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과 나무로 빚는 에세이
버섯이 아니었다면 그냥 지나칠 뻔했다. 민달팽이가 버섯을 시식 중이다. 가을 낙엽이 수북히 쌓인 후, 며칠 비가 오니 하얀 버섯이 탐스럽게 올라왔다. 민달팽이는 보통 해 질 무렵이 되어서야 기어 나오는데 대낮에 나온 걸 보니 꽤 식탐이 많은 녀석인가보다. 버섯을 잘 모르는 나는 그게 다 그거 같아서 마트에서 포장지 위에 쓰인 이름을 보고서야 그런 건가 보다 하는데, 버섯을 좋아하는 민달팽이는 틀림없이 나보다는 훨씬 수준이 높을 것이다. 대낮에 겁도 없이 버섯 지붕까지 기어 올라가서 “나 여기 있어요”하고 깃발을 꽂을 정도면, 이 하얀 버섯은 정말 맛이 좋은 종류인가보다.
달팽이의 트레이드마크는 집인데, 민달팽이는 집이 없어 그런 이름이 붙었다. 원래부터 집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있던 집은 일찌감치 퇴화하여 피부를 보호하는 외투 정도가 된 것이다. 얘는 왜 집을 포기했을까? 성격상 집을 메고 다니는 게 무겁고 거추장스러웠을까? 그 이유라면 나도 충분히 이해된다. 나도 몸에 뭐를 걸치는 게 싫어서 시계를 차거나 반지를 끼고 다니지 않기 때문이다. 들고 다니는 물건의 우선순위도 가벼움이다 보니 가죽보다는 천 가방, 최신 기술을 몽땅 넣은 무거운 휴대폰보다는 무게도 가볍고 가격도 가벼운 휴대폰을 택한다.
그게 아니면 호기심이 유독 많은 달팽이였을 수도 있겠다. 집을 메고 들어갈 수 없는 좁은 틈바구니를 엿보고 있다가 너무 재밌어서 집을 버리고 그 속으로 들어갔겠지. 아기자기한 좁은 골목길을 다니며 맛집을 탐방하는 미식가였거나, 골목 벽화 보는 재미에 빠진 예술가로 살았을 수도 있겠다.
그것도 아니면 집 안 청소가 너무 귀찮았을까? 세상의 온갖 먼지는 모두 집으로 들어오는 듯하니, 그 달팽이의 집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아무리 해도 티가 나지 않는 집안일이란 며칠만 안 하면 금방 티가 나는 법이니, 세상에서 청소하기를 가장 싫어했던 달팽이는 점점 더러워지는 집을 더 이상 참지 못했을 것이다. 자기 방이 너무 지저분하다고 잠은 거실로 나와서 자는 우리 집 누구처럼 말이다.
늦더위가 기승을 부린 올해, 낮에 주로 다니던 산책을 밤에 하였다. 9월, 여전히 30도가 넘나드는 밤이었지만, 피부에 화살처럼 꽂히는 햇빛의 강렬함도 없고, 운이 좋으면 시원한 바람도 간간이 맛볼 수 있었다. 그날도 그런 걸 기대하고 밤 산책을 나섰다. 그러나 집 밖을 나선 지 얼마 안 되어 공기는 무거웠고, 보이지 않는 찜통 속에 들어온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불길한 예감은 맞을 때가 많다. 갑자기 후드득, 굵고 긴 비가 쏟아지지 시작했다. 비는 창문을 때리듯 내 등짝과 허벅지를 때렸다. 왜 이런 비를 두고 “장대” 같다고 하는지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굵기도 굵었지만 긴 막대기로 온몸을 얻어맞는 느낌이다. 안경 아래로 흐르는 물은 앞을 가렸고, 삽시간에 불어난 물은 발목까지 차올랐다.
처음에는 오랜만에 느껴보는 낭만 정도로 가볍게 생각했으나, 발걸음이 무거워지자 더 이상 장난이 아님을 감지했다. 그렇게 저벅저벅, 영화 <쇼생크 탈출>을 연상하며 30여 분을 걸었다. 다리에 힘이 빠지기 시작하더니, 뭔가 처량하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구석구석 먼지처럼 쌓여있었던 감정의 부산물들이 올라왔다. 이럴 때 엉엉 울면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겠지? 정말로 이렇게 올라오는 찌꺼기를 빗물과 함께 씻겨 내보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서럽고 우울한 감정이 올라왔다.
집에 도착하여 물이 뚝뚝 떨어지는 손으로 현관문을 열었다. 물속에 빠졌다 나온 생쥐처럼 온몸에서 물이 떨어졌다. 잠시 고개를 숙이고 흥건해지는 현관 바닥을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순간, 갑작스레 행복감이 밀려든다. 나에게 비를 피할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이렇게 깊고 깊은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니. 그 순간을 기억의 앨범 속에 끼워 넣고 싶었다. 언젠가 내 삶이 불편해지고 나락으로 떨어지는 절망을 느낄 때, 꼭 꺼내 보리라 생각했다.
요즘, 집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즐겨 보고 있다. 예전 같으면 방송 시간을 놓쳐 보지 못했을 주옥같은 프로그램들을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볼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도시 한복판 자투리땅 위에 지어진 보금자리부터, 배산임수쯤 되어 보이는 한적한 시골에 지어진 전원주택에 이르기까지 장소도 다양하다. 창문을 아예 내지 않은 5평짜리 통나무집부터, 돈을 꽤 들였을 만한 거대한 빌딩 같은 집까지 형태도 가지각색이다. 대리만족일까? 아니면 미래를 위한 정보 수집일까? “아, 나도 한번 저런 집을 지어보고 싶다.”라는 말이 슬금슬금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다. 한편, 실패한 집짓기와 실패한 귀농인 등 실패 시리즈를 주제로 방송을 하는 유튜버들도 있다. 이들이 소개하는 사례도 가지각색이다. 집을 지을 수 없는 땅을 사고, 건축비 부풀리기에 당하고, 마을 원주민들에게 미움을 사서 쫓겨 나가고, 농사 기술이 없어 농사를 망치고, 하자투성이의 집 때문에 퇴직금을 날리는 등, 온갖 실패담이 쏟아진다. 이런 걸 보다 보면, 땅을 사서 집 짓고 살고 싶은 마음이 쑥 들어간다.
잠시 버섯을 맛있게 먹고 있는 민달팽이를 보면서,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그렇지 않아도 골치 아픈 일이 많은 세상에, 집 문제라도 훌훌 털어버리고 살고 싶었던 것일까? 그도 분명 자기 몸에 딱 맞고 언제 어디서든 비를 피할 수 있는, 행복한 집을 갖고 싶었을 텐데, 누구에게 사기라도 당하고, 골치 아픈 영역 싸움이라도 한 것일까? 아니면, 그 모든 욕망을 버리고 ‘내가 있는 곳은 어디든 집이고, 비를 피할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행복하다,’라는, 평범한 달팽이라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수준의 높은 경지에 오른 것일까? 물어봐도 아무 답이 없었다. 맛있는 식사 중이라 바쁜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