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B 씨(여성)와의 상담을 마무리하면서, 일어서서 나가는 내담자에게 인사하기 위해 의자에서 일어나는 순간 묵직한 통증이 횡격막 위치의 허리 통증이 확 뭉치는 느낌을 받으면서 일어나던 자세를 멈추고 다시 의자에 눌러앉아야만 했다.
왜 갑자기 이런 일이 생길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내담자가 감당할 수 없는 심리적 짐을 내게 투사하고 떠나면서 내가 신체로 받아 버린 <투사적 동일시>라는 정신기제를 떠올릴 수 있었다.
이런 신체 반응은 단순한 피로나 스트레스가 아니라 내담자에 의해 발생한 신체화된 정서 반응, 특히 <투사적 동일시에 의한 체화(somatic countertransference)>로 해석할 수 있다.
그날 상담에서 그녀가 언급한 것 중, 어떤 감수성 있고, 부부관계에 능력을 드러내는 탁월한 여성이며, 자신이 이상화하는 여성에 관한 것이 있었다. 그 여성에 대해 나는 내담자의 그림자라고 해석해 주었다. 내게 투사적 동일시에 의한 체화가 나타났다면, 그녀가 이상화한 여성을 자신의 그림자로 수용하고자 하였으나, 감당할 수 없는 짐으로 만들어 상담자인 나에게 투사한 것을 내가 체화되는 형태의 투사적 동일시로 받아들인 결과로 볼 수밖에 없다.
정신분석 이론에서 ‘투사적 동일시’는 한 사람이 자신의 내면의 감정을 무의식적으로 타인에게 투사하고, 그 투사를 받은 상대가 그 감정을 마치 자신의 것처럼 체험하게 되는 심리적 현상을 말한다. 특히 상담 장면에서 이 메커니즘은 상담자가 내담자의 감정을 대신 느끼고, 그 감정을 자기 몸이나 감정 상태로 경험하게 만드는 식으로 자주 나타난다. 이때 상담자는 자신의 감정인지, 내담자의 정서를 받아들인 것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혼란을 겪게 된다.
내담자가 자신의 정서를 충분히 의식하거나 언어화하지 못할 경우, 감정은 타인을 향해 ‘행동화’되거나 ‘몸’을 경유해 전달된다. 그 정서는 때로는 무력감, 때로는 분노, 때로는 고립감의 형태로 상담자에게 전달된다. 상담자의 몸은 이 무의식적 메시지를 흡수하는 그릇이 된다.
정신분석적 상담을 하다 보면 말보다 더 정직한 메시지를 들려주는 것이 있다. 바로 ‘몸’이다. 언어로는 애써 웃음을 보이고, 논리로는 충분히 설명되는 일이라 하더라도, 상담자의 몸은 때때로 말보다 빠르게 반응하며 내담자의 정서를 흡수한다. 그것은 마치 감정의 기류가 대기를 타고 상담자의 신체로 스며드는 것처럼 미묘하지만 분명한 감각이다. 나는 이런 경험을 반복하며 ‘투사적 동일시(projective identification)’가 상담실에서 일어나는 방식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되었다.
허리(척추 중심)의 결림은 내가 그녀에 대한 지지구조가 과도한 하중을 받고 있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상담자로서 B 씨를 1년 넘게 상담해 왔지만, 내담자는 이런저런 변화를 경험하고 있다고는 하나, 상담자가 보기에 지금쯤이면 더 큰 변화가 있었어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 내담자에 대해서 만큼은 늘 짐으로 다가온 것이다.
그날 그녀는 평소보다 더 많은 말을 쏟아냈다. 어린 시절 기억, 현재 겪고 있는 가정 내 긴장, 자신이 맡고 있는 책임의 무게, 그리고 자기 안에서 반복되는 자책감들. 그녀는 울지도 않았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나는 마치 밀도 높은 정서의 바닷속에 서 있는 듯한 감각에 휩싸였다. 그녀의 말은 담담했지만, 그 안에는 어딘가 ‘자기를 잃은 채 살아가는 여성’의 오랜 고통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오늘 회기가 끝난 후, 나는 일어설 수 없을 만큼 허리가 결렸다. 정확히 말하면, ‘담에 걸린 것처럼’ 허리가 뻣뻣하고 통증이 심해져 몸을 제대로 가누기 어려웠다.
처음에는 단순한 피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곰곰이 떠올려보니, 그 통증은 내담자의 감정을 ‘신체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나의 무의식적 반응이었다. 그녀는 말로는 자신의 삶을 설명하고 있었지만, 그 말이 닿지 못하는 곳에서 더 깊고 강한 정서가 흘러나와 나의 몸에 닿은 것이었다. 나는 ‘그녀가 평생 지고 살아온 감정의 무게’를 마치 내 허리로 떠안은 듯한 감각에 휘청거렸다.
허리 통증은 단순한 근육의 문제로 보기에는 너무 상징적이었다. 허리는 인간의 중심축이자 ‘몸을 지탱하는 부위’다. 우리는 무거운 짐을 질 때 허리에 힘을 주고, 넘어진 몸을 일으킬 때 허리를 굽혔다가 편다. 나는 그날, 상담자로서 ‘그녀의 삶을 잠시 떠맡는 일’을 했던 것이 아닐까. 그녀가 평생 책임지고 살아왔던 삶의 무게를, 나는 잠시 허리로 감당해 본 것이다.
무엇보다 그녀는 상담 말미에 자신도 모르게 이런 말을 했었다.
“나는 늘 괜찮은 척했어요. 안 그러면, 다 무너질 것 같았거든요. 남편을 생각하면 저는 항상 무너져 있어요.”
그 말은 허리의 통증처럼 무거웠다. 그녀는 삶을 ‘버티기 위해’ 단단해졌지만, 그 단단함은 사랑받기 위해 선택한 ‘자기 포기’의 결과였다. 그녀는 늘 주변을 책임지고, 감정을 억제하며, 자신의 아픔을 뒤로 미뤘다. 그런 그녀의 정서적 부담이, 내가 미처 자각하지 못한 사이에 몸으로 옮겨온 것이다.
예컨대, 상담자가 느낀 무기력은 내담자의 오래된 우울감일 수 있고, 상담자의 답답함은 그녀가 반복적으로 겪어온 통제당함의 감정일 수 있다. 이것을 잘 해석하면, 상담 장면은 내담자가 ‘처음으로 자기감정을 안전하게 타인에게 건넨 경험’이 될 수 있다.
그날 이후 나는 B 씨의 감정을 더 섬세하게 읽어내고 공감할 마음의 준비를 해야 했다. 그녀가 내게 전해준 정서의 무게를 ‘해석 가능한 언어’로 바꾸기 위해, 나는 나의 신체와 감각을 하나의 중요한 해석 도구로 삼아야 할 것이다. 서로 말로 표현하지 못했던 것들을 천천히 끄집어내어 의미화하기 시작해야 할 것이고, 그녀는 점점 자신의 감정과 삶의 무게를 타인에게도 안전하게 나눌 수 있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몸’은 때때로 말보다 먼저 반응한다. 상담자의 몸은 내담자의 무의식이 도착하는 첫 번째 장소일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 몸의 언어를 무시하지 말고 경청해야 한다. 몸의 통증이 말해주는 이야기는, 종종 내담자의 말보다 더 깊고 진실한 심연을 비추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내담자가 이처럼 눈에 보이는 투사적 동일시 현상을 상담자에게 떠넘긴다는 것은, 상담자로서 이러한 고통을 감당해 냄으로써 내담자의 정서적 활동상태가 훨씬 발전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상호 인식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