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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와 사랑(4) : 하나님의 여성성

바보 하나님


가정 내에서의 여성의 역할


남성에게 사회적 가면, 즉 페르소나는 매우 중요한 요소이며, 이를 유지하기 위해 아내를 비롯한 가족 전체가 희생과 감수를 감내하는 경우가 많다. 남성은 바깥세상에서 권위와 명예를 확립하며, 이를 통해 사회적 지위를 공고히 하고 경제적 보상을 얻고자 노력한다. 한 가정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가장의 이러한 헌신은 필수적이며, 이에 발맞춰 아내는 가정을 돌보며 남편이 집안일에 신경 쓰지 않고 외부에서 자신의 역할에 집중할 수 있도록 뒷받침한다. 이를 흔히 ‘내조’라고 부른다.

남편이 사회에서 자신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동안, 아내는 그가 가정의 사소한 문제로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세심하게 집안을 돌본다. 가정의 질서를 유지하고, 생활의 안정을 도모하며, 크고 작은 집안일을 도맡아 처리하는 것은 아내의 몫이 된다. 따라서 그녀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온갖 허드렛일과 뒤치다꺼리를 감당하며, 가족이 원활하게 기능할 수 있도록 헌신하는 것이다.

그 결과, 아내는 집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상황을 면밀히 파악하고 있다. 단순히 공간을 관리하는 것을 넘어, 어머니로서 자녀들의 정서와 감정 상태를 세심하게 살피고, 학업 성취와 성적은 물론 친구 관계까지 신경 쓰는 것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역할이 된다. 뿐만 아니라, 가정 내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사건들의 인과관계를 혼자서 꿰뚫어 보고 있으며, 집 안의 공간적 배치뿐만 아니라 심리적 흐름까지도 조율한다. 안방과 거실, 거실과 주방, 아들의 방과 딸의 방 사이에서 형성되는 미묘한 감정적 간극조차도 그녀의 시야 안에서 조정되고 균형을 맞춰 나간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가정주부로 살아간다는 것은 단순한 일상의 반복이 아니라, 마치 한 국가를 운영하는 것처럼 고도의 조직력과 관리 능력이 요구되는 역할이다. 주부의 역할은 노동의 총체적 국면을 감당하며, 산업화 사회를 뒷받침하는 핵심 축이 된다. 따라서 이를 단순한 가사 노동으로 축소해서 보기보다, 복합적인 전문성과 경험이 요구되는 중요한 경력직으로 인식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바보가 되는 남자와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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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홀한 헌신: 사랑에 빠진 남자의 심리학적 초상

사랑에 깊이 빠진 남자는 마치 운명에 이끌린 듯, '저 여자와 결혼해야겠다'는 강렬한 확신에 사로잡힌다. 그의 모든 행동은 오직 그녀를 향하고, 그녀를 위한 헌신은 그 자체로 황홀한 기쁨이 된다. 이 시기, 남자는 여자를 향한 지극한 사랑 속에서 자기 안의 여성성을 발견하는 특별한 경험을 한다. 마치 자신의 또 다른 반쪽을 찾아낸 듯한 느낌, 그는 이제 '사랑하는 자'의 자리에 서서 그녀만을 바라보는 '사랑의 바보'가 된다. 사랑에 빠진 남자는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다. 외모는 그대로일지라도, 그의 내면은 격렬한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부모가 알던 아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군 복무 중인 아들에게서 편지가 도착했다. 그런데 그만, 애인에게 보내야 할 편지와 부모님께 보내야 할 편지가 서로 뒤바뀌어 잘못된 봉투에 담겨 발송되고 말았다. 아들의 편지를 받은 어머니는 기대와 설렘 속에서 봉투를 열었지만, 눈앞에 펼쳐진 내용은 평소 알던 아들의 모습과는 너무 달라 어머니로 하여금 충격에 빠지게 한다. 그 어머니는 "아들 편지를 읽어가면서 얼마나 아니꼽고 시샘이 나는지, 내가 생전 아들에게서 받아 보지 못한 사랑을 여자친구에게 주고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어요."라고 말했다. 그리고 어머니는 그런 아들을 '내 앞에서는 그렇게 똑똑한 척하던 아들이 여자 친구 앞에서 그렇게 바보 같은 짓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용서할 수 없다'며 괘씸해했다. 남자는 이렇게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줄 수 있는 새로운 존재가 탄생한다. 그는 기꺼이 '사랑의 바보'가 되어 그녀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심지어 그녀의 '노예'가 되는 것조차 감수한다. 이처럼 사랑은 남자를 변화시키는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다. 그는 사랑을 통해 자기 안의 여성성을 발견하고, 헌신적인 사랑을 통해 새로운 자아를 발견한다.


