인 데뷔를 한 이 감독은 제작된 지 3년된 <디태치먼트>를 들고 지난 2014년 한국을 찾았다.


쥬세페 토르나토레나 켄 로치 같은 거장도 그러하듯 할리우드 거대 영화사의 유통망을 거치지 않은 영화가 국내에 소개되는 일은 상당히 드물다. 그마저도 상영관이나 상영일수가 넉넉하지 않아 상황이 맞지 않으면 보지 못하고 넘어가기가 십상이다. <디태치먼트>에도 1만3000명이 못되는 관객만이 들었을 뿐이다.


하지만 <디태치먼트>는 훌륭한 작품이다. <아메리칸 히스토리 X>에서 에드워드 노튼이 연기한 백인우월주의자의 삶을 통해 미국내 인종차별문제의 심각성과 폭력의 양상을 적나라하게 폭로한 바 있는 감독은, 이번엔 애드리언 브로디를 내세워 미국 공교육의 현실과 그 속에서 말살되어가는 인간성을 극적으로 그려냈다.


더불어 <피아니스트>로 2003년 제75회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은 바 있는 애드리언 브로디는 생애 최고의 연기로 이 극적인 영화에 깊은 설득력을 부여한다.


공원 벤치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Mr.시볼트와 Dr.파커 ⓒTRIBECA ENTERPRISES LLC


그가 연기한 헨리 바스는 각 학교를 돌며 결원이 난 자리를 메우는 기간제 교사다. 그는 학생들을 능숙하게 다루는 실력있는 교사지만 과거에 받은 상처 때문에 어디에도 정착하지 않고 살아가는 인물로 그려진다.


영화는 그가 유난히 문제아들이 많은 공립학교에 부임해 겪는 두 달 간의 이야기를 그린다. 분노에 가득 차있는 아이들과 무엇에도 의욕이 없는 아이들, 온통 상처입고 병든 마음을 가진 아이들 가운데서 헨리 바스는 어떤 표정도 드러내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수업을 진행할 뿐이다.


그동안 교육을 소재로 한 많은 영화는 작위적인 방식으로 감동을 주는데만 몰두해왔다. 험난한 현실 속에서도 언제나 희망은 있으며 이것이 바로 그 사례라는 식의 '미담의 영화적 소비'가 진행돼 왔던 것이다. 학교와 교사들이 처한 실상을 적나라하게 그려내거나, 갈등이 발생하고 진행되는 양상에 집중하는 영화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반면 <디태치먼트>는 끝도 없이 추락하는 교권과 목적없이 방황하는 학생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담아냄으로써 우리의 교육이 어디에 서있고 또 어디로 나아가는지 자문하는 영화다. 성적인 학대를 당했던 어머니와 그녀의 죽음이라는 고통스런 과거로부터 해방되지 못한 채 떠돌이 교사로 살아가는 헨리, 영화는 그가 에리카와 메레디스라는 두 아이를 만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그 끝은 절반의 실패와 절반의 성공으로 마무리된다. 학교를 벗어나 거리의 여인으로 살아가는 에리카, 끊임없이 상처받다 마침내 자살을 선택하는 메레디스. 교사인 헨리와 그의 도움이 필요한 두 소녀의 관계 속에서 영화의 제목인 '디태치먼트 Detachment, 거리를 둠, 분리'는 그 의미를 전면에 드러낸다. 누구도 타인의 아픔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며 해결해주지도 못한다는 것, 결국 고통이란 당사자인 개인이 오롯이 견뎌내고 극복해야 할 몫이라는 것. 영화는 우리 모두가 철저히 분리된 개체라고 말한다.


같은 포즈로 나란히 벽에 기댄 헨리와 에리카. 한 다리로 땅을 디딘 둘의 포즈는 서로가 모두 결함있는 인간들임을 상징한다. ⓒTRIBECA ENTERPRISES LLC


동시에 영화는 서로에게 손을 내밀고 아픔을 보듬는 연대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메레디스의 죽음 이후에 에리카가 있는 청소년보호소로 향하는 헨리, 거리에서 몸을 팔던 소녀에게 먼저 손을 내민 그의 우연한 행동이 그녀를 절망으로부터 구하고 새로운 삶을 선사한다.


그래서 이 영화는 공립학교의 교육현실 속에서 인간성에 위협을 당하는 교사와 학생의 이야기인 동시에, 현대사회의 고통받는 개인들의 현실을 일깨우고 위로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서로 고통을 나누고 직시해 이겨내는 것만이 그 아픔으로부터 진정으로 해방되는 것임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때로는 이토록 현실적이고 고통스런 이야기가 커다란 위안을 던져주기도 한다. 이 세상에 고통을 겪는 것이 결코 나 혼자만은 아니며 우리는 언제든 서로의 아픔을 보듬을 수 있다는 기대를 남기기 때문이다.


무너지는 한국의 교육현실에 대해서는 굳이 언급하지 않겠다. 이미 너무나 잘 알려진 문제일 뿐더러 이 영화를 보는 것만으로도 내 부족한 솜씨로 표현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걸 깨달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이 영화가 우리가 처한 현실에도 매우 유효한 물음을 던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형식적으로도 이 영화는 몹시 돋보이는 작품이다. 중간중간 삽입된 애니메이션 기법들과 인터뷰를 비롯한 다큐멘터리적 장치들, 정주행하는 헨리의 시간 속으로 과거의 기억과 미래시점의 인터뷰를 유기적으로 삽입한 솜씨는 정말이지 대가의 그것이라 할 만하다.


기억의 파편처럼 삽입된 과거가 조금씩 맞추어져 마침내 그 모양을 드러내는 장면의 충격. 미래시점의 인터뷰들이 그 의미를 얻고 어느 순간 무거운 메시지를 전해줄 때의 감회. 이러한 순간이 주는 감상은 이 영화의 형식이 내용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증명한다.


그밖에도 한 장면 한 장면을 찍을 때마다 얼마나 많은 고민이 있었을까 생각하게 만드는 세심하고 사려깊은 연출은 저절로 보는이의 감탄을 자아낸다. 이 얼마나 훌륭한가!


헨리와 에리카의 찬란한 순간 ⓒTRIBECA ENTERPRISES LLC


세상을 비판하고 인간을 관찰하며 스스로의 실험을 계속해나가는 토니 케이 감독의 영화를 나는 지지한다. 그의 탁월한 영화가 오로지 탁월한 재능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님을 알기에 나는 그를 존경한다. 부디 독자 여러분께서도 이 영화로부터 내가 느낀 것과 같은 것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



김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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