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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앞치마>(2) : 마음으로 읽어보기

<할머니의 앞치마>

최 민 식



인트로


김기숙 작가의 수필 '할머니의 앞치마'에 담긴 과거-현재-미래를 연결해 보는 기회를 가져 보겠습니다. 이 작품은 '죽음'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루며, 화자(약사)의 현재 경험과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적 기억을 연결하고 있습니다. 특히, '할머니의 앞치마'와 '푸른 멍'이라는 상징을 통해 억압된 정서와 반복 강박의 개념을 적용하여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할머니의 앞치마, 내 가슴에 남은 70년의 푸른 멍


상실의 고통을 반복하는 약사의 무의식

김기숙 작가님의 수필 '할머니의 앞치마'를 읽는다는 것은, 한 사람의 삶에 켜켜이 쌓인 미해결 된 슬픔의 지층을 더듬어 내려가는 일과 같습니다. 요양병원 약사로 일하는 필자가 마주하는 현재의 죽음과, 칠십 년 전 어린 시절 겪었던 동생들의 상실은 '할머니의 앞치마'라는 표지를 통해 기묘하게 연결됩니다.

이 글에 담긴 상징과 심리적 기제들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 모두의 내면에 남아있는 오래된 '멍'의 근원을 발견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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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음의 닻: 슬픔을 닦아내던 앞치마 자락

수필에서 가장 강렬한 표지는 단연 '할머니의 앞치마'입니다. 어린 화자는 어머니가 아기를 낳거나, 가족 전체가 감당할 수 없는 슬픔에 잠겼을 때, 이 옥양목 앞치마 자락을 끌어안거나 가슴에 문질렀습니다.

이 앞치마는 단순히 옷가지가 아닙니다. 심리학적으로 볼 때, 이는 ‘중간 대상(Transitional Object)’의 역할을 수행합니다. 전쟁과 죽음이라는 혼란스럽고 위협적인 세상 속에서, 이 앞치마는 "나는 안전하다"라고 느낄 수 있는 마음의 닻이 되어주었습니다. 엄마가 옆에 없을 때, 할머니의 따뜻한 체온이 스며든 앞치마를 통해 아이는 무너지는 정서를 지지받고 스스로를 위로했습니다. 이 앞치마는 상실의 시대에 아이가 붙잡을 수 있었던 유일한 정서적 안전지대였던 셈입니다.


2. 대물림된 상흔: 푸른 멍의 정체

앞치마 자락에 물들었던 오디 열매 색깔, 곧 '푸른 멍'은 이 수필의 핵심입니다. 멍은 넘어졌을 때 무릎에 드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가슴에 들었고, 다시 어린 화자의 가슴으로 옮겨왔습니다. 이 멍은 단순히 슬픔을 넘어 상실, 죄책감, 그리고 억압된 트라우마의 정서적 흔적을 시각화합니다.

아버지는 첫째 동생의 죽음으로 인한 고통을 숨죽여 울어야 했고, 어린 화자는 그 아버지와 할머니의 슬픔을 그대로 내면화했습니다.


"네 애비 마음이 이렇게 멍들었기 때문"


이라는 할머니의 말은, 결국


"너도 이 멍을 함께 짊어져야 한다"


는 무거운 숙제처럼 아이의 가슴에 박혔습니다. '가슴의 멍은 아직 그대로 인 듯'이라는 현재의 고백은, 그 푸른 멍이 해결되지 않은 채 칠십 년을 이어온 트라우마의 존재를 증명합니다.


3. 금줄이 끊어질 때: 마법적 사고와 원초적 불안

아기의 탄생을 알리는 금줄은 외부의 위험과 '부정(不淨)'으로부터 가족을 지키는 경계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불난 집에 다녀와 '부정을 탔다'는 이유로 금줄이 끊어지고 아기가 사망하자, 어린 화자의 마음속에는 무서운 인과율이 성립됩니다.

이는 '마법적 사고(Magical Thinking)'의 전형입니다. 어린아이는 복잡한 현실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금기를 위반하면 재앙이 닥친다'는 단순하고 무서운 공식을 만들어냅니다. 화자는 자신이 뒷집 친구에게 유세를 부린 것, 아버지가 집을 비운 것 등이 동생의 죽음을 초래했다고 무의식적으로 믿게 됩니다. 이 사고방식은 세상이 예측 불가능하고 불안하며, 자신의 작은 행동이 엄청난 재앙을 불러올 수 있다는 원초적인 죄책감을 평생의 멍으로 남겼습니다. 두 번째 동생이 사망했을 때 금줄의 유무부터 확인했던 행위가 바로 이 불안의 증거입니다.


4. 슬픔을 '처리'하는 반복 강박

현재 약사로서의 삶은 과거의 트라우마를 '반복 강박(Repetition Compulsion)'하는 무의식적인 시도로 해석됩니다. 약 봉투를 찢고 사망을 정리하는 행위는, 어린 시절 통제할 수 없었던 동생들의 상실을 현재의 직업적 환경에서 능동적으로 '처리(정리)'함으로써 통제해 보려는 시도입니다.