바보가 되는 여자 : '사랑받는 자'

여자는 결혼 전 남자로부터 '사랑받는 자'의 위치에 서 있을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면 남자의 청혼을 받아들이게 된다. 여자는 남편이 아무리 마음이 떠나 있어 내게서 멀어졌다 해도, 연애할 때, '내가 사랑받았다'는 사실을 늘 기억하면서 평생을 기다리는 바보가 된다. 그런 남편을 위해 일평생 헌신하고, 집안의 온갖 일들을 다 감당해 낸다.

일반적인 사회적 인식은 여성이 주부로서 수행하는 역할을 하찮고 보잘것없는 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하찮은’ 일, 또는 '유치한 일'이야말로 한 가정을 유지하고 사회의 안정감을 지탱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라는 점을 깊이 인식할 필요가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인식 부족은 가정을 이루고 함께 살아가는 남편에게서도 자주 발견된다. 많은 남편들은 아내의 가사노동을 당연하게 여기며, 그 가치와 중요성을 제대로 깨닫지 못한다. 결혼 생활이 깊어갈수록 아내는 갈수록 바보가 되어가는 것 같다.

그러나 흥미로운 점은, 시간이 흐르고 중년 후반에 접어들면서 비로소 남편들이 아내의 역할이 얼마나 소중했는지를 서서히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남편 스스로의 자각의 결과가 아니라, 여자가 더 이상 바보로 살 수 없다는 무의식적 인식을 가지게 되면서 일어나는 남편의 자각이다. 중년 후반, 특히 갱년기에 접어들면서 여자는 자신이 이런 상태에 머무는 것은 부부관계가 갈수록 원수의 관계가 되어갈 뿐이라는 자각을 하게 된다.


아내의 반격

그렇다면 왜 하필 중년 후반일까? 이는 오랜 시간 가정을 위해 묵묵히 희생하며, 마치 ‘귀머거리 3년, 벙어리 3년, 시각장애 3년’을 실천하듯 살아온 여성이, 갱년기에 접어들며 더 이상 침묵을 유지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중년 후반이 되어갈수록 그동안 억눌러 왔던 감정과 희생의 시간들이 순식간에 폭발하는 일이 발생하며, 아내는 지금, 바로 이 순간(Here-and-Now)의 감정을 여과 없이 쏟아내기 시작한다. 그녀의 격정적인 토로는 단순히 최근의 불만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신혼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놀라운 기억력과 함께 이어진다. 그동안 참아왔던 순간들을 세세한 정황과 일관된 서사 속에서 풀어놓으며, 남편에게는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과거 청산의 장’이 열린다.

이때 남편은 비로소 그동안 자신이 놓쳤던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실감하게 된다. 그렇지만 아내가 작동하기 시작한 '지금-여기 감정' 앞에서는 꼼짝없이 당하고 만다. 왜냐하면 아내는 오랜 세월 남편에게 당해 온 억울함을 몸이 기억하고 있는 반면, 남편은 머리로만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기억의 유효기간이 아내보다 훨씬 짧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아내가 몸으로 기억하는 것은 here-and-now의 형태로 마치 사건 당시처럼 생생하게 기억을 끄집어내지만, 남편은 머리에 의존한 기억이라 먼 과거를 여행하며 더듬어 찾아낼 수 있을 뿐이다. 아내가 생생하게 소환하는 사건들 앞에서 남편은 기억을 더듬어보지만, 이미 파편화된 조각들 속에서 생각의 길을 잃고 만다. 결국 그는 일방적으로 몰리게 되고, 아내가 쏟아내는 말의 홍수 앞에서 방어할 수단조차 찾지 못한다.

이러한 갈등은 남편이 은퇴 후 본격적으로 가사에 참여하면서 남편의 실력은 명약관화해진다. 아내가 집안일 중 이런저런 일을 맡기는 순간, 그는 지시에 따라 개별적인 일들을 수행할 수는 있다. 하지만 남편은 그 일이 어떤 맥락 속에서 이루어지는지, 가정이라는 유기적 공간에서 각각의 요소들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전혀 파악하지 못한다. 남자는 아내 앞에서 이렇게 멍청한 바보가 된다.

반면, 오랜 세월 동안 가정을 운영해 온 아내는 수많은 사소한 일들과 잡다한 업무들을 조율하며, 자연스럽게 멀티태스킹 능력을 익혀왔다. 그녀는 집 안의 작은 움직임, 가구의 위치 변화, 공기의 흐름까지도 직관적으로 읽어내며, 가족 구성원들의 필요를 예측하고 대비한다.

