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는 인간의 도덕을 두 가지로 구분했다 — 주인 도덕과 노예 도덕.
그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노예 도덕을 따르며 살아간다고 보았다.
그러나 성숙한 인격이란 단순히 주인 도덕을 획득하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자신 안에 내재한 노예 도덕의 속성을 자각하고, 그 한계를 어떻게 넘어서는가에 달려 있다고 그는 말한다.
주인 도덕은 타인의 시선에 구속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자율적 인간의 덕목처럼 보인다.
그러나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이 언제나 고귀한 도덕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세상을 자기중심으로만 바라보며 타인에 대한 존중을 결여한 사람 또한 표면적으로는 주인 도덕의 형태를 띨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김정은과 이재용, 두 사람 모두 ‘주인 도덕’의 전형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들이 그 도덕을 발휘한 결과는 인류와 사회에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타난다. 같은 도덕의 형태일지라도, 그 안에 담긴 책임의 철학이 다르면 그 결과는 전혀 다른 세계를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이병철 회장이 제시한 ‘가난한 도덕’과 ‘부자의 도덕’은 니체의 도덕보다 훨씬 현실적이며,
도덕의 본질을 더 선명하게 드러낸다.
니체가 도덕의 유형을 구분했다면, 이병철은 그 도덕이 삶의 결과와 책임의 무게 속에서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보여주었다.
삼성 창업주 이병철은 평생 도덕을 이야기한 기업가였다. 그러나 그의 도덕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착한 도덕'과는 달랐다.
그는 성실하게 일하고도 가난을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을 보며 이렇게 말했다.
“도덕에는 두 종류가 있다. 사람을 살리는 도덕과, 스스로를 죽이는 도덕.”
그의 눈에, 많은 사람들은 후자의 도덕 속에서 자신을 소모시키고 있었다.
그는 가난을 단순히 ‘노력의 부족’으로 보지 않았다.
오히려 스스로를 죽이는 도덕은 도덕의 방향이 잘못된 결과, 즉 자기 파괴적 도덕심의 산물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착한 사람’이라는 말에 묘한 면죄부를 부여한다.
마치 ‘착하다’는 한마디가 모든 잘못을 덮고, 모든 결함을 정당화하는 암묵적 통행증이 된 듯하다.
어떤 이가 큰 실수를 저질러 타인에게 상처를 주거나 속한 조직에 심각한 손해를 끼쳤다 하더라도,
우리는 종종 이렇게 말하며 그를 감싸려 한다.
“그래도, 그 사람은 착하잖아요.”
그러나 이 말속에는 위험한 착각이 숨어 있다. 착함이 모든 책임을 상쇄할 수 있다는 믿음은 도덕이 아니라 미성숙의 징표다. 그런 착함은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스스로를 지키는 최소한의 판단력마저 마비시킨다.
진정한 선함은 감정적 착함이 아니라, 결과에 대한 책임을 끝까지 지는 성숙한 의지 속에서만 증명된다.
착하기만 한 사람은 결국 자신도, 타인도 지켜내지 못한다.
그런 면에서 이병철 회장의 두 가지 도덕론은 사람들을 합리적으로 설득하는 데 있어서 매우 큰 힘을 가지고 있다.
이병철이 말한 가난한 도덕심은 죄책감과 두려움으로 유지되는 도덕이다. 그들은 남에게 미움받지 않기 위해, 남의 기대를 어기지 않기 위해 산다. 이 도덕의 중심이 자신이 아니라, 타인의 시선에 있다.
이들은 ‘착해야 한다’는 믿음 아래, 자신의 욕망을 억누르고 스스로를 희생한다. 그러나 그 착함은 결국 자기 비하의 다른 이름이다. 죄책감을 미덕으로 착각한 채, 실패와 불운을 운명처럼 받아들인다.
“나는 그래도 착하게 살았어.”
라는 말이, 그들의 위로이자 면죄부다.
그들의 행동 기준은 ‘세상이 그어놓은 선’이다. 그 선을 넘지 않으려 애쓰며, 자신만의 판단 대신 타인의 기준을 도덕이라 부른다. 그러나 도덕이 남이 정한 경계 속에 갇히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도덕이 아니라 복종이 된다.
이병철은 이런 착함의 도덕을 “스스로를 죽이는 도덕”이라고 했다. 그 도덕은 개인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듯하지만, 결국 결정하지 않는 삶, 책임지지 않는 삶으로 이어진다. 착한 사람은 세상에 순응하지만, 세상을 바꾸지는 못한다.
반면, 이병철이 말한 부자의 도덕심은 착함이 아니라 책임감에서 출발한다. 그에게 도덕이란 감정이 아니라, 판단력이었다. 도덕은 마음이 아니라 방향이며, 결과로 증명되어야 하는 원칙이었다.
