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골룸은귀여워 Jan 05. 2021

가난? 난 가?

“야, 나 내일 출근해야 돼. 난 이만 가보겠어.”

“내일 토요일이잖아. 무슨 출근이야. 더 있다가 가!”


금요일이라 신나는 마음에 한 주의 여유, 술자리를 만들어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났다. 급하게 뛰어온 탓에 아직 끝내지 못 한 일이 남아있지만, 금요일은 일주일에 단 한 번뿐이니 어쩌겠는가. 내일 일찍 일어나서 마무리하고 다른 술자리나 만들어야지.


핸드폰을 켜 택시를 잡고 이태원에서 강남으로 돌아간다.

“4번 출구에서 내려주세요.”


다리 하나만 건너면 돼 멀지도 않고 한강 야경이 너무나 아름다워 오밤중에 타는 택시는 언제나 상쾌하기 그지없다. 옛날 같으면 덜덜거리면서 탔을 택시인데, 월급 받는 곳 있다고 이제는 편리함, 안락함이 우선이다. 대학생 때는 꿈도 못 꾸던 택시였는 데.


대학교 3학년 겨울방학, 정말로 듣기 싫었던 교양필수과목 수강을 더 미룰 수가 없게 됐다. 내 딴에는 머리 굴린다고 단기간에 듣고 끝내려 계절학기 수업을 신청했다. 수업은 방학 첫날부터 바로 시작해 2~3주면 끝나는 수업이었지만 숙소가 문제였다. 지방에서 올라와 기숙사 생활을 하던 나에게 청소, 방역을 위한 1주일의 퇴소 기간은 참 애매한 시간이었다. 대부분의 경우 집에 내려갔다가 입사가 가능 하자마자 바로 올라왔지만 이번에는 그럴 수 없었다. 수업을 들어야 하니.


그런데도 나에게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바로 동아리방. 지은 지 오래된 건물이라 귀신 목격담을 종종 듣곤 했지만, 그게 대수인가? 같은 층에는 온수가 나오는 샤워실도 있고, 방안에는 난로가 있으니 언제나 훈훈한 온도가 유지됐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넓은 동아리방이 공짜! 혼자 지낼 확률까지 높은 동아리방!


나는 아무 불만 없이 동아리방으로 직행했고 1주일 치 짐을 대충 풀었다. 컴퓨터 앞에 앉아 아직 덜 끝난 알바 일을 마무리하고, 편의점에서 사 온 라면, 맥주와 함께 나만의 화려한 식사를 했다. ‘이만하면 나쁘지 않군. 훌륭하군. 내가 동아리 하나는 잘 들어왔단 말이야.’ 잘 준비를 마치고 나를 잠에 솔솔 빠지게 해 줄 영화 ‘싸이코’를 다시 감상했다.


시험 기간 때나 방학 때 종종 동아리방에서 밤을 새웠던 지라 익숙하게 모든 일상을 소화할 수 있었지만, 그날 밤 영화는 유독 무서웠다. 오랜만에 봐서 그런지 흑백 영화의 직관적인 색감과 아무도 없는 건물에서 혼자 듣는 바이올린 효과음은 귀를 찢어놓는 듯했다. 됐다, 이제 그냥 자야겠다 싶은 찰나. 아뿔싸 난로에 기름이 떨어졌다. 켤 수 있는 불은 다 켜고, 오후에 행정실에서 받아온 기름을 흐르지 않게 조심히 난로에 채워 넣었다.


‘이제 다시 따뜻해지겠지. 신난다.’ 그때 떠오르던 생각.

“누나, 낮에는 중앙난방이라 원래 따뜻한 데, 밤 되면 이 기름 난로 밖에 쓸 게 없거든요. 떨어지면 행정실에서 받아오면 되고, 밤에 자기 전에 꼭! 꼭! 창문 열어놓고 자세요. 안 그럼 가스 안 나가서 숨 못 쉬어요.”

“오 저도 몇 번 죽을 뻔했잖아요.”

동아리 동생들과 진담 반, 농담 반으로 했던 얘기가 떠오른다.


‘그래도 공기가 따뜻할 테니, 창문을 열어놔도 안락하게 잘 수 있겠지.’는 나의 대단한 착각이었다. 기름 난로는 바로 옆에 있지 않으면 그다지 따뜻하지 않았고, 바로 옆에 두자니 너무 뜨겁고 답답해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가스 배출을 위해 열어둔 창문은 쉴 새 없이 영하의 찬 바람을 불어넣어 이불이 덮여 있지 않은 얼굴은 찬바람을 고스란히 느끼고 있었다.

‘아… 그래도 여긴 공짜고, 여긴 혼자니까. 얼마나 편하냐. 감사하게 생각하자. 어휴. 추워. 어휴 숨 못 쉬겠어. 어휴…’


“손님, 4번 출구가 어디 방향이에요?”

처량했던 과거에 짠한 마음이 들던 찰나, 고맙게도 택시기사님께서 ‘레드썬’을 외쳐주셨다. 그때 생각하면 어떻게 이렇게 사는 지, 돈 없는 시절로 절대 돌아가지 말아야지 다짐한다. 서울 유흥가 중 상대적으로 조금 더 비싼 이태원에서 열심히 놀고, 서울에서 가장 붐비는 강남에 살며, 피곤할 땐 택시로 이동하고 있다니. 우쭐한 마음이 들었다.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편의점이 보였고 입안이 실룩대기 시작한다. 취했을 땐 아이스크림이 최고지. 빨개진 얼굴이 민망해 후다닥 맛있어 보이는 아이스크림을 1개만 골라 나왔다. 평소 같으면 2+1이나 세일상품을 사는데, 지금은 기분도 좋고 아이스크림 맛도 너무 좋다. 아 근데 벌써 물리네, 그래 이 정도면 됐지. 딱 세입만 먹고 아이스크림을 내동댕이쳤다.


“와~ 그래 이게 삶이지. 편할 때 택시 타고, 먹고 싶은 거 사고, 아낄 것 없이 가차 없이 버리는 거! 크~ 언제 이렇게 풍요로워 졌다니?”

대학생 때의 나와 지금의 내가 판이하게 느껴졌다. 돈이 없어 밥 대신 칼로리 바를 먹던 시절이 있었는데. 지하철비가 없던 때가 있었는데. 지금은 많지는 않지만 언제나 통장에 돈이 들어있다. 가난한 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진심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5층짜리 건물 4층에 들어선 내 방을 향해 걸어간다.

내 1평 남짓한 방.

고시원으로.



내 뒤로 문이 닫히고 창문 없는 이곳에 나는 다시 갇힌다.

내일 일찍 일어나야지, 내일 빨리 나가야지.



작가의 이전글 우연을 가장한 운명 [Take That]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