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자꾸 하품하세요?
어떤 내담자가 상담 도중 내게 따진다.
"선생님, 오늘따라 왜 그렇게 하품을 많이 하세요?"
표시 안 나게 하품을 삼킨다고 삼키는데 그 내담자는 내가 하품할 때 입모양과 얼굴에 어떤 변형이 일어나는지 다 알고 있었다.
"좀 그렇죠? 굳이 이유를 물으신다면,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제가 피곤해서 그런 것일 수 있고, 둘째는 이 상담공간에 뭔가 흐름이 막힌 것이 상담자인 제게 신체화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하품일 수 있어요."
나는 세 번째 이유는 말하지 않았다. 유독 그녀와의 상담 중에 하품이 많아지는 이유를...
확실히 상담 중에 자주 하품을 하는 경우가 있다.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특정 내담자만 들어오면 하품이 시작된다. 처음엔 단순한 피로인 줄 알았다. 전날 잠을 설쳤나, 카페인을 덜 마셨나, 내 신체 리듬이 엉킨 건가. 하지만 이 반응은 그 내담자와 마주할 때만 일어난다. 그렇다고 해서 그 내담자가 올 때마다 늘 그런 것도 아니다. 그래서 그 내담자의 상담 시간 전에는 미리 잠을 조금 자 두기도 한다.
내가 피곤해서 하품을 하는 것인지, 내담자의 무의식이 내게 투사하여 동일시를 일으키는 것인지 나도 뚜렷하게 구별할 수가 없다. 그렇지만 사람의 몸은 마음과 연결되어 있고, 다른 사람의 몸과 마음과도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특히 상담자와 내담자 관계라면 더욱 그렇다.
어떤 내담자는 상담실에 들어오자마자 의자에 허리를 깊이 묻는다. 눈은 떠 있지만, 무언가 꺼진 사람처럼 느껴진다.
“제가 요즘 꼭 좀비 같아요”
라는 그녀의 말이 거짓말처럼 정확했다. 그녀는 살아 있다. 하지만 숨을 쉬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나는, 그녀 대신 숨을 쉬려 하듯 하품을 한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이것을 ‘역전이(countertransference)’라고 부른다. 즉 내담자의 무의식이 상담자의 몸을 빌려 자신을 표현하는 현상인 것이다. 말로 다 하지 못한 감정이, 숨겨진 고통이, 나의 신체를 통로 삼아 모습을 드러낸다.
하품은 단순한 산소 부족의 반응이 아닐 수 있다. 이것은 억눌린 감정이 해방되기 직전, 긴장이 풀리면서 나오는 일종의 ‘감정의 여백’이다. 내담자가 강박적으로 문을 확인하고, 가스레인지를 점검하고, 충전기를 수십 번 확인하며 살아온 나날들. 그 안에는 무언가 ‘터지지 않고 덮인’ 정서가 있는 것이다.
그 덮인 감정이 상담실 공기 속에 녹아들면서, 나의 자율신경계가 그것을 느끼고 반응한 것이다. 나는 그녀의 억압된 생명력을 대신 호흡하고 있는 중이다.
그녀는 열심히 말한다. 가스레인지, 문고리, 전기장판, 반복되는 확인의 고통. 그러나 나는 그 말들 속에서‘감정’이 느껴지지 않는다. 심각한 강박증에 매여 있는 남편을 대신하는 중에 어느덧 강박증의 어느 부분이 아내의 몫이 되어버렸다. 눈빛은 흐릿하고, 말은 공허하며, 이야기의 중심에는 ‘자기’가 없다. 그래도 말을 더듬거리는 것은 상담이 진행되면서 많이 좋아졌다. 더듬거리면서도 말을 끝까지 할 수 있다는 자신감, 말이 느려도 상담자가 자신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있다는 확신이 그렇게 말문을 트게 만든다.
이런 상담자리를 오랫동안 이어가면, 상담자도 모르게 피로를 느낀다. 공감이 막힌 상태에서 무언가를 계속 들어야 할 때, 몸은 리셋을 시도한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하품이 나온다. 물론 하품을 해도 입을 쩍 벌리면서 하는 것이 아니다. 내담자는 눈치채지 못하게 하품한다. 약 10년 전 정신분석 심리치료를 3년간 받아 왔기 때문에 상담자가 하품하면, 내담자 자신 때문에 하품하는구나 하는 자각이 있는 사람이라, 혹 죄책감을 느끼게 될까 하여 몰래 하품을 한다. 눈을 항상 아래로 깔고 있어 상담자와 눈을 잘 맞추지 못하기 때문에 눈치 못 채게 몰래 하품을 할 수가 있다.
그녀가 살아 있으나 숨 쉬지 않는 사람이라면,
나는 그녀 옆에서 계속 숨을 쉬어야 하는 사람이다.
그녀는 무의식 중에 나에게 말한다.
“나 대신 숨 좀 쉬어줘요.”
그때 나는 하품한다.
어느 날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이상하게, 당신이 오면 제가 자주 하품을 하게 돼요.”
그녀는 놀란 듯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제가 너무 답답해요. 안에서 숨이 막히는 것 같거든요.”
그 순간, 우리는 상담실의 공기를 함께 느낄 수 있었다.
무언가 뭉쳐 있는 공기.
무겁고, 차갑고, 딱딱하게 굳은 고통의 입자들.
그 공기를 나 혼자 마시고 있었다는 걸, 내담자도 알아차린 것이다.
그리고 조금씩, 나는 그녀에게 묻기 시작했다.
“좀비 같다는 건, 어떤 느낌이에요? 멍한 건가요, 아니면… 슬픈 건가요?”
그녀는 처음으로 조금 망설이더니 말했다.
“약간, 차갑고… 무거운 느낌요. 마음이 너무… 묻혀 있는 느낌.”
감정은 언어가 있어야 흘러나온다.
언어화되지 못한 감정은 몸에 맺혀 있고, 그 몸의 고통은 상담자를 통해 전이된다.
그녀가 나에게 숨을 쉬게 했고, 나는 그 하품을 언어로 바꾸어 그녀에게 돌려주었다.
상담이란, 말이 오가는 자리가 아니라 ‘숨이 오가는 자리’다. 말은 하다가도 멈출 수 있지만, 숨은 쉴 수 없는 것이다. 말로 설명되지 않는 고통은 몸의 징후로 나타난다. 때로는 하품, 때로는 두통, 때로는 심장의 두근거림. 그 징후는 무시되어선 안 된다.
내 하품은 그녀의 무표정한 얼굴에 흐르는 깊은 무기력과 공포를 대신해서 나온 것이었다.
그녀는 아직 숨 쉬지 못하지만, 나는 상담실에서 대신 숨 쉬는 중이다.
그리고 언젠가 그녀도 다시 ‘살아 있는 숨’을 쉴 수 있으리라.
하품은 그렇게, 한 사람의 생명을 향한 징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