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권정환 Feb 09. 2023

나에게서 너를, 너에게서 나를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돌이켜 보면 그녀는 폴이기도 때로는 로제이기도 했지만, 나는 그녀가 폴일 때 시몽에 그녀가 로제일 때 폴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그녀와 나는 서로 좋아하는 요소들을 가지고 있었고 서로에게 끌렸고 그녀에겐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나에겐 너무나도 운명적이게 서로를 연인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나를 알기 전부터 그녀가 하고 싶은 것이 명확했던 사람이었기에 나라는 브람스, 그녀에겐 자기 자신 이외의 것, 자기 생활 너머의 것을 사랑하거나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나는 시몽처럼 폴이라는 그녀에 의해 [그녀가 원하든 원치않든] 변하게 되었고, 그렇게 변한 내 모습이 낯설어도 크게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그런 내 모습이 어딘가 맘에 들지 않았던 것 같다.

우리가 알게 된지도 만난지도 얼마 되지 않았기에 서로 맞춰가는 과정이라 그녀는 말했지만, 그녀는 그녀가 원하는 대로 나를 고치려 했고 나는 그녀에게 맞추고 싶었고 그녀가 원하는대로 고쳐지려 노력했다.


그녀가 내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들은 금방 고칠 수 있었지만 그녀가 내게 원했던 것 중에는 내 의지로만 되지 않은 것들이, 시간이 필요한 것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에 의해 점점 그녀가 좋아해주었던 이전의 모습을 잃어가던 내게는 그녀가 원하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져갔다.


나와는 반대로 그녀는 로제처럼 폴에 의해 본인이 바뀌게 되는 것을 싫어했고, 나로 인해 그녀가 맛봐오던 사는 맛을 잃어버리는 것을 원치 않았다.


상대를 자기 자신만큼 소중히 여기는 건 폴과 나의 경우지. 하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사는 맛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녀는 내가 아닌 사람에 의해 받은 상처에 대한 보상을 나에게 요구했다.

그녀는 로제처럼, 폴인 나에게 믿음과 신뢰를 주지 않은 채 내게는 자신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과 신뢰를 강요했다.

     

나는 시몽처럼 나보다 폴이라는 그녀를 더 좋아했기 때문에 미뤄 두었던 나를 위한 것들을 그녀를 위해 하기 시작했다. 그녀도 언젠가 다른 사람에 의해 굳게 닫혔던 마음을 열겠지,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언젠가 그녀가 내게 들어온 것처럼 나도 그녀의 삶에 언젠가 천천히 또 깊이 스며들 수 있겠지라는 보상심리가 있었는데, 그런 보상심리에 대한 기대가 무너지는 일이 반복되자, 나는 그녀의 주변인들을 질투하게 되었다.

      

나는 내 질투의 이유를 로제를 기다리는 폴처럼, 그녀[로제]를 기다리고 있는 내 마음은 생각하지 않은 채, 다른 사람의 존재는 너무도 아무렇지 않게 드러냈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그날 나는 처음으로 그런 그녀에게 화가 난다고, 당신의 그런 행동은 나에 대한 배려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말했다.

     

그녀는 내게 더 이상 그러지 않겠다 말했지만, 그 일에 대해 미안하다거나 자신이 나에 대한 배려가 부족했던 것 같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대신 내가 화내는 일에 대해서 언젠가는 함께 이야기해야 하는 부분이지만 지금 당장 그건 내가 관여할 일은 아니라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지금 그녀에게 내가 어떤 자리에 위치하고 있는 사람인지 말해주었다.


그녀는 이전에도 모질고 날카로운 말들을 내게 쏟아낸 뒤 잠들기 전에  '내가 항상 밉게 말해도 나를 감싸주어서 고마워'라고 말하곤 했는데 그녀가 '내가 항상 밉게 말해도' 라고 말했다는 건, 그녀 자신도 내게 하는 말들이 모질다는 것을 스스로 인식하고 있다는 뜻이지 않을까 싶었다.

내가 처음으로 그녀에게 화냈던 그날도 그녀의 말들은 내가 끌어안을 수 없었던 아픈 말들이었다.

그날도 그녀의 모진 말들을 감싸 안지 못한 이유는 어쩌면 이전까지 그녀의 가시 돋힌 말들에 찔린 상처가 미처 아물지 않았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확실한 건, 그날 그녀 안에 내가 있을 수 있는 공간은 내겐 너무 좁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점이다.

내가 그녀와 연인이라는 사실을 나만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조차 그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다.

나는 그녀와 만나고 있지만 외로웠다.


다른 사람들이 그녀 주위에서 뚜렷하게 존재하고있는 것에 화나고 질투 난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녀 안에서의 나의 존재가 희미하다는 것에 대한 속상함이 내 질투의 본질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꽤나 시간이 지나고 나서이다.


언젠가 그녀의 집에서 주말을 함께 보내게 된 날, 그녀가 이제 그만 씻고 자야겠다며 욕실로 내려가며 내게 물어본 질문이 있었다. 나는 그녀가 씻고 돌아오면 대답해 주겠다고 했지만, 그녀가 씻고 돌아왔을 때 그 질문에 대해 우리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나는 당시에 그녀가 욕실에 있는 동안 그녀가 내게 물어봤던 질문에 대한 답에 대해 생각해 보아도 그 이유에 대해서 명확하게 설명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그녀가 돌아왔음에도 그 질문을 굳이 꺼내지 않았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질문에 대한 답 또한 그녀 안에서 나라는 존재를 찾고 싶었기 때문인 것 같다.

.

.

그녀와 이별하게 된 날 밤,

그녀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녀에게서 작지만 또렷하게 내 존재를 찾을 수 있는 글을 썼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 제일 좋아하는 건축가가 누구예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