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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앞치마>(3) : 마음의 멍, 애도의 길

지난 두 편의 글에서 요양병원에서의 죽음과 삶의 아이러니를 다룬 단편 '할머니의 앞치마'를 소개했습니다. 오늘의 글은 이 소설을 통해 드러난 화자의 깊은 내면, 특히 그가 짊어진 오랜 우울과 '가슴의 멍'의 근원을 정신분석학적으로 파헤치고자 합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화자의 마지막 고백입니다. "가슴의 멍은 아직 그대로 인 듯..., 하여 여기까지 달고 왔다" 그리고 "내 가슴의 멍이 도진 날, 오늘 아침은 그래서 쓸쓸하다." 일흔이 넘은 약사가 되었음에도 해묵은 슬픔에 갇혀 있는 이유.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멜라니 클라인(Melanie Klein)의 애도(Mourning) 이론을 도입해야 합니다.


1. 애도의 본질: 사랑과 공격성의 '리비도 회수'


클라인은 애도를 단순히 슬퍼하는 행위가 아니라, 죽은 대상에게 투사했던 '리비도(Libido, 삶의 에너지이자 정신적 힘)'를 회수하여 자아(Ego)를 재구성하는 필수적인 심리 과정으로 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그 대상에게는 사랑(Love)의 에너지와 공격성(Aggression)의 에너지가 뒤섞여 투사됩니다. 사랑은 대상을 이상화하고 합일하고자 하는 힘이며, 공격성은 그 대상에 대한 좌절, 분노, 파괴 충동입니다.

문제는 애도할 때 발생합니다. 클라인의 관점에서 애도를 통해 리비도를 회수할 때, 사랑과 공격성은 원초적인 상태로 분리되어 자아에게로 돌아옵니다.


사랑의 리비도 회수: 우리는 대상의 좋았던 부분을 기억하며 슬퍼하고 더 이상 그 좋음을 누릴 수 없게 된 것에 대한 슬픔으로 눈물을 흘림으로써 사랑의 에너지를 온전히 회수합니다. 이 과정이 카타르시스를 낳습니다.

공격성의 리비도 회수: 우리는 대상의 나빴던 부분 혹은 나를 힘들게 했던 대상의 본성 자체를 비난하거나 공격하면서 공격성의 에너지를 회수합니다. 이 공격성이 대상 자체를 파괴하지 않고 건강하게 발산될 때 애도는 완수됩니다.


단편 소설 <할머니의 앞치마> 속 화자의 우울은 바로 이 '리비도 회수 과정의 실패'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화자는 사랑의 리비도를 회수하는 데 그쳤거나, 혹은 가족 전체의 리비도 회수 작업을 떠맡았지만, 가장 중요한 공격성의 리비도를 건강하게 분리하고 해소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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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왜 애도해야 하는가: 현재를 살고, 현실의 타자를 사랑하기 위한 귀환


우리는 상실을 경험했을 때 반드시 애도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만약 이 과정이 실패하거나 멈춘다면, 그 결과는 '만성적인 우울증(Melancholia)'과 현실 응집성의 상실로 나타납니다.


첫째, 현실로 돌아와 삶의 응집성을 회복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잃었을 때, 우리는 그들에게 쏟았던 에너지를 잃어버린 대상과의 관계에 묶어두게 됩니다. 애도를 통해 리비도를 성공적으로 회수해야만, 우리의 자아는 에너지의 공백 없이 현실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화자는 일흔이 넘어 약사가 되었음에도 "가슴의 멍"이 그대로 남아있다고 고백합니다. 이는 그의 삶의 일부 리비도가 여전히 요절한 남동생들이라는 상실의 공간에 갇혀 있음을 의미하며, 이 때문에 현실을 온전히 응집성 있게 살아내지 못하고 늘 쓸쓸함에 시달리는 것입니다.


둘째, 새로운 관계를 맺고 타인을 사랑할 수 있기 위해서입니다.

멜라니 클라인의 이론에 따르면, 사랑하는 연인을 떠나보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에게 쏟았던 리비도를 회수하지 못하면, 그 에너지는 영원히 떠나간 대상에게 예속화됩니다. 이 경우, 새로운 대상(새로운 연인)을 만나더라도 그에게 온전한 사랑의 에너지를 투사할 수 없게 됩니다.

