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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데헌: 제국주의에 대한 이해

제국주의와 폭력의 유산


근대 서구가 남긴 또 다른 그림자는 제국주의였다. 유럽 열강들은 문명과 진보라는 이름으로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침략했고, 원주민들의 땅과 삶을 빼앗았다. ‘개화’라는 미명 아래 행해진 폭력은 사실상 약탈과 지배의 정당화였다.

심지어 기독교 선교마저 이 과정에 편승했다. 선교는 복음 전파라는 거룩한 이름을 가졌지만, 실제로는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는 수단이 되었다. 선교사는 원주민들의 문화를 파괴하고, 서구적 가치와 신앙을 강요했다. 그 속에 담긴 모순은 뚜렷하다. 사랑의 언어로 전해진 메시지가 폭력의 현실로 변질되었던 것이다.


철학 또한 자유와 이성을 말했지만, 실제 식민지 현실에서는 타자를 존중하는 ‘나-너’의 관계가 아니라, 지배와 대상화의 ‘나-그것’의 관계로 변질되었다. 결국 서구가 남긴 문명은 이중성을 가졌다. 한쪽에서는 인권과 자유를 외쳤고, 다른 쪽에서는 폭력과 억압을 행사했다.


제국주의의 발흥

유럽이 제국주의가 발흥되기 전, 저개발 또는 미개발 국가들, 제3의 세계의 나라들의 “개발 계획”에 대해 25년 동안 연구하였다. 이 계획들의 목표는 물질적인 향유, 소비증대와 경제적인 발전의 범주로 표현되는 서양의 기술적인 발전 모델이었다. 이 계획의 더 큰 전제는 유럽 국가들이 정의한 발전의 혜택들이 제3 세계의 극빈자들에게도 돌아가고, 발생한 부에 대한 공정한 몫을 각 사람에게 배분하게 할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들이 이룩한 부를 가난한 자들에게도 누리게 하고, 문화적인 혜택과 삶의 질의 향상 등을 목표로 하였지만, 곧 그것이 거짓의 가면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그들은 처음에는 제3 세계의 나라들에 대해 ‘나와 너’의 상호주체성(I - you )으로 시작하였지만, 곧 본색을 드러내면서 제국주의로서 식민지를 개척해 가면서, 그들의 정복야욕으로 나타났고, 그들에 대한 지배를 정당화함으로써, ‘나와 그것(I - it)’의 일방적인 주체성을 발휘하게 된 것이다. 유럽국가 자신들을 '주체'로 보고 제 3 국가를 '객체'로 보게 되면서, 사물화 하여 정복의 대상으로 여기게 된 것이다.

제국주의는 그나마 기독교를 끼고 있기 때문에 처음 시작단계에서 제 3국가를 you로 보고자 하였다. 결국 you가 it로 바뀌기는 했지만, 주체가 객체를 보는 이중성은 기독교 선교에서 드러난다.


제국주의의 발흥과 선봉자들 : 탐험가와 선교사의 이중임무


어떤 기독교 목회자나 기독교 학문 연구자들과의 토론 중에 제국주의가 제 3 국가를 식민지화하기 전에 탐험가와 선교사를 보내 현지 상황과 민심을 본국에 보고하면서, 각자의 고유 임무를 수행했다고 언급한 적이 있었다. 그때 함께 토의하던 사람들은 선교사들의 순수한 열정을 모독한다고 나를 엄청나게 비난한 적이 있었다. 어쩌면 선교사들은 제국주의의 그런 목적을 알면서도 제 3 국가 국민들에게 영혼구원을 위한 헌신을 위해 그들을 이용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제국주의자들의 목적은 약한 나라를 삼키며 식민지화하려는 목적을 위해 탐험가와 선교사를 공식적으로 활용했던 것은 사실이다.


제국주의의 일방적 주체성은 결국 제 3 국가들과의 관계를 ‘나와 그것(I–It)’의 관계로 재설정하게 되었고, 본격적인 식민지 개척과 지배의 논리로 나아갔다. 이러한 제국주의의 전개 과정에서 가장 먼저 파견된 인물들은 바로 '탐험가와 선교사'였다. 이들은 군대나 상인보다 먼저 도착해, 낯선 땅을 익숙한 땅으로 바꾸는 작업을 수행했다. 그리고 이들은 단순히 현지에서 활동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들의 관찰과 경험을 본국에 체계적으로 보고하는 임무'도 함께 수행했다. 이는 그들의 역할이 단순한 현장 요원이 아니라, '정보 수집자이자 정책 조율자'였음을 보여준다.


