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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빨간 지갑(엄연화)(3)-세대간 순환되는 분노

공격성과 '자기-대상'


사람은 태어나면서 엄청난 양의 리비도(삶의 에너지), 평생 살아가는 데 필요한 리비도를 다 가지고 태어난다고 볼 수 있다. 그 리비도는 사랑의 리비도와 공격성이 뒤섞여 있다. 이 두 가지는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연료이다. 동시에 이 두 가지는 삶의 두 가지 양상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결혼한 부부간에 사랑이 우세한가, 아니면 공격성이 우세한가를 보면 된다. 그리고 교도소 수감자는 이 두 가지 문제 중 하나, 또는 이 두 가지가 뒤섞인 문제로 감옥에 들어와 있다. 사랑과 공격성은 누구에게나 삶의 두 가지 이슈에 해당한다.

자녀는 부모 슬하에 있는 동안 부모에게 공격성을 마음껏 표현하고, 그 결과 사랑의 능력을 획득하는 과정을 겪어야 한다. 부모 입장에서는 자녀가 태어나면서 가지고 나온 공격성을 자녀가 성인이 될 때까지 다 해결해 줘야 마땅하다.

유아기에 아기는 엄마의 사정을 봐주지 않고, 마음껏 젖을 빨듯이, 엄마는 아기의 '자기밖에 모르는' 공격성을 허용해 줘야 한다. 자기 심리학자 하인즈 코헛은 이를 '자기-대상(self-object)'라고 불렀다. 유아기뿐 아니라, 아동기 청소년기를 거치면서 부모가 자녀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역할은 아이가 부모를 마음껏 휘두를 수 있고, 부모는 이에 맞서주는 능력을 키워나가는 것이다.

부모가 자녀의 '자기-대상' 역할을 해 주는 환경에서 자란 자녀는 성인이 되어 더 이상 분노할 일이 없어진다. 그러나 부모가 이 역할을 해 주지 않으면, 자녀는 결혼생활에서, 또는 직장 생활에서 갑의 자리를 확보하면 그동안 억압된 분노의 갑질을 하게 된다.


특히 소설 『빨간 지갑』 속 해인과 그녀의 어머니, 그리고 해인의 딸 사이에 벌어지는 감정의 흐름은, 우리가 흔히 겪는 가족 내 상처와 억압된 분노,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다시 자녀에게 전이되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본문에서는 ‘자기-대상(self-object)’ 개념을 중심으로, 자녀가 부모를 어떻게 휘두르며 자아를 형성하고, 부모는 어떻게 이를 감당해야 하는가에 대한 깊은 통찰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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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또 다른 가족에 대한 시기심


<빨간 지갑>에서 해인은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를 자기-대상으로 사용하지 못한 채 분노를 억압시켜 왔다. 그 분노는 참고 억누르는 가운데 무의식 중에 저장되어 있다. 그렇지만 딸이 해인을 대상으로 분노를 드러낼 때 해인은 억울할 수밖에 없다. 나는 사용해 보지 못한 공격성을 딸은 나를 대상으로 분노하고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이 분노는 미해결 된 트라우마와 정서적 부재로부터 기인하여 각 인물의 내면과 관계에 깊은 상흔을 남긴다.

해인은 어머니의 죽음 이후 '알 수 없는 후련함'을 느꼈지만, 이 감정은 시간이 지날수록 '이상하게 가슴을 짓누르는 죄책감'과 함께 그만큼의 분노'로 쌓여갔다. 해인은 어머니가 '자기-대상' 역할을 못 해 준 것 외에, 어머니의 '비밀'에 대한 분노를 가지고 있었다. 어머니의 빨간 지갑 속에서 어머니와 낯선 남자아이의 사진을 발견했을 때, '구토감과 분노'를 느꼈고, 그 지갑을 돌멩이로 짓이겨 버렸다. 이 사진 속 사람들이 '너무 잘 어울리는 가족 같았다'(67)는 묘사는 자신을 배제한 어머니의 '행복'에 대한 해인의 깊은 시기심과 분노를 암시한다. 해인은 이 사진 속 사람들이 여전히 행복할까 하는 생각에 다시 백화점으로 돌아가 빨간 지갑을 사기도 했다.

