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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소유 Apr 02. 2024

나의 장례식 연설문

눈의 초점이 흐려진다. 팔도 다리도 움직일 수가 없다. 심장은 아직 뛰고 있지만 심박수가 서서히 느려지고 있다. 마치 내시경 이전에 프로포폴을 맞는 그 순간 같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짧은 순간 내가 살아온 날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진부하지만 이 표현을 뛰어넘는 표현은 찾기 힘든 것 같다.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에게 바로 와닿을 수 있는 표현이다. 이렇게 나는 죽어가고 있다.


학창 시절, 지극히 내성적인 아이였다. 내성적인 정도가 지나쳐서 모든 담임 선생님의 관심 학생이었다. 그게 얼마나 귀찮았을지 모르는 난 그저 그 담임들의 관심을 받는 게 좋았다. 학교에서 배운 모든 것은 오로지 머릿속에 기억해둔 채 집에 와서 어머니 앞에서 설명하고 보여드렸다. 그 모습을 보며 얼마나 기특해 하셨을지 지금 아들을 키우는 입장에서 그 모습이 그려진다. 내 피를 물려받은 아들 또한 내성적인 성격으로 보인다. 그래도 유치원에서 활동하는 모습을 보면 적어도 나보다는 낫겠구나 생각이 든다. 오롯이 내 피를 물려받은 게 아니고 아내의 피가 섞여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내 자식이지만 육아에는 한계가 있고 언젠간 스스로 일어나서 모진 학창 시절과 정글 같은 사회를 겪어내야 한다. 그저 단 한 가지의 바램은 나처럼 내성적으로 살아오면서 겪은 힘든 경험을 되풀이하지 않았으면 싶다.


사회는 생각보다 거칠었다. 아르바이트를 하던 시절에 보증 사기를 당할 뻔했고 사회에서 처음 만난 선배에게는 호되게 당했다. 모든 게 내가 너무 순해서 그랬으리라 생각된다. 거칠고 험한 사회생활에 신물이 나서 나약한 인간인 나는 죽음에 대한 고민도 했다. 난 견디면 되는 줄 알았다. 일타강사라고 불리는 괴물들이 말한다. 견디면서 과업을 수행하면 이루게 된다고. 본인도 그렇게 해냈다고 한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견뎌도 안되는 사람도 있다. 오히려 역효과가 나는 사람도 있다. 요령을 부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 삶은 너무 요령 없는 삶이었다. 그래도 고맙게 살면서 좋은 지인들도 많이 만났다.


아내에게는 항상 미안하다. 내가 나약하고 요령 없는 사람인 것도 모르고, 그저 나의 순간적인 말과 단편적인 행동에 속아서 나와 결혼을 했다. 결혼을 하자마자 심리적 탈진 상태인 나의 실체를 보고는 얼마나 마음 아파했을지 그 심정을 모르겠다. 육아에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많은 부분을 혼자 감내하면서 몸이 많이 상했다. 아마도 지금 내가 눈을 감는 이 순간에도 내게 아쉬움과 섭섭함이 많을 것이다.


사실 나는 지금 내가 살면서 나약하는 것을 선언하고 나서도 계속 두려웠다. 나라는 존재가 언제든 무너질 것을 알기에 더욱 그렇다. 나는 아내와 아들을 보면서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 뭐라도 했다. 그냥 있는 것이 오히려 더 힘들다. 그저 살기 위해서 뭐든 하려고 했다. 웹소설을 쓰고, 책을 쓰고 출간을 하기 위한 준비를 했다. 마무리를 못한 아쉬움은 있지만 그래도 살기 위해서 하루하루 뭐라도 한 것에 대해서 만족한다.


부모님께 죄송하다. 난 부족한 아들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선천적으로 의지박약했다. 내게 뭐라도 시켜서 성향을 바꿔주고자 하셨지만 그것에 잘 따라가지 못했다.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조차 귀찮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잘 할 줄 몰랐다고 말하고 싶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는 바보였다. 그런 내가 스스로 먹고 살 방법을 찾는다고 알량한 자존심으로 고집을 부리며 살았다. 결과는 만족스럽지 못하다. 그저 뻔한 거대 기업의 노예로 살게 되었다. 좋은 대학교 나와서 좋은 회사에 취직했다며 누구는 자랑스럽게 얘기할 수 있다. 하지만 난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저 먹고살기 편한 방법을 운좋게 찾은 것뿐이다.


그래도 난 죽는 이 순간 행복하다. 부족한 나를 바라봐 주는 아내가 있고 아들이 있다. 그리고 양가집 부모님도 있고 형제와 조카도 있다. 그리고 죽기 전에 진정으로 하고싶은 것을 찾았고 해봤다. 그것으로 되었다고 생각한다. 비록 내가 지금 죽고 있지만, 사실 어제 죽었어도 또는 더 일찍 죽었어도 큰 아쉬움은 없다. 애초에 삶에 큰 욕심도 없고 미련도 버린 지 오래되었다. 슬퍼할 사람들에게는 미안하지만 그저 내가 없이 지낼 아내와 아들이 눈에 밟힐 뿐이다. 그래도 아내는 보통의 여성이 아니고 아들 또한 나를 닮아 잘 클 것 같다. 그녀와 그가 내가 세상에 남기는 큰 유산이다.


그리스인 조르바처럼 두 발로 서서 창밖을 보며 최후를 맞이하고 싶은데 아무것도 움직이지 못하겠다. 역시 소설이다. 난 이렇게 정말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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