탐험가: 지리와 자원의 개척자

탐험가는 미지의 땅을 누비며 지형, 기후, 자원, 교통로 등을 조사했다. 이들은 지도 제작과 항로 개척을 통해 군사적 진입과 상업적 침투의 기반을 마련했다. 예를 들어, 아프리카를 탐험한 데이비드 리빙스턴은 유럽의 식민지 확장에 결정적 정보를 제공했고, 그의 보고는 곧바로 식민지 정책에 반영되었다.

탐험가의 보고서는 본국 정부와 상인, 군대에게 전략적 판단의 근거가 되었으며, 이로써 탐험가는 현장 조사자이자 제국의 정보 전달자라는 이중임무를 수행했다.


선교사: 민심과 영혼의 통로

선교사는 복음을 전파한다는 명분 아래 현지인들과 깊은 관계를 맺었다. 그들은 언어를 배우고, 학교와 병원을 세우며 민심을 파악했다. 동시에 기독교적 가치관을 전파함으로써 문화적 동화와 정신적 지배를 시도했다. 선교사 역시 본국 교단이나 정부에 정기적으로 보고서를 제출했으며, 현지의 문화, 종교, 민심, 저항 가능성 등을 상세히 기록했다. 이는 선교사가 단순한 종교 전도자가 아니라, '문화적 척후병이자 정치적 감시자'로 기능했음을 보여준다.

기독교는 제국주의의 도덕적 얼굴로 기능했다. 선교사들은 처음에는 제 3 세계 사람들을 ‘you’로 바라보며 영혼의 구원과 인류애를 강조했지만, 결국 그들도 ‘it’으로 대상화하며 지배의 도구로 전락했던 경우가 많았다. 이 주체와 객체의 이중성은 기독교 선교 활동 속에서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다.


이러한 이중 임무 속에서도 우리나라의 수많은 선교사들은 순수한 영혼사랑과 조선인에 대한 사랑과 깊은 헌신이 있었음을 의심할 필요는 없다. 선교사입장에서는, 이런 이중임무의 한계를 알면서도 목숨을 걸고 조선 선교를 위해 열정을 다했다는 점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선교의 이중성에 대해서는 일본이 일으킨 임진왜란 역시 침략과 선교라는 이중성을 가지고 있었음을 이해한다면 유럽과 미국 제국주의의 이중성을 더 잘 이해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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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 침략과 선교라는 이중성


임진왜란과 천주교 선교 목적 : 십자가 깃발의 의미

임진왜란과 관련된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일본 왜적선이나 군대기호에 십자가가 그려져 있는 것이 발견된다.

임진왜란(1592–1598)은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략한 대규모 전쟁이었지만, 단순한 영토 확장 이상의 종교적 배경도 일부 존재했다. 특히 선봉에 섰던 고니시 유키나가 부대는 천주교적 색채가 강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세례명 ‘아우구스티노’를 가진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으며, 그의 부대는 ‘기리시단(吉利支丹)’이라 불리는 가톨릭 군단이었다. 이 부대에는 종군 신부 세스페데스가 동행했고, 병사들은 전투 중에도 고해성사와 세례를 받았다.

실제로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대는 흰 비단에 십자가가 선명히 그려진 깃발을 들고 조선에 상륙했다. 이는 단순한 군기 이상의 의미로, 천주교 선교의 상징이자 종교적 정체성을 드러내는 상징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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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야망과 선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선교사들과의 대화에서 명나라를 정복한 뒤 가톨릭 교회를 세우고 중국인을 모두 신자로 만들겠다는 포부를 밝힌 바 있다. 예수회 신부 루이스 프로이스는 “하느님은 도요토미를 성스러운 검으로 선택하셨다”라고 기록하며, 종교적 정당성을 부여했다.


참고문헌 :


중원신문(2023.11.07), [역사특집]임진왜란을 일으킨 천주교 예수회(Jesuite)와 일본 침략군 제 1장수 고니시 유키나가((こにし ゆきなが, 소서행장(小西行長)) 아우구스티노


Britannica – Konishi Yukinaga](https://www.britannica.com/biography/K Aonishi-Yukinag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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