그러나 남편은 집안에서 이러한 세밀한 관찰 없이 살아왔기 때문에, 밖에서 일하는 머리는 좋을지언정 가정이라는 공간 속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상황을 총체적으로 파악하는 능력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 결국, 가정이란 단순히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정서적·심리적 역학이 작용하는 복합적인 장(場)이며, 이를 조율하는 아내의 역할이 결코 하찮거나 단순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남편들은 너무 늦게 깨닫게 되는 것이다.

오랜 세월 동안 반복된 일상을 묵묵히 감당하는 것은 단순한 노동을 넘어, 여성들이 자신의 정체성과 역할을 공고히 다져가는 과정과도 맞닿아 있다. 가정 내에서 크고 작은 허드렛일을 감당하는 것은 여성들의 인내와 노련함을 길러주는 중요한 경험이 되며, 이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빛을 발한다. 결국, 나이가 들수록 남편이 아내를 이겨낼 수 없는 이유는 단순한 신체적·지적 우열의 문제가 아니다.

남성은 40대 중반만 되어도 점차 가정 내에서 무력해지고, 이는 여성들 사이에서 남편을 희화화하는 공통된 이야기 소재가 된다. 흥미로운 점은, 어느 집에서나 남편들의 어설픈 행동 패턴이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다는 것이다. 덕분에 여성들의 모임에서는 남편들의 실수담이 끊이지 않으며, 이는 여자들의 웃음을 자아낸다. 이러한 시점에 이르면, 남편들도 더 이상 아내의 가사노동을 하찮게 여기기 어렵게 된다.

아내들은 이미 수십 년 동안 집 안의 수많은 잡다한 일, 사소하고 유치한 갈등, 보이지 않는 희생을 감내하며 단단한 내공을 쌓아왔다. 이런 아내를 상대로 우위를 점하려는 남편은, 애초부터 이길 수 없는 게임을 하는 셈이다.

오랜 세월 아내는 집안의 온갖 일을 감당해 내고 여러 상황에 대처해 내면서 유치하고 바보 같은 존재가 되어 왔지만, 갱년기 전후하여 남편에게 되돌려 주는 과정에서 이제 남편이 바보가 된다. 남편이 이렇게 아내 앞에서 바보가 되어가면서 자신 안에 있는 여성성을 발견하게 된다. 이 글 전체에서 '바보가 된다'는 것은 곧 '여성성'을 발휘하게 된다는 뜻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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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여성성, 바보가 되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사랑하심

하나님은 인간처럼 성적 존재가 아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실 때, 신적 성품을 인간의 형태에 적용하고자 인격이라는 것을 상정할 때 첫 개체 구별의 준거점이 바로 '남자와 여자로 만드는' 것이었다. 인간을 창조하실 때 신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존재 차원이 낮은 형태의 인간을 창조하면서 양성의 개념을 부여하였다. 이를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 1:27)


존재 차원이 낮은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부여한 것은, 하나님의 낮아짐이다. 성경 전체를 보면, 하나님은 신적 차원보다는 인간의 존재를 준거점으로 인격적 차원에서 이해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분명히 신이기 때문에, 신으로서만 존재하면 그만일 수 있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초월적인 신의 모습만 가져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자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과 모양으로 창조하신 인간과 관계하기 원하셨기 때문에 인간 세계에 내재하는 신으로 나타나신다.

하나님의 초월성의 속성이 거룩함이라면, 하나님의 내재성의 속성은 바로 '사랑'이다. 그래서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요일 4:16)


하나님의 여성성과 바보 됨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을 향한 낮아짐이며, 이는 하나님의 자기 비하로 나타난다. 위에서 언급한 창 1:27에서 사람을 만드시면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만드셨다는 것 자체가 자기 비하이다. 또한 성자 하나님이 높고 높은 보좌를 버리시고 낮고 낮은 이 땅 위에 오신 하나님의 성육신 또한 하나님의 자기 비하이다. 성자는 우리의 모양과 같아져서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 하고자 하셨다. 그것은 성자의 탄생, 태어나면서 눌 자리 없어 가축이 여물을 먹는 밥통(구유)에 담기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나님의 부끄러움을 몸소 겪어내신 것이다.

성자의 자기 비하는 족보에서도 나타난다.

