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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덤함이라는 거짓된 평화:남편의 억압된 감정 마주하기

'괜찮다'는 말 뒤에 숨겨진 거대한 감정의 덩어리


많은 남편이 원가족과의 갈등 상황에서 '무덤덤함'이라는 태도를 방패처럼 꺼내 든다.


"저는 그냥 제가 잘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그쪽에서 뭘 하든 저만 잘 행동하면 문제없다."


이 말은 언뜻 보기에 성숙하고 초월적인 자세처럼 들린다. 상황을 이성적으로 통제하고, 감정에 휘둘리지 않겠다는 단단한 결심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상담의 관점에서 볼 때, 이 '무덤덤함'은 평화가 아니라 '거대한 감정의 압축 파일'이다.

어린 시절부터 가족 내에서 차별이나 편애를 겪으며 느꼈던 억울함, 부당함, 상실감과 같은 고통스러운 감정들은 생존을 위해 무의식적으로 깊은 곳에 묻힌다. 당장 그 감정을 느끼고 표현했다가는 더 큰 상처를 입거나 관계가 단절될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모든 복잡한 감정들을 하나의 무겁고 단단한 '감정 덩어리'로 뭉쳐놓고, 그 위에 '무덤덤함'이라는 두꺼운 뚜껑을 덮어버린다.


"이제 와서 뭘 새삼스럽게 따지는가?" "지나간 일은 그냥 잊어야 한다."


이러한 태도는 '억압'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이 덩어리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끓고 있는 압력솥처럼 언제 터질지 모르는 잠재적 위협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이 압력솥은 바로 배우자, 즉 아내와의 관계에서 치명적인 문제를 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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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압된 남편'과 '고통받는 아내' 사이의 불균형


남편이 '무덤덤함'을 유지할 때, 아내는 오히려 더 깊은 고통에 빠진다. 왜냐하면 아내는 남편이 원가족으로부터 받은 부당함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남편을 대신하여 화를 내고 있기 때문이다.


아내의 입장에서 남편의 '무덤덤함'은 다음과 같이 해석된다.


나의 감정 불인정: "저렇게 부당한 일을 당하고도 당신이 화를 내지 않는다면, 지금 내가 화를 내는 이 감정은 과도하고 비정상적인가?"

고통의 이중 부담: "당신이 느끼지 않기로 결정한 그 모든 억울함과 분노를 나 혼자 짊어져야 하는가?"

연대감의 파괴: "당신의 내면에 내가 들어설 공간이 없다. 당신은 나를 외부인으로 대하고 있다."

아내는 남편의 과거를 재해석하고 그 억울함에 정서적 연대를 보내고 싶어 하지만, 남편의 굳건한 '무덤덤함'은 아내의 공감 노력을 번번이 좌절시킨다. 아내가 화를 낼수록 남편은 "왜 내 일인데 당신이 더 힘들어하느냐"라고 반문하게 되고, 이는 아내에게 "결국 남편은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깊은 외로움과 상처를 남긴다.

결국, 원가족과의 경계를 세우기 이전에 부부 내부의 연대가 깨져버리는 것이다. 이 연대감을 견고하게 회복하기 위한 첫걸음이 바로 남편의 '감정 분화 작업'이다.


내 안의 압축을 풀어내는 '감정 분화'의 기술


감정 분화란, 하나의 커다란 덩어리로 뭉쳐있는 억압된 감정들을 원래의 개별 감정들(분노, 슬픔, 불안, 억울함 등)로 나누는 작업이다. 이 작업이 필요한 이유는 덩어리 상태의 감정은 너무 무거워 다룰 수 없지만, 분화된 감정은 인식하고 표현하고 해소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 경험 재해석의 힘

남편분은 이제 무의식의 뚜껑을 열고 '과거의 경험을 '재해석'해야 한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지만, 그 감정은 우리 몸에 '압축된 현재'로 남아 있다.


상황 재현: "형 결혼할 때 어머니가 전 재산을 동원해 지원했지만, 내 결혼 때는 돈이 없다고 했던 그 순간을 다시 떠올려 본다."

감정 찾기: 그때 내가 '괜찮은 척' 혹은 '무덤덤한 척' 했던 행동을 멈추고, '솔직히 그때 나는 어땠어야 했는가?'를 질문한다.

억울함: "왜 나한테만 이런 일이?" 분노: "나는 아들 자격이 없었나? 나를 차별하는 건 불공평하다." 슬픔: "엄마의 사랑이 나에게는 오지 않는구나."

이처럼 무덤덤함 대신 진짜 감정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이 작업은 '엄마를 원망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과거의 나 자신에게 정당성을 부여하는 일'이다.


"네가 그때 억울함을 느끼는 것은 당연했고, 네 감정은 틀리지 않았다"라고 스스로에게 말해주는 행위이다.


'히어 앤 나우'로 감정을 끌어올리는 연습

상담에서는 이 억압된 감정을 '히어 앤 나우(Here and Now)', 즉 '지금-여기'로 끌어올리는 훈련을 한다.

과거의 상황을 머리로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그 감정의 파동을 지금, 이 순간 느끼는 것이다.


"그때 결혼 자금 문제로 느꼈던 그 쓰라린 억울함을 지금 내 몸의 어디에서 느끼는가?"


이 정서적 재경험을 통해 비로소 감정의 압력이 조금씩 풀려나기 시작한다.


실천 과제

휴대폰 메모장이나 일기장에 '감정 일지'를 작성한다. 과거의 억울했던 장면이 떠오를 때마다, 그 상황과 그때의 진짜 감정을 솔직하게 기록한다. 처음에는 단어가 잘 떠오르지 않겠지만, 꾸준히 반복하면 억압의 벽이 얇아지면서 내면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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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감정의 해소가 아내에게 미치는 영향: 견고한 연대


남편의 감정 분화와 재해석 작업은 결코 개인적인 영역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부부 관계의 결정적인 전환점이 된다.

남편이 과거의 억울함을 인정하고, "사실 그때 나는 무덤덤한 척했지만, 속으로는 매우 화나고 억울했다"라고 아내에게 정직하게 표현할 때, 아내의 상처는 눈 녹듯이 치유되기 시작한다.


아내의 감정 정당화: 아내는 비로소 "내가 느꼈던 분노가 틀리지 않았구나. 남편도 나와 같은 고통을 느꼈

구나"라는 정당성을 얻는다. 아내의 모든 감정적 노력이 남편을 향한 헛된 외침이 아니었음을 확인한다. 연대감의 구축: 남편이 자신의 상처를 인정할 때, 두 사람은 비로소 원가족이라는 공동의 문제에 맞서는

동지가 된다. 이때 형성되는 연대감은 그 어떤 외부적 압력에도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부부의 울타리가

된다.

성숙한 남편으로의 변화: 자신의 감정을 회피하지 않고 마주하는 남편은 비로소 '철이 들어가는' 성숙한

존재가 된다. 이는 아내가 바라던 깊은 이해의 시작이며, 앞으로의 결혼 생활을 건강하게 이끌어갈

근본적인 힘이 된다.


'무덤덤함'은 더 이상 미덕이 될 수 없다. 부부의 행복을 위해서는 그 무덤덤함의 뚜껑을 열고, 그 안에 갇힌 과거의 고통을 직시할 용기가 필요하다. 이 내적 작업이야말로 원가족과의 건강한 경계를 세우기 위한 가장 강력하고 필수적인 첫걸음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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