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역, 수많은 사람들이 스쳐 지나간다. 부지런한 걸음들과 여유 넘치는 걸음들 사이에서 무의식적으로 두 발이 쉼을 갖는다. 같은 자리에 멈춰 선 상대방과 약속이나 한 듯 밝은 얼굴로 마주 선다.
아는 얼굴이다. 분명 알고 있다. 예전에 마주 앉아 밥도 같이 먹었을 것이고, 술 한 잔도 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름은 물론, 세 곳의 회사 중 어디에서 만났던 사람인지 모른다. 아니면 회사가 아닌 다른 외부에서 알게 된 사람일 수도 있다.
진심 반갑고 웃고는 있지만당황한네이티브 스피커는 말이 안 나온다. '어' 소리만을 반복할 뿐이다. '잘 지내죠?'라는 상대방과의 간단한 인사말로 시간을 끌며 온갖 기억들을 끄집어내 뒤적거려 보지만 도통 모르겠다. 존대를 했었는지, 반말을 했었는지 조차. 기억나는 척 대화하는 이 상황이 얼른 지나가길 바랄 뿐이었지만, 그러기엔 반가움에 함께 젖어들고 있었다.
I 성향의 나는 관계에서 소극적이다. 어렸을 때는 왈가닥이었고 표현에도 적극적이었다. 남녀 친구들에 둘러싸여 아지트(우리 집)에서 놀고 숙제하고는 했다. 초등학교 때인가. 아무도 손 들지 않은 고요한 교실에서 틀리든 말든 나는 수없이 내 의견을 말하려 어깨를 높이 쳐들고 손을 천장에 닿을 듯 뻗어가며 몇 번이고 들었다. 그 고요함이 불편했다. 아이들도 선생님도 불편할 거라 생각했다. 마치 히어로처럼 그 상황에서 모두를 구하고 싶었다. 그러나 선생님은 솟아 오른 단 하나의 영웅의 팔은 무시했고, 다른 용감한 손들을 오매불망 기다리셨다. 그만 포기하라는 무언의 눈빛이 하루하루 쌓이며 어린 마음에 얼마나 실망을 했을까. 그 뒤로는 조용한 아이가 되었다.
첫 회사에서 일본어 통역사 J가 입사했다. 회사에 부장급 일본인이 총 네 명이 계셨는데 그분들을 위한 네 명의 통역사가 있었다. J는 세 살 위였고, 작았고, 목소리도 조용했다. 나도 모르게 용기를 내어 먼저 다가갔다. 임원에게 소개를 시작으로 회의실, 식당, 맛집, 기숙사 등등 묻지 않았음에도,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음에도 빠른 적응에 도움을 주려했다. 퇴사 후,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유일하게 연락하고 가끔 연락해도 편히 대화할 수 있는 J이다. 당시에 나는 언니, 오빠 소리도 입 밖으로 뱉지 못했고, 직급 없는 일반 사원에게 누구 씨라고 어색함에 아예 부르지도 않았던 경우도 있었다. 사회생활을 하는 동안 매 순간 상대방을 대하며 최선을 다했다. 손가락, 발가락을 잔뜩 구부리면서 말이다. 억지로E 흉내를 낸 것이다. - 나만 아는 e - 친한 사람은 많아졌고, 모임도, 저녁 약속도 다음날 점심 해장까지 회사 생활은 일보다 인간관계로 돌아가고 있었다. - 물론, 학교 생활이나 회사 업무에도최선을 다했고, 고과도 잘 받았다. 임원분들부터 어른들이 아직도 연락을 주시는 것을 보면 잘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
상은 나이와 상관없이 발을 동동 뜨게 만든다.
몇 년 후, J 언니가 말한다.
"나, 처음에 너 이상한 애인줄 알았어. 너무 다가와서." 우리의 처음 만남을 회상하는 J 언니다.
그 말을 듣자 얼굴이 달아오르고 피부가 뻣뻣해짐을 느꼈다. 나의 부족한 모습을 극복하고자, 상대방을 편하게 해 주고자 큰맘 먹고 다가갔던 그때의 나. 순수했던 억지 노력이 오히려 나를 오해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피드백을 해주는 사람도 없었지만, 사회생활이 아닌 보통의 나였다면 타인에게 먼저 다가가는 일은 생각조차 하지 않을 일이다.
나이가 들어가며 관계에 대해 더 느긋해짐을 느낀다. 내가 오해를 받아도 굳이 바로 세우려 노력하지 않는다. 그 부분까지 쏟을 에너지는 없다.
얼마 전 오팔이 친구 엄마들과 새로 오픈한 키즈카페에서 첫 만남을 가졌다. - 초대받았다. -
오복이의 친구 엄마들과는 달리 나이대가 비슷했고, 영유, 한글 깨치기 학원, 학습지 등 주로 공부 관련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6살 엄마들의 걱정과 고민이 비슷했다. 오고 가는 대화 속에는 한글 깨치기 속성반 등 처음 접하는 학원들도 있었다. 엄마표를 하는 나에게는 마치 MZ 엄마들과 함께 있는 듯 새로운 정보와 창조경제에 대한 놀람의 연속이었다. 그 가운데서 홀로 외로이 있는 섬처럼 가끔 던져지는 질문에 면접을 보듯 성심성의 껏 답하는 것이 다였다. - 내 동생과 이야기를 나눴다면 자신 있게 아는 것을 총동원하여 팁이랍시고 말해줬을 텐데. - 하지만 그 자리에 말없이 경청하고 있는 곧 40대에 들어서는 나는, 그 안에서 조용히 나 자신의 달라짐을 느끼고 있었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똑똑해지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조심스러워지고 있는 것뿐이라는 말을. - 누군가의 회사 프로필 자기소개란도 기억한다. '알아야 모른 척도 할 수 있다'- 주어진 세 시간 동안 나름의 최선을 다했다. 오팔이의 인간관계에 보탬이 되고 싶었으니까.
어색한 공기를 없애고자 어줍은 행동으로 내면의 낯가림에 대항하여 철벽 치며 막아보려 했던 과거의 나.그리고 지금의 나까지. 미완성 어른인 내가 스스로를 칭찬하며 다독여 본다.
나의 약점을 앎에도 나를 사랑하자. 노력하고 있는 나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오직 나 자신이니까.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인, 타인의 시선이나 평판에 상처받거나 자책할 필요는 전혀 없다.
그저 있는 그대로의 나로, 좋은 사람들을 찾기보다 좋은 내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주어진 하루를 감사히 잘 사는 것, 아이들을 보고 웃으며 글 쓰는 것이 지금 해낼 수 있는 가장 멋진 일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