그러나 죽음을 마주할 때마다 푸른 멍이 도진다는 것은, 이 강박적인 정리 행위가 실제로 내면의 슬픔을 해소시키지 못하고 미해결 된 트라우마적 정서를 반복적으로 현재로 소환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결국 '할머니의 앞치마'는 한 약사의 깊은 내면을 관통하며, 슬픔을 애도하지 못했던 가족들의 아픔이 어떻게 한 사람의 일생을 관통하는 '푸른 멍'으로 남아있는지 섬세하게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현재의 죽음, 과거의 멍: 약사의 눈으로 다시 만난 아버지의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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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양병원에서 맞이하는 오십 대 암 환자의 사망은 약사에게 일상처럼 주어진 임무입니다. 그러나 화자는 사망자의 약 봉투를 처리하며 "죽음은 늘 낯설다"라고 고백합니다. 이 낯섦은 단순한 직업적 감정이 아니라, 칠십 년 전 여섯 살 어린 화자의 가슴을 짓눌렀던 두 동생의 연이은 상실이라는 원초적인 트라우마의 재현입니다.

현재의 화자는 냉철한 약사로 '죽음을 정리'하고 있지만, 그때마다 그의 마음은 어김없이 할머니의 푸른 앞치마 색깔로 물들어옵니다. 이 푸른 멍은 어린 화자가 목격했던 충격적인 장면, 바로 마당 우물가에 앉아 숨죽여 울던 아버지의 울음과 겹쳐지며 폭발적인 공감을 일으킵니다.

아버지는 가장으로서, 가장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죄책감(불난 집에 간 '부정')과 아들을 지켜내지 못했다는 무력감 때문에 홀로, 그리고 몰래 울어야 했습니다. 그 시절, 슬픔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마저 허락되지 않았던 가족 공동체의 억압된 정서가 '푸른 멍'으로 응축된 것입니다.

약사로서 마주하는 현재의 죽음은, 곧 '마음껏 슬퍼할 수 없었던' 아버지의 과거 슬픔을 현재의 화자가 반복적으로 읽어내고, 대신 애도하는 고독한 의식입니다. 화자는 약 봉투를 찢으며 묻습니다. "이것으로 나는 또 하나의 죽음을 정리하는 것인가?" 그러나 사실 정리되는 것은 바깥의 환자가 아닌, 자신의 가슴에 겹겹이 쌓인 아버지와 가족들의 오래된 멍일 것입니다. 현재의 죽음은 과거의 멍을 쏟아낼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되어, 필자는 매번 깊은 공감과 쓸쓸함 속으로 빠져듭니다.


치유와 잔존하는 멍


작품의 마지막 부분에서 화자는 약사로서의 현재와 과거를 연결합니다.


현재의 죽음과 과거의 죽음

현재의 사망 환자(오십 대 암 환자)의 약을 정리하는 행위는 칠십 년 전 동생들의 죽음이라는 트라우마를 현재 시점에서 다시 경험하고 정리하는 의식(儀式)이 됩니다.


시간과 멍시간은 모든 것을 싣고 떠났지만, 화자의 '가슴의 멍'만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이는 트라우마는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저절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내면화된 채로 존재하며 현재의 정서(쓸쓸함)를 결정하는 핵심 요소임을 보여줍니다.


매미의 울음

미처 못 떠난 매미의 울음은 화자의 내면에 아직 떠나지 못한 과거의 슬픔과 미해결 된 정서가 온몸으로 울어대는 듯한 내적 고통을 상징하며 작품을 마무리합니다.


결론적으로, '할머니의 앞치마'는 어린 시절의 상실 트라우마억압과 반복 강박의 기제를 통해 성인기까지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는 한 약사의 내면 풍경을 '푸른 멍'이라는 강력한 상징을 통해 그려낸 작품으로 정신분석적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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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트로 : 세월을 싣고 떠나보내는 애도


약사이자 목회자의 사모님이신 김기숙 님의 이 수필은 단순히 어린 시절의 회고를 넘어, 오랜 세월 가슴에 품어왔던 푸른 멍, 즉 미처 마무리하지 못한 애도의 기록처럼 다가옵니다.


떠나간 동생들의 몫까지 안고 살아야 했던 어린 날의 죄책감과, 아버지와 어머니, 할머니의 슬픔마저 흡수했던 '할머니의 앞치마'는 곧 사모님 자신의 억눌린 무의식이었을 것입니다. 어린 시절 동생들의 죽음을 마주하면서도 그 멍을 되새기던 시간들은, 어쩌면 하나님께서 사모님을 통해 생명과 죽음의 경계에서 봉사하도록 부르신 섭리 속에 놓여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이제 이 글을 통해 사모님은 비로소 그 무거운 짐들을 세상에 내려놓았습니다. 글로써 칠십 년 묵은 멍의 근원을 정확히 짚어내고, 그 슬픔의 역사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행위 자체가 가장 강력한 치유의 과정입니다.


창밖의 가을처럼, 그리고 미처 떠나지 못한 매미의 마지막 울음처럼, 이제 이 글은 오래도록 가슴에 맴돌던 모든 슬픔과 작별을 고하는 마지막 애도의 노래가 될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 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태복음 11:28)


이 글을 쓰신 후에는 부디, 모든 슬픔과 멍을 주님 앞에 내려놓으시고 참된 안식을 얻으시기를 기도합니다. 시간이 싣고 떠나간 모든 이들의 멍을 주님께서 친히 싸매주시고, 남은 인생은 새롭게 흐르는 평온한 은혜의 세월로 채우시기를 진심으로 축복하며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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