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지중해를 누비며 해상무역의 중심지로 군림했던 도시, <두로(Tyre)>. 그 도시는 부와 영화, 교역과 문화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이사야 23장은 그 찬란한 도시가 '하나님의 심판 아래 무너지는 장면'을 생생히 그려낸다. “누리던 영화를 욕되게 하시고, 교만하던 자가 멸시받게 되리라”는 말씀처럼, 두로의 몰락은 단지 한 도시의 붕괴가 아니라, '교만한 문명의 종말'을 상징한다.
이 거대한 붕괴는 주변 도시들에게도 깊은 충격을 안겼다. 그중에서도 '시돈'과 '다시스'는 두로와 긴밀히 연결된 해상 교역 도시로서, 같은 상황 속에서 '전혀 다른 운명'을 맞이한다.
'다시스'에게는 회복의 메시지가 주어진다.
“딸 다시스여, 나일같이 너희 땅에 넘칠지어다. 너를 속박함이 다시는 없으리라.” (23:10)
이는 '속박에서의 해방과 풍요의 회복'을 상징한다.
반면, '시돈'에게는 절망의 선언이 내려진다.
“너 학대받은 처녀 딸 시돈아, 네게 다시는 희락이 없으리니… 거기에서도 네가 평안을 얻지 못하리라.” (23:12)
시돈에게는 희락도, 평안도 없는 유랑의 운명이 예고된다.
이 극적인 차이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그 실마리는 4절에 등장하는 '시돈의 내면적 상태'에서 찾을 수 있다.
“시돈이여, 너는 부끄러워할지어다… 바다도 말하기를 나는 산고를 겪지 못하였고, 출산하지 못하였으며, 청년들을 양육하지 못하였고, 처녀들을 생육하지 못하였다 하였느니라.” (23:4)
시돈은 '생명을 잉태하지 못한 도시', '산고도, 출산도, 양육도 없는 불모의 존재'로 묘사된다. 이는 단지 인구의 문제가 아니라, '정체성과 사명, 생명력의 상실'을 의미한다. 다시스는 속박 속에서도 생명의 회복을 향해 나아갔지만, 시돈은 '자기 안의 공허함과 무기력함'에 갇혀 희락을 잃고 유랑하게 된 것이다.
이 글은 이사야 23장의 예언을 통해, '생명 없는 문명의 위기', '정체성을 잃은 시대의 초상', 그리고 '회복과 유랑의 갈림길에 선 우리 자신'을 성찰해보고자 한다. 시돈과 다시스, 두 도시의 운명은 단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오늘 우리 시대의 이야기이며, 우리 각자의 내면에서 매일 벌어지고 있는 선택의 이야기다.
이사야 23장 2절은 시돈을 ‘학대받은 처녀 딸’이라 부르며, 그녀가 '산고를 겪지 못하고, 출산하지 못하고, 청년들을 양육하지 못하며, 처녀들을 생육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이 구절은 단순한 고대 도시의 몰락을 넘어, '생명과 희락', 그리고 '여성성과 정체성의 붕괴'를 상징하는 강력한 은유다.
오늘날 우리는 이사야의 예언이 '문화적 차원에서 재현되고 있는 시대'를 살고 있다. 특히 현대 여성주의의 흐름 속에서, '출산과 생육을 거부하는 정체성의 선택'은 단순한 개인의 자유를 넘어, '문명의 방향성과 생명의 지속성'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시돈은 두로와 함께 고대 지중해 무역의 중심지였다. 부요하고 화려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교만과 자기 중심성의 상징'이었다. 이사야는 시돈을 ‘처녀 딸’이라 부르며, 그녀가 '산고도 없고, 출산도 없고, 양육도 없었다'고 말한다. 이는 단순히 인구 감소나 경제적 쇠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표현은 '생명력의 단절', '미래 세대의 부재', 그리고 '희락의 상실'을 상징한다. 출산은 단지 생물학적 행위가 아니라, '희락과 평안, 미래와 연결되는 생명의 축복'이다. 시돈은 그 축복을 거부했고, 결국 '희락 없는 도시', '평안 없는 존재'로 남게 되었다.
오늘날 많은 여성들이 '페미니즘'이라는 이름 아래 결혼과 출산을 거부한다. 물론 그 선택은 존중받아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그 선택이 '보편적 진리와 생명의 질서'를 부정하는 방향으로 흐를 때다.
현대 문화는 '상처받은 자의 고통'을 진리로 삼는다. 피해자의 목소리는 절대화되고, 생명의 질서나 공동체의 책임은 상대화된다. 결혼은 억압으로, 출산은 고통으로, 양육은 희생으로만 해석된다. 그 결과, 우리는 '생육되지 못한 세대', '희락 없는 시돈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성경은 출산과 생육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본다.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창세기의 명령은 단지 인구 증가를 위한 것이 아니라, '관계와 공동체, 미래와 희망을 위한 질서'다. 출산은 여성의 정체성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정체성을 완성시키는 통로'일 수 있다.
물론 모든 여성이 출산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출산과 생육을 본질적으로 부정하는 문화'는, 결국 '희락과 평안을 잃은 시돈의 길'을 걷게 된다. 생명을 거부한 문명은, 그 화려함 속에서도 내면의 황폐함을 피할 수 없다.
오늘날 우리는 '피해자의 시대'를 살고 있다. 상처받은 자의 고통은 진리로 절대화되고, 그 고통을 비판하거나 상대화하는 것은 금기시된다. 그러나 고통은 진리가 아니다. 고통은 '진리를 향한 질문'일 수는 있지만, '진리 자체가 될 수는 없다.'
시돈은 ‘학대받은 처녀 딸’이었다. 그녀는 상처받았지만, 그 상처를 통해 '생명을 선택하지 않았다.' 그녀는 산고를 거부했고, 출산을 거부했고, 양육을 거부했다. 그리고 결국 '희락과 평안을 잃었다.' 상처는 이해받아야 하지만, 그 상처가 삶의 방향을 결정하게 해서는 안 된다.
결혼과 출산은 선택이다. 그러나 그 선택은 '문화적 흐름과 신앙적 질서' 속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여성은 단지 생물학적 존재가 아니라, '생명을 품고, 관계를 잉태하며, 공동체를 세우는 존재'다. 출산은 그 정체성의 일부이며, 그것을 거부하는 것은 '자기 존재의 일부를 거부하는 것'일 수 있다.
시돈은 그 거부의 상징이다. 그녀는 화려했지만, 생명은 없었다. 그녀는 자유로웠지만, 희락은 없었다. 그녀는 독립적이었지만, 평안은 없었다. 그리고 그녀는 결국 '유랑하는 존재'가 되었다.
이사야의 예언은 단지 고대 도시의 몰락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 문명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묻는 질문'이다. 우리는 시돈처럼 생명을 거부하고, 상처를 진리로 삼으며, 희락 없는 자유를 추구하고 있지는 않은가?
생명은 축복이다. 출산은 억압이 아니라, 희락과 평안의 통로다. 여성은 그 생명의 중심에 있다. 시돈의 길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다시 생명을 선택해야 한다. 그리고 그 선택은, 상처를 넘어서는 용기에서 시작된다.
“처녀 딸 시돈아, 네게 다시는 희락이 없으리니…”
이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경고가 아니라, 이 시대를 향한 '회복의 초대'가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