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을 정당화하는 능력주의
한국 사회 또는 교육의 문제점을 묘사하며 자주 등장하는 말이 “개천에서 용이 못 난다”라는 것이다. 2019년 문재인 대통령은 신년사에서 “개천에서 용이 나는 사회를 만들자”라고 언급하기도 했고, 언론 기사에서도 흔하게 등장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이런 말에 담긴 문제의식은 요컨대, 곧 사회·경제적 하층인 배경에서도 개인의 노력과 능력을 통해 계급 상승을 이룰 수 있어야만 하는데, 이제는 이러한 계급 상승을 이루기가 어렵게 됐다는 것이다. 소위 ‘기회의 평등’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뜻이며, 열심히 하면 성공할 수 있을 거란 희망이 희박해지고 있다는 뜻이다. 학교교육과 입시 과정에서 잘사는 가정이 더 유리하다는 조사 결과가 속속 나오고 있고, 소득은 양극화되며 부동산 등 자본을 가진 사람들이 더 쉽게 이득을 취하는 현실을 볼 때 딱히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데 그럼 과연 ‘개천에서 용 나던 시대’는 어땠을까. 물론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성공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을 것이고, 좀 더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이른바 ‘명문대’에 들어가고 고소득을 보장받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도 분명 ‘용이 못 된’ 이들이 훨씬 더 많았으리라.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용이 될 수 있을지 없을지를 가리기 위해서 수많은 청소년들이 경쟁에 내몰렸을 터이다. 용이 된 사례들이 조명받을수록 경쟁은 치열해지고 밀려난 사람들은 보이지 않게 된다. 말하자면 ‘개천에서 용 나던 시대’란, 모두에게 원치 않아도 경쟁에 뛰어들라고 등 떠밀고 ‘등용문’을 노리는 법만 가르친 시대였던 것은 아니었을까. 노력하면 개천을 벗어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에, 정작 개천의 부조리나 열악한 상황은 고쳐지지 않았고, 용이 되지 못한 사람들의 고통은 지워졌던 것은 아니었을까.
개천에서 용이 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배경에는 ‘능력주의’ 이데올로기가 있다. 능력주의는 개인의 능력과 노력에 따라서 차별받는 것은 정당하고 필요하다는 믿음이다. 배경이나 환경이 열악하더라도 개인이 재능 있고 노력한다면 용이 되어 승천할 수 있어야 하며 그런 기회가 확대되는 것이 곧 평등이자 공정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러한 능력주의의 이념은 비현실적이고 불합리한 면이 많다. 일단 능력은 온전히 개인에게 속하는 고유한 성질이 아니다. 어떤 능력을 유용하다고 평가하고 우대하는지 그 기준은 사회적 가치관과 제도, 상황에 달려 있다. 기준이 사회적 편견이나 차별에 좌우되기도 한다. 애초에 능력을 발휘하거나 노력을 할 수 있는 여건은 모두에게 동등한 것이 아니다. 게다가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는지’에만 초점을 맞추면 누군가는 처음부터 바다나 큰 강에서 태어나 더 쉽게 용이 된다는 사실에는 신경 쓰지 않게 된다. 이는 결과적으로 더 열악한 여건에 있는 사람들에게 더 열심히 노력해서 자기 능력을 입증하라고 더 가혹한 요구를 하는 것이 될 위험이 있다.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은, 경쟁 체제와 그 결과 주어지는 차별에 순응하게 한다. 학교교육과 입시가 ‘개천에서 몇몇 용이 나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는 전제 아래에서는 교육의 목적도 ‘경쟁에서 이겨 성공하는 것’이 되어 버린다. 교육 제도가 모든 사람을 위해 교육의 기본 이념에 맞게 제대로 된 교육을 실현하고 있는지는 묻지 않게 되고, 경쟁의 공정성과 결과에 관심이 집중된다. 개천에서 용 나는 교육을 바라는 것이 교육은 실종되고 경쟁만 남게 만드는 것이다.
또한 능력주의는 차별을 정당화하는 논리이다. ‘용’의 신화, 몇몇 성공의 사례들은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이 겪을 불이익과 차별을 그들 자신의 탓으로 돌리며 잠자코 받아들이게 하는 이유가 된다. 개천과 바다를 나누고 용이 된 자만 박수와 보상을 받는 차별과 승자독식의 시스템은 문제가 되지 않으며, 오직 개개인이 충분한 능력과 노력으로 용이 되었는지만 문제가 된다. 경쟁 교육, 학력·학벌주의 등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조차 먼저 성적과 학력을 물으며 말할 자격이 되는지 따지는 것도 그 한 단면이다. 용이 못 된 이의 비판은, 충분한 능력을 갖추지 못한 주제에 세상을 탓하는 것이라고 무시당한다. 사회에 의해 차별받고 피해를 입는 이들이야말로 사회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옳은데도 말이다.
따라서 ‘개천에서 용 나는 사회’를 만들자는 것, ‘과거에는 개인의 능력과 노력으로 성공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어렵다’, ‘출세할 수 있는 기회의 평등을 보장해야 한다’는 문제의식만으로는 부족하다. 이는 사회의 차별과 불행을 재생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개천에서 용 나는’ 모델을 버리지 않는 한 지금의 과도한 학력·학벌 임금 격차와 정규직·비정규직 차별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 모델은 본질적으로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것과 다를 바 없으며, 출세하지 못한 채 개천에서 살아가야 하는 다수 미꾸라지들에게 불필요한 열패감을 안겨 주면서 그들을 불행의 수렁으로 밀어 넣는 게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 강준만, 〈‘개천에서 용 나는’ 모델〉, 〈한겨레〉, 2015년 3월 8일.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라고 하면서 시스템을 개혁하지 않은 것이 어쩌면 차별을 누적시켜 양극화를 만들어 내고 ‘개천’을 ‘시궁창’으로 만든 하나의 원인일 수도 있다. 능력주의의 결과 차별이 정당화되고 지역과 계층 등에 따라 격차가 점점 벌어질수록 개인의 출발선과 여건의 차이가 커지게 되며, ‘개천에서 용 나는 사회’도 점점 멀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성공의 기회와 가능성을 늘리려고 하는 것보다는, 개천에서의 삶을 보편적으로 개선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자신의 출신에 상관없이 노력과 능력을 통해 더 쉽게 성공할 수 있는 사회가 더 좋은 사회라는 것에는 당연히 동의한다. 그러나 모두가 ‘용’이 되어야만 하는 사회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미꾸라지, 송사리, 개구리, 붕어, 메기 등 다양한 삶이 있는 것이 자연스럽고, 그들 모두가 나름대로의 모습으로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어야 한다. 지금 와서 다시 ‘개천에서 용 나는 사회’를 부활시키는 것이 과연 가능할지도 의심스럽지만, 그건 애당초 잘못된 해결 방향이기도 하다. 경쟁이 목표가 된 교육 제도를 바꾸고, 복지 제도나 부의 분배를 강화하여 불평등과 격차를 줄이면서 ‘용이 안 돼도 괜찮은 사회’를 만들어 갈 방법, 그것이 우리 사회가 찾아야 할 길일 것이다.
2020년 3월 발간한 《유예된 존재들 - 청소년인권의 도전》에 실었던 글이다. 이번에 《능력주의와 불평등 - 능력에 따른 차별은 공정하다는 믿음에 대하여》에 공저자이자 편집자로 역할을 했는데, 관련해서 능력주의 비판 논의를 쓴 글을 다시 끌올해 본다. 참고로 이 글의 초고는 〈전북일보〉에 2015년 1월 썼던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