이병철은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나는 직원들에게 월급을 제때 주는 것이 가장 큰 도덕이라고 생각한다.”
그에게 도덕은 감상적 선의가 아니라 현실 속의 책임 이행이었다.
회사를 성장시켜 일자리를 늘리는 것, 고객의 신뢰를 지키는 것 — 그것이 바로 ‘사람을 살리는 도덕’이었다.
부자의 도덕은 ‘남이 나를 어떻게 볼까’가 아니라, ‘내가 어떤 기준으로 살아갈 것인가’에 있다.
그들은 세상이 만든 선을 지키는 대신, 스스로의 철학으로 새로운 기준을 만든다.
세상은 늘 “그건 너무하다”라고 말하지만, 그들은 묻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책임을 질 수 있는가?” 그 질문이 부자의 도덕을 만든다.
가난한 도덕은 감정의 도덕이다. 그들은 미안하면 머리를 숙이고, 섭섭하면 관계를 끊는다. 감정이 모든 판단의 근거가 된다. 그래서 늘 후회하고, 늘 불안하다. 도덕을 감정에 의존하는 사람은 결국 세상의 눈치를 보며 산다.
반면, 부자의 도덕은 원칙의 도덕이다. 그들은 실수를 해도 감정에 머물지 않는다. 분석하고 수정하며, 다시 일어난다. 감정은 그들에게 판단의 장애물이 아니라, 도구다.
그들은 감정을 느끼되, 감정으로 결정하지 않는다.
이병철이 말한 도덕은 바로 이런 냉철함이었다. 도덕은 착함이 아니라 신뢰를 지키는 힘, 감정이 아니라 판단의 일관성이었다.
가난한 도덕의 뿌리는 죄책감이다. 그들은 ‘내가 더 가져서는 안 된다’, ‘내가 더 잘나면 미움받을 것이다’라는 무의식 속에서 스스로를 제한한다.
그 죄책감은 겸손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두려움의 다른 얼굴이다.
부자의 도덕은 죄책감 대신 용서를 선택한다. 그들은 자신을 미워하지 않는다. 실패는 죄가 아니라 과정이며, 잘못은 끝이 아니라 방향을 수정하라는 신호다. 자신을 용서할 줄 아는 사람만이 타인을 진심으로 책임질 수 있다.
이병철의 세계에서 용서는 재도전의 윤리였다. 가난한 사람은 실수하면 스스로를 탓하고 주저앉지만, 부자는 실수를 기록하고 다시 시도한다. 그 차이가 결국 부의 깊이를 결정한다.
이병철이 말한 도덕의 차이는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가난한 도덕은 착한 죄인을 만들고, 부자의 도덕은 책임 있는 자유인을 만든다.”
가난한 도덕은 안전하지만, 자유롭지 않다.
타인의 기준에 묶여 스스로를 희생하며,
결국 자신조차 구하지 못한다.
그들은 늘 선을 지키지만, 그 선은 남이 만든 경계일 뿐이다.
부자의 도덕은 불편하고 냉정하지만, 자유롭다.
그들은 스스로 기준을 만들고 그 기준에 책임을 진다. 그 책임이 때로는 고통이지만, 그 고통이 바로 리더의 윤리이며 인간의 성숙이다.
이병철의 통찰은 도덕의 본질을 뒤흔든다. 그는 ‘착함’이 아니라 ‘신뢰’를 도덕의 본질로 보았다. 착함은 감정이지만, 신뢰는 구조다. 착함은 위로를 주지만, 신뢰는 생존을 준다.
착한 마음만으로는 회사를 지킬 수 없듯, 감정적 도덕으로는 세상을 유지할 수 없다.
그는 부자의 도덕을 통해 말한다.
“도덕이란, 인간의 관계를 지속 가능하게 만드는 힘이다.”
이병철의 ‘부자의 도덕’은 냉혹해 보이지만,
그 밑에는 깊은 인간 이해가 있다.
그는 도덕을 결과로 검증받는 책임의 언어로 보았다.
진짜 착함은 감정이 아니라 신뢰와 지속성의 결실이다.
우리가 도덕을 다시 말해야 한다면, 그것은 “착하게 살아야 한다”가 아니라, “책임 있게 살아야 한다.”
가난한 도덕은 사람을 착하게 만들지만, 부자의 도덕은 사람을 성장하게 만든다.
결국, 이병철이 남긴 도덕의 명제는 이 한 문장으로 정리된다.
“진짜 도덕은 남의 선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내 기준으로 세상을 살리는 일이다.”
(참고 유튜브: https://youtu.be/1YUSBQm-kCQ?t=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