화자는 어린 시절 두 번의 상실을 겪은 후, 스스로를 방어적인 태도로 굳혀 버렸고, 이는 이후의 인간관계 형성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상실한 대상과의 관계에 여전히 얽매여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거나 깊이 신뢰하기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결국 애도는 상실에 대한 헌사가 아니라, 남아있는 삶과 자아에 대한 투자입니다. 화자는 리비도 회수에 실패함으로써 현실을 살아가야 할 에너지를 상실한 과거에 붙잡아 두었고, 이로 인해 오랜 우울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3. 무엇을 애도해야 했는가: ‘금줄’과 ‘멍든 앞치마’의 분열

화자가 애도해야 했던 대상은 표면적으로는 요절한 두 명의 동생이지만, 심층적으로는 '온전한 사랑을 기대했던 유아기적 자기(Self)'와 그 상실을 지켜봐야 했던 무력한 자아입니다.


소설은 두 번의 아기 죽음을 통해 '금줄'과 '멍'이라는 상징물을 제시하며 리비도의 분열 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1) 첫 번째 죽음: 공격성의 억압과 ‘멍’의 투사

첫째 아기의 죽음은 '아버지의 부정(不淨)'이라는 외부 요인(불난 집에 간 것)과 연결됩니다.


아기가 산으로 간 이유는 아버지가 불이 난 집에 갔기 때문


화자는 복잡한 상황을 정리하며 이 결론에 도달합니다. 여기서 '불난 집'은 클라인의 시선에서 파괴 충동, 즉 공격성의 상징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평화로운 사랑의 공간(아들을 낳아 금줄이 걸린 집)에 아버지의 공격성(혹은 불운)이 침투했고, 그 결과 '좋은 대상(아기)'은 '산으로 가버립니다'.


이때 아버지는 숨죽여 울고, 할머니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네 아비 마음이 이렇게 멍들었기 때문."


할머니의 오디 물이 든 앞치마는 마치 멍든 살처럼 퍼랬습니다. 이 순간, 가족 내의 모든 '슬픔'과 '분노'(공격성)는 '멍'이라는 형태로 할머니의 앞치마에 투사되고 포함됩니다. 어린 화자는 이 멍든 앞치마를 자신의 가슴에 문지르며 "어렴풋이나마 내 가슴도 멍들어야 했고 또 들었다는 의미"였다고 회고합니다.


이것이 비극의 시작입니다. 화자는 자신의 공격성(분노, 좌절)을 아버지를 향해 분리하거나 회수하는 대신, 가족의 고통을 함께 짊어지기 위해 그 고통의 상징('멍든 앞치마')을 그대로 자신의 내면으로 '내사(Introjection)'합니다. 회수되어야 할 공격성의 리비도가 '가슴의 멍'이라는 형태로 자아에 박제되어 버린 것입니다.


2) 두 번째 죽음: '좋은 대상' 방어 실패와 자아의 충격

두 번째 아기의 죽음에서 화자는 필사적으로 '좋은 대상(금줄)'을 지키려 합니다.


"나는 금줄을 단단히 지켜야 한다는 각오로 대문을 들며 날며 확인을 했다."


그러나 금줄은 다시 무력하게 사라집니다. 이때 화자가 느끼는 것은 파국적인 충격입니다.


"아! 이래서 가슴에 멍이 드는구나! 이렇게 방망이질을 쳐 대는데 마음엔들 멍이 안 들겠나!"


이 경험은 유아기적 전능감(내가 지키면 된다는 믿음)의 완전한 붕괴를 의미하며, 대상 상실에 대한 충격과 함께 자신이 공격성을 잘 다루지 못해 또다시 좋은 대상을 잃었다는 죄책감을 야기합니다. 클라인이 말하는 '우울적 자리(Depressive Position)'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이 죄책감을 받아들이고 사랑과 공격성을 통합해야 하는데, 화자는 그 과정을 온전히 수행하지 못하고 대신 가족의 애도를 돕는 역할을 선택합니다.


"나는 작은 손으로 엄마 얼굴을 감싸고 옷소매로 눈물을 받았다."


이것은 자신의 슬픔과 공격성을 묻어둔 채, 사랑의 리비도 회수 작업을 엄마에게 양보하거나 대리 수행한 것입니다. 결국 화자는 자신의 고통을 외면함으로써, 회수되어야 할 자신의 리비도를 영원히 '잃어버린 대상(두 아기)'과 '그 대상의 고통을 담는 그릇(엄마, 할머니)'에 묶어두게 됩니다.


