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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맹 Aug 09. 2024

반백살의 레고놀이

겁나게 비생산적인 일로 휴가 모드 돌입

가만히 있으면, 누워서 그 좋아하는 쇼츠로 시간을 펑펑 낭비하면 휴가모드로 저절로 돌입할 줄 알았다. 그런데 웬걸, 누워서 팔 뻗어 핸드폰으로 쇼츠를 보려면 엄지손으로 피드를 넘겨야 하는데 엄지손을 다쳐서 반창고를 둘러 그것이 안되고, 팔도 아프다. 그래서 옆으로 누워서 보자니 목이 당기고 어깨가 눌린다. 어쩔꼬? 그냥 누워 자빠져서 쉬려고 하는데도 여기저기 아파서 쉬어지지가 않는다. 자세를 이리 바꾸고 저리 바꾸어도 마찬가지, 이렇게 누우면 여기가 아프고 저렇게 누우면 저기가 아프다.


허리를 곧추세우고 바른 자세로 앉으면 다리를 꼬아야만 편하고, 다리 꼬는 것이 안 좋다 해서 멋진 자세로 앉으면 10분도 안 돼서 꼬부랑 할머니처럼 무너진다. 대체 이게 무신 재앙이냐. 앞으로 반세기는 더 살게 될 터인데 벌써 앉아도 힘들고 누워도 괴롭고...


신기한 것은 서 있을 때는 괜찮다는 것, 걸어 다닐 때는 멀쩡하다는 것이다. 이게 웬 괘변이지?


8월 1일부터 8일까지 딱 7일간 걷기도 해 보고 운동도 시작해 보며, 지난 몇 개월간 한 번도 시도 안 해보던 “몸뚱이를 위한 일들”을 이것저것 시도해 보았다. 그. 결. 과. 삭신이 더 쑤시게 되었다. 안 움직이다가 갑자기 근육을 만든다며 몸의 구석구석을 자극했더니 내 몸 안의 세포들이 데모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뭐 하다가 이제야 난리냐고. 여기저기 쑤시고 아팠지만 이것이 다 잠자고 있는 근육들을 깨우는 과정이라 위안하며 견뎠다. 그 잔고통들을 견뎌가며 일주일이 지난 오늘 지난 50년간 한 번도 못 느꼈던 아픔과 피곤함에 서러워졌다.

누워 있어도 힘들고 앉아 있어도 힘들지만 서있으면 멀쩡한(?) 요상한 나의 몸 컨디션을 이용해서 집안에 있는 아이들의 레고를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미친 짓이었다. 깔끔하게 인정한다). 하고 많은 생산적인 일들을 다 제치고 무식하게 돌입한 방학 프로젝트!


장성한 우리 아이들의 레고를 여태껏 버리지 않았던 이유는 조카가 생기면 물려주고자 했기 때문인데 커다란 상자 속에 수십, 아니 거의 백가지에 가까운 크고 작은 레고들이 얼기설기 다 섞여 있다. 이렇게 물려주면 조카는 매뉴얼 데로 조립할 수 없을 것 같아 이왕이면 분류를 잘해서 (매뉴얼은 잘 챙겨 놨는디 상자는 버리고 다 섞어놨다. 왜 그랬을까…) 물려주고 싶었다. 게다가 4명의 조카가 몽땅 아들내미로 탄생하면서 분류를 해야 함이 더 선명해졌다. 과거의 레고는 여아용 남아용이 따로 있었고 - 지금도 그러려나? 여아는 레고 프렌즈 시리즈) 물론 다 섞어서 놀아도 문제는 없지만 이왕이면 시리즈별로 분리해서 주면 받을 때 더 잘 놀 테니…


뭐 이런 각오로 반백살의 이모는 레고 분리 작업에 들어갔다. 처음에는 이 어마 무시한 것들이 분류가 제대로 되지 않아서 크기로 나눴다가, 모양으로 나눴다가, 색깔로 나눴다가 난리 난리 쳤다. 이 단순한 작업을 하면서 너무나 놀란 것은 시간이 그냥 마구마구 흘러가는 것이었다. 멈출 수가 없었다. 화장실도 갈 수 없었다. 마지막 하나의 파란 부속품들을 다 모으기 전까지...

몇 날 며칠 분류의 분류를 거쳐 대충 색깔별로 크기 별로 나누어 놨는데 마지막 복병은 모양이 일정하지 않은 조각들이었다. 이것들을 한 상자에 넣기에는 너무 테마가 천차만별이라 나중에 찾을 때 애먹을 것이고 어쩌나... 분류에 분류를 거듭해서 사람과 관련된 조각들, 여자레고 (레고 프렌즈) 사람과 관련된 조각들, 그리고 반짝이는 조각들, 스티커가 있는 조각들, 액세서리 조각들, 그 외 용도별(음식, 화장품, 동물, 식물...)로 나누다 보니 내 안에 잠자고 있던 편집증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평소에 이런 일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업무를 하면서도 수박 겉핡기 식으로 분류작업을 하는 편인데 레고 분류 작업에 잘못 꽂혀버린 것이다.

아 난 미친것이 분명하다. 왜 시작했을까… 계속 같은 자세로 작업하니 아픈 몸이 더 아파지기 시작했는데 너무 재미있어서 멈출 수가 없다.


멍하니 생각 없이 분류작업을 하고 나면 한 시간 두 시간이 훌쩍 지나가고 저녁밥을 먹을 시간이 다가왔다. 대체 내가 뭘 하고 있는 것인가. 이 일을 하고 나니 책도 읽기 싫고 그나마 조금씩 하"려"던 독일어 공부도 뒷전으로 밀렸다. 생산적인 모든 일들이 재미없어지고 비생산의 극치인 레고 부품 분류작업에 꽂혀 버렸다. 앉아서 하면 힘드니까 부엌 한 편에 아예 스테이션을 꾸며놓고 왔다 갔다 하면서 분류작업 중이다.


고등학교를 갓졸업한 딸내미가 가끔 왔다 갔다 내 작업을 보면서 코치를 해준다. "엄마 이거는 비누조각이니까 코스메틱이야, 엄마 이건 별이 아니라 불가사리야..." 그리고는 지나가면서 한 두 개의 부품을 해당 박스에 슬쩍 넣어주면서 분류작업에 동참한다. 딸한테 관심받는 게 너무 좋아서 작업에 불이 붙어서 멈출 수가 없다.


아... 왜 이러나... 살짝 내가 한심하게 느껴지다가도 이런 손작업을 통해서 드디어 일중독에서 벗어나(다른 일중독으로 빠지)는것 같아 안심이(?) 되기도 한다.


환승중독이로다!


이 정도의 노동력을 들여야만 학교일의 때에서 벗어날 수 있나?  근데 잔뜩 사놓은 책도 있는데 거긴 관심도 가지 않는다. 성시경은 밤에 술 먹고 늦게 들어와도 자기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꼭 한시간씩

일어 공부를 하고 잤다던데, 술도 먹지 아니하고, 할 일없어 빈둥거리면서 왜 독일어 공부는, 왜, 또 안 하는 건데... 여러 가지 의문이 들기는 하지만... 앞으로도 몇 주간은 이 짓을 할 것 같다. 모든 분리가 완벽하게 되고, 한 개씩 레고 시리즈를 완성하면서 방학을 보내지 싶다.


쉰 살의 방학이 이렇게 청개구리처럼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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