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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공여사 Jun 18. 2023

조, 조직검사를 하라고요?

피부과 5군데 순례기

"무, 무슨 조직검사요?"


피부과 의사가 조직검사 하라는 말에 내 목소리 끝이 떨린다. 꽁꽁 묶여있던 몹쓸 단어들이 턱 풀려나와 머릿속을 마구 싸돌아다닌다.


조직검사라면... 혹시 피부암?


난 어느새 주사병 줄레줄레 매달고 항암 치료 중이다. 


마음근력 키운다 매일 명상하고 불교철학책 뒤적이면 뭐 하나? 이렇게 창호지보다 더 얇은 마음이, 의사 말 한마디에 툭 찢어지고 마는데...


배에 사마귀가 창궐했다. 


10년 전인가, 기억도 안나는 언제부턴가 배에 딱 점이 3개 있었다. 처음엔 점인 줄 알았다. 근데 1년도 안돼 내 배는 점박이가 됐다. 


남편이 내 배를 심각한 표정으로 들여다보더니 한숨을 푹 내쉬고 말했다.


"내가 죽일 놈이다!"

"?" 

"마누라 배가 '사막화'(사마귀화) 된 줄도 모르고, 지구 환경이나 걱정하고 있었다니..."

"!"


마누라 배의 사마귀를 보고 지구 사막화를 생각해 내다니... 이게 창의적인 남편과 사는 맛 같기도 하고. 헷갈린다.

사막화라니...

이미 유명하다는 다른 병원 피부과 전문의에게 '사마귀' 진단도 받았다. 친절한 의사와 20분 질의문답 시간도 충분히 가졌고. 만만찮은 레이저 비용 알아보려고 온 병원에서 조직검사라니... 이게 무슨 날벼락?


나는 침을 꼴깍 삼키고 의사에게 물었다.


"아니, 이거 사마귀 아니에요?"

"반반이요. 사마귀인지 검버섯인지."


잘해야 30대 후반의 젊은 여자 피부과 의사가 말을 툭 내뱉는다. 말투 하나로 사람 기분 순식간에 잡치게 만드는 희한한 재주를 가졌다.


"검, 검버섯이요?"

"일주일 후 조직검사 하고 결과 보고 얘기하죠."


내 나이 아직 50대인데 검버섯이라니? 생각해보지도 못한 단어를 받아들이려 나의 뇌가 애를 쓴다. 난 겨우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어느 쪽이든 레이저 치료는 똑같지 않나요?"

"검버섯이면 위나 장에 문제 있을 수 있어요."

"저, 작년에 위 내시경도 하고 내장 초음파, 대장검사도 다 했는데요?"


의사가 날 빤히 쳐다보더니 귀찮다는 듯 말했다.


"그거랑 달라요."

"....?"

"검사 먼저 하시고."


왕싸가지 바가지. 1시간 기다리고 3분 진료인데, 의사의 시선은 이미 날 떠난 지 오래다. 난 뭘 더 물어봐야 할지 몰라 쭈뼛거리다 문을 닫고 나왔다. 


이런. 씨... '사막화'된 배 때문에 속상한데, 그걸 이렇게 무심하게 방치해 둔 나에게도 화가 나 죽겠는데, 의사의 말투가 날 또 뒤집어놓는다. 


진료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남편이, 얼굴 하얘져 진료실을 나온 나에게 물었다.


"뭐래?"

"검버섯일지도 모른다고 조직검사 하래."

"무슨... 걱정 마! 내가 현미경으로 들여다보고, 외국 논문 쏵 뒤져서 뭔지 확실히 알려줄게."


남편이 나름 대책을 제시한다. 심난해져 진료비를 내러 갔더니 간호사가 그런다. 


"다음 주 예약되셨고, 진료비는 5,100원, 조직검사는 69,000원입니다. 결제 같이 하시겠어요?"

"왜 아직 하지도 않은 검사 비용을 먼저 내요?"

"미리 내면 편하시잖아요."

".... 누가요? 제가요?"

"...."


