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소설: <빨간 지갑>(엄연화)(4) 엄마와 딸의 동체성

동체성 인식과 치유 가능성

'동체성'의 의미


칼 융은 엄마와 딸 사이에 신체적, 심리적 동체성이 매우 강하게 작용한다고 보았다. 이는 자아 형성의 기초가 되지만, 지나치게 동일시될 경우 딸의 개별성과 자율성이 억압될 수 있으므로, 개성화 과정을 통해 어머니와의 심리적 분리를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어머니가 딸에게 죄책감을 자극하거나, 자신의 희생을 강조하며 심리적으로 딸을 통제할 때, 딸은 더욱 어머니와의 심리적 동체성에 묶여 자율성과 개별성을 잃을 위험이 있다.

동체성에 묶인 딸은 자신을 위해 살기보다 어머니를 위해 산다. 배우자를 고를 때도 딸 자신이 원하는 남자 대신에 어머니가 좋아할 만한 남자를 찾는다.

몸이 아플 경우, 딸이 아픈 것인지 어머니가 아픈 것인지 분간이 안 되는 경우가 발생한다. 딸이 시험기간에 감기나 몸살이 들어왔는데, 딸 대신 엄마가 대신 아파주는 경우도 발행한다.

이러한 어머니와 딸 사이의 동체성은 세대 간에 전달되어 외할머니와 딸, 그리고 손녀 사이에서도 발생할 수 있다. 이러한 모습이 <빨간 지갑>이라는 단편소설에도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신체적 증상뿐 아니라 심리적 현상 그리고 어머니에 대한 딸의 분노까지도 이어지기도 한다.


<빨간 지갑>에 나타난 세대 간 분노의 순환


어머니와 해인과 딸 사이의 이러한 '동체성'은 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 세대 간 트라우마 전이(Intergenerational Transmission)의 양상을 명확히 보여준다. 어머니의 미해결 된 고통과 정서적 부재가 해인에게 영향을 미쳤고, 해인 또한 자신의 딸에게 유사한 정서적 경험을 대물림했다는 점이 핵심이다.


과거의 상처와 그로 인한 분노는 엄마와 딸 사이 동체성을 이루며 반복적으로 재현되기 마련이다.


"그렇게 오래도록 해인의 마음속에서 해소될 수 없는 갈증처럼 목마르게 했던 어머니의 사랑, 해인 온 아직도 그 목마름의 갈증 때문에 혼돈 속을 헤매고 있는데, 어머니를 닮은 딸아이가 자신을 향해 쏟아놓는 저 말들은 그녀가 어머니에게 얼마나 오래도록 쏟아놓고 싶었던 말들인가. '그런데 왜 딸이 나에게 저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인가. 내가 그녀란 말인가. 그럴 리가 없어.' 해인은 할 말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멍하게 딸을 쳐다본다."(83)


그 순간 해인은 정체성 혼란을 겪는다. 자신이 어머니에게 느꼈던 갈증과 분노가 딸에게서 자신을 향한 비난으로 돌아오는 역설적인 상황을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

Whisk_c51f90eab4.jpg

어머니와 딸 사이 동체성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이슈는 그렇게 복잡하지 않다. 어머니와 딸 사이의 이슈에 비하면 특히 그렇다. 어머니와 딸 사이는 한 몸, 한 마음이라는 '동체성'이라는 매우 복잡한 문제를 안고 있다. <빨간 지갑>은 바로 이 지점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병과 고통의 닮은 모습

해인은 구토와 어지럼증을 겪으며, 위암 초기 진단을 받는다. 이는 해인 어머니의 아편을 맞아가면서도 담배를 찾던 모습이나, "움푹 꺼진 눈자위로 다크서클이 짙다"(61), 그리고 "숨을 쉴 수 없이 가슴이 막혀와서 허우적거"(66)렸던 모습 [5]과 유사하게 그려진다.


