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사 입사준비 6
두 가지 상황을 가정해 보자. 첫 번째, 길 건너에 당신과 가장 친한 친구가 당신을 보며 손짓하고 있다. 당신은 그에게 다가가 무슨 말을 처음 할 것인가? 두 번째, 길 건너에 당신이 꿈에 그리던 이상형이 서 있다. 당신은 반드시 그(그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당신은 그(그녀)에게 다가가 무슨 이야기를 할 것인가? 사람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대개의 경우 당신은 '인사'부터 건넬 것이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식사는 했어요?' 인사의 본질은 안부를 묻는 것이다. 상대가 어떻게 지냈고 지금 상태는 어떠한지에 대한 나의 관심이 곧 인사로 표현되기에 인사를 나눈다는 것은 관심과 애정, 그리고 친분을 나누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인사는 인간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언어행위라고 할 수 있다. 가족과 선생님, 친구들 직장동료에 이르기까지 일상적으로 주고받는 첫 마디가 늘 인사인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식사는 했어요?'하는 물음이 일상적인 인사였던 시절이 있었다. 끼니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이 물음은 모두가 가난하여 서로의 사정을 내 일 마냥 짐작할 수 있었던 이들이 서로에게 건네는 위안과 연대의 인사였다. 배고픈 이들을 돌아보는 애정과 그런 마음을 배려하는 대답이 곧 한 시대의 인사가 되었다.
이제 사람들은 '식사는 했어요?'하고 묻지 않는다. 대신 '안녕들 하십니까?'하고 말한다. 더이상 배를 곯지 않지만 그렇다고 안녕하지도 못한 상황에서 당신은 과연 안녕한지를 묻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지난해 한국사회의 겨울을 뜨겁게 달군 '안녕들 하십니까?' 열풍은 적절한 사례가 될 것이다.
일종의 문화운동으로까지 평가되며 한국사회에 엄청난 파문을 그린 이 열풍의 진원지는 어느 대학교에 붙은 한 장의 대자보였다. 철도 민영화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수 천의 노동자가 직위해제되고 마을 한복판에 들어선 송전탑에 반대하며 주민이 음독자살을 하는 이 흉흉한 시절에 여러분께서는 과연 안녕들하신가 하는 어느 대학생의 물음이었다. 이 물음은 곧 수천 장에 이르는 다른 대자보로 응답받았고 점차 우리시대의 안녕하지 못한 사람들이 역시 안녕치 못한 다른 이들과 안부를 묻고 마음을 나누는 계기로 발전하였다.
거대한 부조리와 무너져가는 연대 속에서 불안과 무기력감을 느끼던 이들이 서로에게 '나는 안녕하지 못한데 당신은 안녕하신가?'하는 인사를 건넸다. 그렇게 내걸린 수천 장의 대자보 속에는 각자의 자리에서 느끼는 불안과 무기력감, 좌절과 우울의 냄새가 강하게 배어 있었고 이들은 서로에게서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것과 같은 안녕치 못함을 느끼고 위안받았다. 그렇게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 열풍은 곧 우리사회가 안녕하지 못함을 진단한 시대의 인사말이 되어버렸다.
문득 고개를 드니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 열풍도 어느덧 지난 계절의 이야기가 되어버린 듯하다. 더는 어디에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가 붙었다더라 하는 소식이 들리지 않고 사람들도 그 때 만큼 빈번하게 서로의 안녕을 묻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상황이 나아진 것은 아니다. 믿기 어려운 대참사가 대한민국을 분노와 좌절로 물들였고 우리는 지난 겨울보다 더욱 안녕하지 못한 봄을 겪어내야 했던 것이다. 안녕들 하시냐고 묻기조차 참담했던 적막한 절망의 시간이었다.
식사하지 못했기에 밥은 먹었느냐 물었고 안녕하지 못하기에 안녕들 하시냐고 물었다. 나 역시 힘들지만 상대를 먼저 생각하는 마음들이 모여 그런 인사를 만들었다. 그러므로 인사는 희망이다. 나 혼자만은 아니라는 배려와 위안의 말이다. 모든 혼자들이 둘이 되고 셋이 되기 위해 던지는 첫 마디다. 곧 연대인 것이다. 무력감과 슬픔, 분노와 절망이 혼재된 오늘을 떨치고 일어나기 위해 우리는 서로 연대해야 하고 바로 이것이 여전히 안녕하지 못한 우리가 서로의 안녕을 묻고 또 물어야 하는 이유다.
2014. 6. 9. 월요일
김성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