어머니의 또 다른 가족에 대한 시기심과 내재된 분노에 대한 보호 조치로, 해인은 어머니 죽음 이후 25년 동안 어머니를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고 '그 여자'라는 단어로 대체했다. 이러한 단절 시도는 오히려 어머니에 대한 분노와 두려움, 미해결 된 이별의 고통을 해인의 마음속 깊이 뿌리내리게 했다.


딸의 분노



어머니를 향한 비난의 욕구는 해인으로 하여금 어머니가 아편을 맞아가며 담배를 찾던 고통스러운 모습을 기억하게 했으며, 어머니의 죽음을 '용서할 수 없다'라고 말로 바뀐다. 또한 어린 시절, 어머니를 향해 '죽어버려 가버려, 이제 다시는 엄마를 부르지 않을 거야.'라며 목구멍으로 나오지 못한 말들이 해인의 가슴속에서 들끓었다.(67) 이로 인해 '견딜 수 없이 숨이 막히는' 고통을 경험했다. 이는 어머니의 정서적 부재와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서 해인이 느꼈던 극심한 좌절감과 분노를 보여준다.

해인이 어머니에게서 느꼈던 정서적 부재와 고통은 놀랍도록 딸에게 그대로 대물림되어, 딸이 해인을 향한 분노로 표출된다.


딸의 직접적인 비난

딸은 해인과 달랐다. 해인은 어머니에게 감히 한 마디도 말할 수 없었지만, 딸은 직접적으로 해인을 공격한다.


"엄마 때문이지, 뭘."


이는 해인이 자신의 어머니에게 느꼈던 정서적 결핍의 감정과 놀랍도록 일치한다.

딸은 해인에게


"엄마는 내가 정말 필요로 할 때 내 곁에 없었어요. 왜 그런지 엄마에게는 가까이 다가갈 수가 없었어요. 책을 읽거나 멍하게 앉아 있거나, 나를 쳐다보고 웃을 때도 어쩐지 엄마는 나를 보고 있지 않는 것 같은. 텅 비어 있는 느낌이 들었어요."


라고 말한다.


시뻘건 불길로 폭발하는 딸의 분노

딸의 마음속에는 "유난히 앙큼스럽게 마음을 열지 않던 딸의 마음속에 긴 시간 동안 쌓여 있던 생채기가 해인을 향해 시뻘건 불길을 뿜어대고"(83) 있다. 이는 억압되고 축적되어 온 딸의 깊은 분노와 고통이 마침내 폭발하는 순간을 상징한다

해인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딸이 '그리움의 분노'를 쌓게 만들었음을 깨닫는다. 이는 어머니에게서 사랑과 정서적 지지를 갈망했으나 얻지 못했던 해인 자신의 경험이 딸에게 반복되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통찰이다.


분노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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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의 내면에 자리했던 말해지지 못한 분노는, 그녀의 딸을 통해 외면할 수 없는 방식으로 되돌아왔다. 마치 유년 시절 엄마에게 전하지 못했던 울분이, 세월을 건너 딸의 입에서 반복되듯이. 이 장면은 단지 하나의 소설적 장면을 넘어, 많은 이들의 마음속에서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분노와 목마름, 그리고 대물림된 침묵을 상기시킨다.


공격성은 억제하거나 사라져야 할 감정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자기 존재를 드러내는 중요한 신호이며, 누군가에게 안전하게 표현될 수 있을 때 비로소 사랑과 정서적 친밀감으로 전환된다. ‘자기-대상’으로서의 부모, 또는 돌봄을 제공하는 존재는 아이의 공격성을 있는 그대로 받아내고 소화해 주는 그릇이어야 한다.


그러나 부모 역시, 그 부모로부터 충분히 받아보지 못한 존재일 수 있다. <빨간 지갑>은 세대 간에 반복되는 공격성과 사랑의 교착 상태를 통해, 우리가 어떻게 고통을 대물림하고 있는지, 또 그것을 멈추기 위해 어디부터 회복되어야 하는지를 질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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