담배에 대한 의존

해인은 구토 증상을 겪은 후 "아무래도 담배 한 대를 피워야 될 것 같다"(64)고 생각하며, 의사가 내민 모르핀이 든 약 대신 담배를 피웠다고 언급한다. 이는 어머니가 밤마다 아편을 맞고도 담배를 찾고, "바싹 야윈 손가락 사이에서 타들어 가던 담뱃불"(63)이 늘 해인을 불안하게 만들었던 기억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에서 해인이 딸 앞에서 담배에 불을 붙이는 모습은 이러한 대물림을 더욱 강조한다.

Whisk_864c7d6421.jpg

냄새에 대한 반응

해인은 딸에게서 어머니의 비타민 냄새와 찌든 담배 냄새를 떠올리며 숨쉬기 곤란함을 느낀다. 이는 어머니의 방에서 나는 비타민 냄새와 담배 냄새에 대한 해인의 기억과 일치한다.


"엄마 생전 처음 들어보는 것 같은 말에 이명처럼 윙윙거리며 귓속으로 파고든다. 어디선가 비타민 냄새가 나는 것 같다. 꽃무늬가 요란하게 수놓아진 어머니의 스웨터에서는 늘 비타민 냄새가 났었다. 그 비타민 냄새에 섞여 있던 찌든 담배 냄새가 금방이라도 코끝에서 되살아날 것만 같다."(62)


한 모금만 마셔도 얼굴이 벌게지는 딸이 맥주 컵을 내려놓으면서,


"내 얼굴 좀 보세요. 화장품 독이 올라 이렇게 된 거라고요. 다른 친구들은 엄마 화장품 훔쳐 쓰는 재미가 쏠쏠하다는데 엄마는 화장품이 뭔지도 모르지요?"


조롱 섞인 딸의 말에 해인의 생각이 어디론가 달아난다.


"꿈과 현실이 혼몽해지는 어머니의 지분 냄새, 해인은 그 냄새를 애써 아주 오래도록 잊고 살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딸의 말이 시간의 간극을 훌쩍 뛰어넘어 금세 해인의 가슴에 생채기를 낸다."(81)



죽음과 병에 대한 태도

해인은 "어머니처럼 그렇게 죽음 앞에서 끔찍하게 몸부림치고 싶지는 않다"(69-70)고 말하면서도, 어머니의 죽음을 용서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혼란스러운 상태에 있다. 이는 죽음을 완강하게 거부했던 어머니의 모습 [4]과 겹쳐지며, 해인 역시 자신이 '어머니처럼 악다구니를 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낀다.


"어쩌면 자신도 죽음 앞에서 끝까지 버티지 못한 채 어머니처럼 악다구니를 퍼부을지도 모를 일이다. 대상도 없는 그 황망한 악다구니를 딸아이가 듣지 않기를 바라며 해인은 담배에 불을 붙인다."(85)


외모와 신체적 동체성

해인은 딸아이의 "움푹 꺼진 눈자위로 다크서클이 짙"은 모습과 "가느다란 손가락", "푸른 정맥들이 금방이라도 툭 튀어나올 것만 같"은 모습에서 어머니의 앙상한 손가락과 깊고 어둡던 눈자위를 발견하고 놀란다. 이는 딸이 어머니를 "너무나 흡사하게 닮아 있"다고 직접적으로 언급되는 부분에서도 확인된다.


감정적 부재와 단절

해인과 어머니 사이의 관계는 정서적 부재와 단절로 특징지어진다.