4. 왜 우울해졌는가: 애도의 대리 수행과 ‘내재된 박제’


화자가 노년까지 '가슴의 멍'을 달고 사는 이유, 즉 우울해진 근본적인 이유는 애도 과정을 타인에게 위임하고 자신의 리비도를 온전히 회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작 화자는 나의 두 편의 글을 읽고,


"이 소설을 쓸 때도 울지 않았는데, 두 편의 글을 읽고 울었다."


고 고백했다. 다행히도 애도가 시작된 것입니다. 이 울음을 다 울 때까지 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클라인의 관점에서 건강한 애도는 상실된 대상의 좋은 이미지나쁜 이미지를 재통합하는 과정입니다. 상실된 대상이 완벽하지 않았음을 인정하고, 자신의 공격성(분노, 파괴 충동) 때문에 대상이 사라진 것이 아님을 깨달으면서, 스스로의 자아를 견고하게 만듭니다.


소설 속 애도의 실패

하지만 화자의 애도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실패했습니다.


공격성의 회수 실패 (→ 멍): 화자는 아버지에게 '불난 집으로 간 것'에 대한 원망, 할머니에게 '금줄을 끊은 것'에 대한 분노, 심지어는 아무도 지키지 못한 상황에 대한 공격성을 자신에게 돌렸습니다. 회수되어 건강하게 발산되어야 할 공격성 리비도는 '멍'이라는 형태로 자아에 내재되어, 무력감과 만성적인 슬픔(우울)으로 남았습니다.


사랑의 리비도 대리 수행 (→ 자기 상실): 화자는 자신의 눈물이 아닌, 엄마의 눈물을 닦아주는 행위를 통해 애도의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이는 자신의 슬픔을 억압하고, 오직 '좋은 아이'로서 어머니를 위로하는 데 리비도를 소진한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고통을 돌보지 못한 결과, 리비도의 온전한 회복과 자아의 성숙이 지연되었습니다.


내재된 '멍든 대상'의 영속화: 화자는 할머니의 '멍든 앞치마'를 내사함으로써, 자신의 내면에 '늘 고통받고 멍들어 있는 대상(Self)'을 만들었습니다. 이 박제된 '멍'은 시간이 흘러


"가슴에는 할머니 앞치마 같은 푸른 멍을 단 채 학교에 다녔다"


라고 묘사되듯, 화자의 정체성 일부가 되어버렸습니다. 시간이 지나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가셨지만, 이 '멍든 대상'은 여전히 화자의 가슴속에 남아 그의 삶의 활력을 갉아먹는 우울의 근원이 된 것입니다.



5. 화자가 취해야 할 애도 방법: 통합과 치유의 길


소설의 화자, 이제 노년의 약사가 된 그가 오랜 우울에서 벗어나기 위해 취해야 할 애도 방법은 명확합니다. 그것은 과거로 돌아가 잃어버린 두 유아의 죽음을 애도하고, 그 과정에서 억압했던 자신의 공격성과 슬픔을 해소하며, 끝내 내면에 박제된 '멍든 앞치마'를 통합하는 것입니다.


1) 잃어버린 대상과의 재접촉 (사랑 리비도 회수):

화자는 남동생들을 '이상화된 '좋은 대상'으로만 기억하는 대신, 그들이 자신에게 주었을 기쁨과 상실의 고통을 온전히 다시 느껴야 합니다. '작은 손으로 엄마의 눈물을 받던' 어린아이가 아니라, '동생을 잃고 슬퍼했던' 여섯 살의 자신으로서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사랑의 리비도는 오직 자신의 고유한 슬픔과 눈물을 통해서만 온전히 회수됩니다.


2) 공격성의 분리 및 정화 (공격성 리비도 회수):

화자는 분노를 허용해야 합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라는 결론 뒤에 숨겨두었던 유아기적 분노를 인정해야 합니다. 그 분노는 아버지의 '부정'에 대한 것일 수도 있고, 할머니에게 '금줄을 끊은 것'에 대한 원망일 수도 있으며,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전능함에도 불구하고 대상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기에 대한 공격성일 수 있습니다.

