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 웹툰 번역으로 확장된 언어 교육
본 수업은 루르 보훔 대학교 한국어과가 제주문화진흥원의 작품을 받아서 기획한 산학협력형 번역 프로젝트이다. 우리는 제주문화진흥원을 통해 실제로 웹툰 작가들이 출간 전 준비 중인 원고를 직접 제공받아, 학생들이 날것 그대로의 텍스트를 작업하도록 하였다. 이 작품은 아직 세상에 발표되지 않은, 말 그대로 창작의 현장에서 방금 건져올린 원고였다. 학생들은 이 원고를 독일어로 번역하며, 번역자이자 독자이자 평론가로서 텍스트를 마주했다. 특히 수업 마지막에는 학생들이 팀별로 작업한 번역본을 바탕으로 작가에게 팬레터 형식의 질문지를 보내고, 실제로 작가들로부터 정성스러운 답장을 받는 경험까지 하며 수업이 완결되었다. 작가가 직접 전달한 메시지는 학생들에게 커다란 동기와 감동이 되었고, 웹툰이라는 장르와 번역이라는 행위 모두에 대해 깊은 애정을 품게 해주었다.
이 수업은 단지 언어를 가르치는 수업이 아니다. 학생들이 살아있는 텍스트를 해석하고, 감정과 문화를 재현하며, 협업을 통해 언어 너머의 세상을 구축해가는 과정 그 자체였다. 그것은 바로 ‘21세기 언어교육’의 핵심, 즉 메타번역과 문화적 해석 능력을 함께 기르는 실천의 장이었다.
1. 번역의 시작: 이해의 혼란에서 감정의 이입까지
웹툰 번역 프로젝트의 출발점은 언제나 ‘이해’다. 그러나 이 ‘이해’는 단지 단어를 아는 것 이상의 것이었다. 초반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정체를 오해한 채 번역을 진행하다가 후반의 반전 장면에서야 상황을 재구성하게 된 경험은 다수의 팀에서 나타났다. 한 학생은 이렇게 적었다:
"한 줄의 대사가, 한 컷의 이미지가 전체 서사의 핵심 단서가 될 수 있다는 걸 처음 실감했어요. 다시 앞장으로 돌아가 수정을 반복하면서, 텍스트를 대하는데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이러한 서사적 재해석은 단지 오역을 수정하는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곧 텍스트 전체를 다시 보는 훈련, 즉 독자로서의 직관과 번역가로서의 분석력을 통합하는 과정이었다.
2. 의성어, 감탄사, 그리고 움직임의 언어화
학생들이 가장 즐거워하면서도 고통스러워했던 부분은 단연 의성어와 감탄사의 번역이었다. “뿌우우우”, “벌떡”, “스륵” 같은 표현은 단지 소리가 아니라 장면의 분위기와 감정의 파동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독일어 사용자에게 낯설지 않게 전달하면서도, 그 정서를 보존하려는 다양한 실험을 시도했다.
어떤 팀은 의성어의 뉘앙스를 살리기 위해 직접 소리를 내보고, 말풍선의 공간에 맞춰 문장 길이를 조절하고, 감정의 흐름에 따라 철자 수까지 조정하는 창의적인 전략을 펼쳤다. 또 다른 팀은 감탄사를 연령대와 캐릭터 성격에 맞춰 차별적으로 번역했으며, “아이고” 하나에도 노인의 탄식과 어린아이의 귀여움을 구분하는 정교한 감각을 보여주었다.
3. 문화 요소 번역의 경계선: 익숙하지 않음의 전략
웹툰에는 한국의 지역적, 문화적 맥락이 곳곳에 숨어 있다. 이를 독일어로 번역하면서 학생들은 “설명할 것인가, 그대로 둘 것인가” 사이에서 고민했다. ‘해녀 할망’, ‘우리 시조가’, ‘강산이 두 번 변했다’ 같은 표현은 단순히 직역이 불가능한 언어적 유산이다.