난 간호사의 낯짝을 빤히 쳐다본다. 황당한 의사에 황당한 간호사다. 

나도 병원 들어가기 전엔 이런 얼굴이 아니었다.

일단 예약하고 차에 올라타자마자 남편에게 말했다.


"Y 피부과 가보자. 주말 내내 사마귀인지 검버섯인지 들여다보고, 일주일 내내 찝찝하게 있다 검사하고 또 일주일 피 말리며 결과 기다리고 싶지 않아."


제주에서 피부질환 잘 보는 걸로 유명한 Y피부과. 남편이 날 내려주고, 난 계단을 뛰어올라간다. 다행히 대기 손님이 없다. 바로 진료실에 들어가 배를 깠다. 반백 60대 의사가 내 배를 쓱 보더니 말한다. 


"사마귀네."

"혹시.. 검버섯은 아니에요?"

두근두근.


"검버섯은 안 번지고, 이렇게 안 작아요."

"확실하죠?"

콩당콩당.


"확실해. 우린 레이저는 안 하니까 다른 병원 가서 제거하시고."

"네. 감사합니다."

후유.


진료비도 안 받는다 해서 그냥 병원을 나오는데, 그제야 숨이 쉬어진다.


분한 마음에 난  조수석에 앉아 집에 가는 내내 이를 갈며 두시렁댔다.


"모르면 모른다 해야지. 무슨 조직검사를 하래? 내 그럴 줄 알았어. 병원이 너무 삐까번쩍하더라, 자기도 봤지? 상담실이 몇개인지도 몰라, 호텔 프런트처럼 줄줄이 접수원들 앉아있고."

"..."

"완전 장삿속이 분명해. 병원 지을 때 분명 대출 엄청 받고 그거 뽕 뽑느라 병원비도 선납하라 하는 거야."


콧김을 쌕쌕 뿜으며 흥분한 나에게 현명한 남편이 한마디 한다. 


"다 잘됐으니, 지나간 것 너무 곱씹지는 마."


'병원 시설이 호화롭다면 당연히 의사는 병원을 꾸미는 데 돈을 처발랐다는 뜻이고, 그 돈을 메꾸기 위해 환자의 건강과 재정 상태보다는 자기 호주머니 사정을 진료에 더 반영할 것이다.' <세이노의 가르침- 좋은 의사를 만나는 법>


지금은 다 지졌다. 다행히 친절하고 합리적인 가격의 다른 병원을 찾았고. 매일 아침저녁 배를 까고 소독하고 딱지 떨어지길 기다린다.


그러다, 딱 내 레이더망에 걸린 까뭉이. 

"까뭉아, 너 이리 와봐!"


겁보쫄보 눈치 백단 까뭉이는 벌렁 배부터 뒤집어 까고, 또 엄마가 자기에게 뭔 짓을 하려나 의심 가득한 눈빛으로 날 쳐다보며 다리를 떤다. 


"까뭉아, 너 배... 여기 이거 까만 거, 사마귀 아니야?"

"...?"

엄마는... 나한테 배가 어딨다고 그래? 

난 까뭉이 배를 가까이 들여다보고 까만 점 같은 걸 손가락으로 주르륵 비벼본다.


뭔가 밀린다. 


... 때다. 


"야. 넌 왜 이리 배에 때가 많냐?"


1년에 분기별 행사처럼 목욕시켜 놓고, 되려 보호자가 때 타령을 한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더니... 휴우, 몇 주 동안 피부과 5곳 순례하고, 허구한 날 배 까고 들여다봤더니... 머리가 어떻게 됐나 보다. 


버섯인지 마귀인지 그딴 건 좀 다 잊어버리고 얼른 일상으로 복귀하자!  난 옆에 세워둔 밀걸레 자루를 들고 마루의 먼지를 힘차게 밀어낸다. 남편이 옆을 지나가다 심각하게 나에게 주의를 준다.


"배 찢어진다. 그만해라!"


그래도 제법 고상한 대화도 주고받는 부부 사이인데... 요즘 나누는 대화가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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