예수의 족보에 유다과 다말 사이에 베레스를 낳을 때, 유다와 다말은 시아버지와 며느리 사이의 불륜이었고, 살몬과 라합 사이에 보아스를 낳을 때 라합은 여리고성의 창녀였으며,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유혹하기 위해 우리아를 죽이고 남의 아내를 빼앗아 솔로몬을 낳았다. (마태복음 1장)

성자 예수가 태어나는 족보에는 온갖 유치하고 치사하고 부끄러운 형태의 혈통이 참여하였음을 감추임 없이 그대로 드러냈다. 성자의 거룩한 족보는 부끄러움과 수치, 유치함을 감추지 않고 그대로 드러냈다. 온전하지 못한 혈통 때문에 성자의 탄생이 더러워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자의 거룩한 탄생으로 인해 그들의 수치스러움을 거룩하게 만들어 주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바로 이러한 부끄러움과 죄스러움을 거룩함으로 바꿔주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이러한 여러 상황, 유치함과 바보스러움과 수치스러움의 일들을 감당함으로써 여성성을 드러내는 일을 감당해 내신 것이다.

족보를 통해 보여주신 유치함과 수치스러움, 바보스러움은 예수의 십자가 사역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바보스러움과 유치 찬란함은 수많은 죄인들, 죄에 노예 된 자들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독생하신 아들을 바꿔 먹었다는 데에 있다. 죄의 노예 된 자를 구하기 위해 거룩한 성자 아들을 죽이는 유치함과 바보스러움을 드러내기에 아무런 부끄러움이 없는 하나님인 것이다.


성도 안에 들어오신 성령님의 자기 비하

헤겔의 [종교철학]이라는 책을 보면, 하나님의 자기 비하에 대한 언급이 있다. 헤겔에 의하면, 성자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동시에 구약의 아버지 하나님을 죽이며, 부활 후 승천하셔서 아들은 친히 아버지 하나님이 되신다. 성부 하나님은 스스로 자기를 낮추시고 성령의 위치로 내려오심으로 자기 비하를 하면서 성도 안에 들어오셔서 성도의 몸을 성전으로 삼으셨다. 물론 이러한 해석은 헤겔의 종교철학적 해석일 뿐, 신학적인 해석은 아니다. 그렇지만, 헤겔은 세분 하나님의 관계가 어느 한분이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섬기는 헌신과 자기 비하를 그 속성으로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세분 하나님의 자기 비하는 곧 하나님의 여성성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스스로 낮아지셔서 자신의 낮추시고, 성도 구원을 위해 성육신, 십자가에서 죽으심, 삼위 간의 위치 이동을 감행하시는 여성적 역할을 하시는 모습이다.

성도 안에 들어오신 성령 하나님 또한 여성성을 보여주신다. 성도의 심령 안에 들어오셔서 마음의 보좌에 앉아 계시지만, 여성적으로 부끄러워 숨어계시면서 자기를 주장하지 않으신다.

나는 하나님의 이러한 모습이 바로, 창세기 1장 27절 중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라는 말씀 중, '하나님의 모양'대로 살도록 사람을 지으심의 반증이라고 생각한다.


여성성은 우주적 원리이자 존재의 중심


초월적 차원에 계신 신이 우주와 인간 세상에 개입하실 때, 그 본질적 원리는 사랑이다. 그리고 그 사랑이 구체적인 행위로 드러날 때, 하나님은 여성성을 통해 역사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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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우주와 인간 사회가 남성적 원리, 즉 경쟁과 투쟁만을 중심으로 작동한다면, 창조 세계는 끝없는 비극과 절망, 슬픔과 아픔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그러한 세계에서는 생명의 신비와 기쁨은 사라지고, 오직 생존을 위한 고된 투쟁만이 반복될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재적 사랑을 지니시고, 여성적 실행력을 통해 자기 백성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하나님의 여성적 사랑은 온 우주를 운행하는 본질적 원리이며, 동시에 한 성도의 심령 안에 깊이 스며들어 그를 은혜로 이끄는 통로가 된다. 성도는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에 응답하는 방식으로 믿음의 책임을 다하며, 그 책임의 핵심은 복음 안에서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이다. 성령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곧 성화의 과정이며, 이는 인간관계의 성숙과 심령의 성장, 내면의 깊이를 형성하는 데 밀접하게 연결된다.


특히 하나님의 사랑은 가장 대표적으로 부부 관계를 통해 드러난다. 부부 관계가 성숙해지기 위해서는 서로의 여성성을 발견하고 이를 조화롭게 발달시키는 과정이 필수적이다. 성화의 여정에서 여성성이 중요한 이유는, 성도의 궁극적 목적이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과의 깊은 연합을 이루는 길은 바로 그분의 사랑을 닮아가며, 여성적 사랑의 수용과 실천을 통해 완성되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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