어떤 팀은 “Haenyeo Omis(해녀 할망 독일어 번역에 해녀라는 말을 살리고 할머니 Oma를 구어체에서 사용하는 Omis로 바꾼 것)”처럼 낯선 단어를 그대로 노출함으로써 독자가 텍스트 안에서 문화적 거리두기를 경험하도록 했고, 어떤 팀은 ‘강산이 두 번 변했다’를 “20년이 휙 지나갔다”는 방식으로 감각적으로 재해석했다. 이러한 선택은 모두 번역이란 곧 문화적 해석의 작업이라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4. 제목은 어떻게 번역되는가: 작품 전체의 얼굴 만들기
제목은 하나의 문장이자, 작품 전체의 얼굴이다. 원제인 ‘말못할 사정’은 번역자들에게 여러 가지 윤리적, 언어적 난제를 던졌다. 그 의미의 모호함과 문화적 뉘앙스, 해석의 가능성을 감안해 다양한 대안이 제시되었다. 어떤 팀은 “Im Schatten der Wahrheit”(진실의 그림자 속에서)처럼 문학적인 제목으로, 또 어떤 팀은 영어 제목인 “Untold”를 함께 병기하며 해석의 여지를 남겼다.
제목 번역은 단지 언어적 기술이 아니라 기획, 편집, 브랜딩의 감각이 필요한 작업이었다. 학생들은 이를 통해 번역자의 역할이 얼마나 다층적인지를 실감하게 되었다.
5. 협업과 번역의 윤리: 혼자 번역하지 않는다
웹툰 번역은 개인 작업이 아닌 팀번역으로 이루어졌다. 3명에서 5명까지 팀을 이루어 역할을 분담하고, 의견을 나누며, 수차례 수정과 검토를 거쳤다. 어떤 팀은 매 수업마다 낭독과 피드백을 반복했고, 어떤 팀은 음성 녹음을 통해 자연스러운 리듬을 찾았다. 심지어 말풍선의 시각적 균형을 고려해 단어 수를 제한하거나 줄임표의 개수까지 토론한 사례도 있었다.
이러한 과정은 배우는 '학생'들에게 번역이란 곧 커뮤니케이션의 공동 창작 행위임을 깨닫게 했다. 수업시간의 번역은 단지 옮기는 것이 아니라,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이었다.
6. 팬레터, 작가의 답장, 그리고 학생들의 환호
가장 감동적인 순간은 수업 마지막, 학생들이 웹툰 작가에게 보낸 편지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그들은 번역하면서 생긴 궁금증, 감동 받은 장면, 캐릭터에 대한 질문을 담아 작가에게 진심을 전했다. 놀랍고 감사하게도, 작가들은 직접 답장을 보내주었고, 이 편지를 받은 순간 학생들은 모두 환호했다.
그 감격은 단순히 “답장이 왔다”는 기쁨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번역을 통해 이루어진 진정한 상호문화적 소통의 기쁨이었다. 학생들은 번역자가 단순한 전달자가 아닌, 문화의 다리이자 감정의 매개자임을 실감했다.
7. 메타번역 교육의 가능성: 언어를 가르친다는 것
무엇보다 이번 수업에서 가장 중요한 성과는 학생들이 작성한 ‘번역 성찰 리포트’에 있다. 단순히 번역한 결과를 제출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을 돌아보고 언어로 정리해내는 반성적 글쓰기는 언어교육의 가장 본질적인 목표인 ‘메타 언어 능력’을 길러주는 핵심이었다.
학생들은 번역을 통해 언어를 성찰하는 언어, 즉 스스로의 언어 행위를 되돌아보는 힘을 기르게 되었다. 이 수업은 바로 그러한 메타번역 교육의 모델이며, 오늘날 21세기 한국어교육이 지향해야 할 이상적인 모습이다.
이 수업은 단지 번역 기술을 배우는 것이 아니었다. 학생들에게는 자기 언어에 대한 자각과 타자 문화에 대한 존중, 그리고 공동 창작의 즐거움을 경험하게 하는 통합적 수업이었다. 이러한 작업이야말로 번역 교육이 지닌 궁극적인 목표이며, 언어를 가르치는 일이 얼마나 창의적이고 확장 가능한 경험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이 작업은 매년 계속 될 것이며 한국어를 배우는 독일 대학생들이 언어를 넘어서 문화를 이해하고, 나아가 자신만의 목소리로 세계와 소통할 수 있도록 돕는 디딤돌이 될 것이다. 해마다 이어지는 이 수업은 단순한 교과 과정을 넘어, 학생들의 내면에 자리한 언어 감각과 표현력을 일깨우고, 번역이라는 창조적 행위를 통해 타자와의 깊은 연결을 가능케 하는 살아 있는 교육의 장으로 계속 확장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