"어머니가 숨을 거둔 그 순간 뭔지 알 수 없는 후련했던 기억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이상하게 가슴을 짓누르는 죄책감으로 해인의 마음속에 깊은 뿌리를 내려가고, 그만큼의 분노도 함께 쌓여갔다."(64-65)


25년간 어머니를 '그 여자'로 칭하며 스스로를 방어했다. 이러한 해인의 감정적 단절은 딸에게 그대로 전이된다. 딸은 해인에게


"하지만 엄마는 내가 정말 필요로 할 때 내 곁에 없었어요. 왜 그런지 엄마에게는 가까이 다가갈 수가 없었어요. 책을 읽거나 멍하게 앉아 있거나, 나를 쳐다보고 웃을 때도 어쩐지 엄마는 나를 보고 있지 않는 것 같은. 텅 비어 있는 느낌이 들었어요."(81-82)


라고 했다. 이는 해인이 어머니에게서 느꼈던 감정과 놀랍도록 유사하다.


현실 왜곡과 정체성 혼란

해인은 "낮과 밤을 구별할 수 없는 도시의 회색빛은 늘 나를 괴롭힌다"라고 고백요즘 들어 자꾸 모든 기억이나 생각들이 뒤죽박죽 섞여서 머릿속은 도무지 풀어낼 수 없이 엉켜버린 실타래 같다"(69)고 한다. 이러한 불확실성과 현실 왜곡의 상태는 어머니의 죽음 이후 해인이 겪는 심리적 혼란과 연결된다.


해인은 딸에게서 어머니의 모습을 발견한다.


"그렇게 오래도록 해인의 마음속에서 해소될 수 없는 갈증처럼 목마르게 했던 어머니의 사랑, 해인 온 아직도 그 목마름의 갈증 때문에 혼돈 속을 헤매고 있는데, 어머니를 닮은 딸아이가 자신을 향해 쏟아놓는 저 말들은 그녀가 어머니에게 얼마나 오래도록 쏟아놓고 싶었던 말들인가. '그런데 왜 딸이 나에게 저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인가. 내가 그녀란 말인가. 그럴 리가 없어.' 해인은 할 말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멍하게 딸을 쳐다본다."(83)


해인이 어머니에게 느낀 고통이 딸로부터 자신을 향한 비난으로 돌아오는 역설적인 상황을 직면한다.


치유를 향한 가능성


'빨간 지갑'의 상징적 연결

해인이 암 진단 후 구매한 '빨간 지갑'은 어머니의 낡은 빨간 지갑을 닮아 있으며 이는 해인의 무의식 속에 억압되었던 어머니와의 트라우마틱한 기억들을 불러일으킨다. 지갑 속에 어머니와 낯선 남자아이의 사진을 발견하고 느꼈던 구토감과 분노는, 어머니에 대한 해인의 혼란스럽고 해결되지 않은 감정들을 상징한다.

딸이 새 지갑을 '짜가 명품'이자 '텅 비어있다'라고 비난하는 것은 해인 자신의 내면적 공허함과 무가치함을 반영하며, 이는 해인이 어머니에게서 느꼈던 '텅 빈' 감각이 대물림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닮은 모습들은 "빨간 지갑의 그림자"가 세대 간에 전이되는 심리적 트라우마와 미해결 된 관계가 개인의 내면과 정체성에 얼마나 깊이 영향을 미치는지를 밀도 있게 그려내고 있음을 보여준다.

Whisk_0f8b2eaf70.jpg

이야기의 마지막에 해인이 딸의 품에서 편안함을 느끼고 수십 년간 봉인해 왔던 '엄마'라는 단어를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83)은 이러한 고통스러운 동체성으로부터 벗어나 치유와 새로운 관계 맺음을 향한 중요한 첫걸음이자, 세대 간 분노의 사슬을 끊어낼 가능성을 제시한다.

해인이 어머니를 닮은 딸 앞에서 담배에 불을 붙이는 행위 역시 과거의 고통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새로운 방식으로 관계를 정립하려는 시도로 해석될 수 있다.


이처럼 작품은 세대에 걸쳐 이어지는 분노가 개인의 삶과 정체성에 미치는 심대한 영향을 깊이 탐구하며, 이를 직면하고 치유하는 과정을 섬세하게 그려 내고 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소설: 빨간 지갑(엄연화)(3)-세대간 순환되는 분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