이 공격성을 대상의 '나쁜 부분'을 공격하며 해소해야 합니다. 여기서 대상의 '나쁜 부분'이란 상실의 고통을 의미합니다. 화자는 "가슴이 마구 방망이질 쳤"던 고통을 정면으로 공격하며, 그 고통이 자신의 파괴 충동 때문이 아니라 삶의 필연적인 비극이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공격성을 건강하게 발산하는 것은 우울을 치유하는 가장 중요한 단계입니다.


3) ‘멍든 앞치마’의 통합:

할머니의 앞치마는 사랑과 고통, 치유와 멍이 뒤섞인 모성(母性)의 상징입니다. 화자는 이 앞치마를 더 이상 '내 대신 멍들어준 대상'으로 내사에 박제할 것이 아니라, '고통을 감내하고 버텨낸 성숙한 어머니'의 상징으로 통합해야 합니다. 자신의 가슴의 멍은 이제 '오랜 세월을 버텨낸 용기'의 훈장으로 재해석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재통합의 과정이야말로 멜라니 클라인이 말한 애도 과정의 완수이며, 화자를 영원히 어린아이의 슬픔 속에 가두었던 '우울 자리(Depressive Position)'의 병리적 덫에서 벗어나게 할 유일한 길입니다.


작가 김기숙과 '할머니의 앞치마': 우울의 깊이가 낳은 성취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소설 '할머니의 앞치마'는 단순한 회고를 넘어선 심리적 깊이를 담고 있습니다. 이러한 깊이는 작가 김기숙 선생님의 특별한 배경과 맞물려 더욱 의미를 갖습니다.


문학적 성취: 김기숙 작가는 이 작품으로 '2025 제12회 이가탄 한국약사문학상' 대상을 수상했습니다. 주목할 점은 그녀가 전문 소설가가 아니라 약사라는 직업을 가진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우울의 성취: 그녀가 이토록 섬세하고 깊이 있는 내면의 글을 써낼 수 있었던 힘은 바로 평생 동안 두 동생의 죽음을 깊이 간직하고 살아온 경험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멜라니 클라인의 이론을 통해 우리가 분석했듯이, 화자가 겪은 '가슴의 멍'과 만성적인 '우울'은 단순히 고통으로만 남지 않았습니다.



우울의 깊이가 낳은 통찰

클라인의 관점에서 애도가 실패하고 리비도가 상실된 대상에 묶여 우울의 상태에 머무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이는 동시에 내면의 대상을 끊임없이 탐색하고 돌보는 작업이 됩니다.


지속적인 내면 작업: 화자(작가)는 현실로 완전히 복귀하지 못하고 상실된 대상과의 관계에 얽매여 있었기 때문에, 그 깊은 슬픔과 분노, 죄책감의 감정들을 평생에 걸쳐 곱씹고 분석하는 일종의 **'정신분석적 작업'**을 스스로 해왔습니다.


경험의 문학화: 이러한 우울의 깊이로 내려가는 작업은 곧 작가에게 인간 존재의 근원적 고통과 상실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선물했습니다. 약사로서 매일 죽음 가까이에 있는 환자들을 대하는 현실과 맞물려, 그 내면의 경험이 응축되어 문학적 언어로 승화된 것입니다.


김기숙 작가가 전문 소설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대상을 수상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삶의 가장 깊은 우울과 상실의 경험을 외면하지 않고 평생 간직해 온 일종의 성취물이 바로 이 작품 '할머니의 앞치마'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러한 배경을 염두에 두고 그녀의 글을 다시 읽는다면, 문학적 가치뿐만 아니라 한 인간이 우울이라는 깊은 심연을 어떻게 통찰과 성찰의 자원으로 바꿀 수 있었는지에 대한 또 다른 깨달음을 얻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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맺음말: 애도는 멈추지 않는 삶의 숙제


'할머니의 앞치마'는 죽음 앞에서 우리 모두가 겪는 근원적인 고통을 응축한 작품입니다. 화자의 "가슴의 멍"은 단순히 한 개인의 슬픔이 아니라, 애도하지 못한 채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마음속 우울을 대변합니다.


화자가 '내 가슴의 멍이 도진 날'을 인정하고, 그 멍 속에 갇혀 있던 억압된 분노와 슬픔을 분리하여 건강하게 회수할 때, 비로소 그는 노년의 쓸쓸함을 넘어선 평안한 삶을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애도는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리비도를 회수하는 동시에, 자기 자신에게 삶의 에너지를 다시 돌려주는 가장 숭고한 행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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