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하지 않았다"는 표현보다는 "하지 못했다"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할 수도 있다. 누군가 나에게 먼저 마음을 줬더라면 상황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먼저 마음을 준 적은 없었고, 나의 태도에서 느껴지는 '벽' 때문인지, 아니면 그냥 내가 인기가 없어서인지, 지난 7년의 회사 생활 동안 그 흔한 '썸' 한 번 없었다.
여자 동료들과 교류의 기회가 적었던 것도 아니다. 처음으로 입사한 회사는 제조업, 그리고 지금 있는 회사는 IT 서비스 회사라서 전체적으로 봤을 땐 남자의 숫자가 더 많은 분야이다. 하지만 나는 문과 출신이고, 내 직군은 기획/마케팅 쪽이었기에 실제로 내가 속하거나 나와 협업하는 부서에는 여성의 비중이 더 높았다.
첫 직장에는 입사 연도에 따라 기수가 있었는데, 나와 같은 팀에 들어온 한 기수 후배 20명 중 18명이 여성이었다. 나보다 적게는 한 살에서 많게는 네 살까지 어린 친구들. 더군다나 한결같이 미모(?)가 뛰어났다. 어떤 친구는 하루에도 수 만 명이 로그인하는 회사 사내망 첫 화면 모델을 여러 번 하기도 하였고, 하도 소문이 나서 일도 없는데 괜히 다른 층의 남자 개발자들이 우리 팀 쪽에서 얼쩡거리기도 했다.
작년에 이직한 회사 역시 젊고 역동적인 이미지답게 젊은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한결같이 다들 매력이 넘치는 사람들이었다. 내 바로 뒤에 입사한 동갑내기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누가 새로 입사한 곳 어떠냐고 묻길래, 정말 신기하게도 사람들이 하나같이 멀끔하고 스타일이 좋다고 대답했어. 진짜 그러기 쉽지 않은데 말이야."
이렇게 연애 감정이 생기기에 최적의 장소에서 일해왔고, 굳이 멀리서 찾지 말고, 가까운데서 찾으라는 조언도 많이 들었다. 괜히 솔로인 여자 동료들과 연결해주려고 묘한 분위기를 잡아보려는 시도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나에게 그녀들은 단 한 번도 이성의 대상이 아니었다. 내가 유달리 공, 사를 구분하는 의식이 투철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바로 그녀들에게 들은, 수많은 '아픈 이야기'들 때문이다.
#1.
나보다 한 살 어린 후배 A는, 입사할 때부터 유명한 친구였다.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서도 단연 돋보이는 미모에 학벌도 좋고, 게다가 집안까지 좋다는 소문이 났다. 바로 그녀가 나의 첫 후배였다. 나는 맞선배로서 그녀의 회사생활 적응을 돕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학창 시절부터 후배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기에, 회사에서도 어서 후배가 오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예쁘고 매력적인 친구가 오다니! 부러움과 질투의 시선이 따가웠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 잘해주기 위해 노력했다. 그녀도 맑은 모습으로 별 탈 없이 금방 회사 생활에 적응을 해 나가는 듯 보였다.
두세 달쯤 지나서, 그녀와 처음으로 따로 저녁을 먹을 기회가 있었다. 바쁜 일과 시간에는 미쳐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나누게 되었다. 회사를 다니면서 느꼈던 것들, 개인적인 삶과 관심사들... 사람이 친해지면서 나눌 수 있는 그런 평범한 이야기들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밥을 다 먹고 간단히 맥주 한 잔씩 하러 갔다. 워낙 술을 못하는 나이고, 그녀도 술을 즐기는 편은 아니어서, 정말 그냥 가볍게 칵테일과 맥주를 마시며 수다를 이어갔다. 이야기가 깊어지고, 조금은 속에 있는 말도 꺼내놓게 될 때 즈음, 그녀가 입을 열었다.
"선배, 근데 저 요즘 C 과장님 때문에 많이 힘들요."
그리고 그녀가 들려준 이야기는 충격적이었다. C 과장은 A씨보다 11살이 많은 노총각이었다. 그 C 과장이 A 씨에게 사적인 감정을 가지고 자꾸 개인적으로 연락을 하고, 약속을 잡으려 한다는 것이었다. 다 같이 점심 먹고 커피 마시면서 무슨 영화가 개봉했다는 얘기를 나누고 나면, 자리에 와서는 메신저로 자기랑 같이 영화를 보러 가자고 하고, A 후배가 발레에 관심이 있다고 얘기하니 발레 공연 티켓을 사서 같이 가자고 했다고 한다. A 씨는 그런 관심이 부담스러워서 정중하게 거절했음에도 불구하고, C 과장은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그 정도가 심해지고 있었다. 급기야 그 전 주가 A 씨의 생일이었는데, 갑자기 자기를 따로 부르더니 선물을 주더란다. 그런데 그 선물이 다른 것도 아니고 유명한 주얼리 브랜드의 목걸이와 귀걸이였다. 그녀는 너무 부담스러워서 선물을 돌려주려 했지만, 그때부터 C 과장은 이렇게 자기 마음을 무시할 수 있는 거냐고 오히려 A 씨에게 역정을 냈다. 개인적인 만남이었다면 그냥 딱 잘라 거절하고 말면 될 일이었지만, 매일매일 얼굴을 봐야 하는 회사 사람과는 그렇게 하기가 어려웠다. 그 일로인해 A 후배가 겪는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C 과장은 동갑인 그룹장과 매우 친한 사이라서, 그룹장과 면담을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인사과에 얘기하더라도 결국은 그룹장이 알게 될 거라서, A 후배는 잔뜩 움츠러들어 있었다. 그 자리에서 내가 해 줄 수 있는 거라고는 그저 위로의 말과, 종종 다 같이 회식하는 자리에서는 C 과장과 멀리 앉을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는 것 정도밖에 없었다.
A 후배와 C 과장의 악연은 거의 3년 간이나 지속되었다. 2년 차 때는 더 최악으로 C 과장이 A 후배의 직속 파트장이 되어버렸다.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는 A 후배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속사정을 알고 있는 나는 지켜보는 것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결국 A 후배는 연말 평가에서 C 과장으로부터 최하 등급인 D를 받았다. 지금도 그날 평가 면담을 마치고 회의실에서 나오는 그녀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그 최악의 날, 그녀의 차를 타고 잠깐 회사 주변을 한 바퀴 돌았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위로가 없다는 사실이 더없이 무기력하고 슬펐다.
나는 회사를 옮겼지만 그녀는 아직도 그 회사에 다니고 있다. 다행히 4년 차 때, 우리 팀이 완전히 분해되면서 C 과장과도 떨어졌다. 이제는 그런 스트레스를 덜 받으며 열심히 생활하고 있다. 하지만 그녀가 사회 초년생 시절 겪었던 그 일들로 인해, 회사 생활을 대하는 그녀의 성격이나 태도가 매우 시니컬해지고 소극적으로 바뀌어버렸음이 확연히 느껴진다. 만약 그녀가 그런 일을 겪지 않았더라면, 더 밝고 열정이 넘치는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았을까? 극복하기에는 너무나 버거운 그 경험들과 그 시간들을 누가 치유해주고 보상해 줄 수 있을까?
#2.
회사를 다니면서 가장 일상화된 폭력에 노출되어 있는 이들을 꼽으라면, 바로 '비서'들이 아닐까 싶다. 대체로 어린 나이에 사회 초년생인 그녀들은, 나이 때문인지 아니면 정규직 사원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인지, 같은 동료라는 인식을 덜 받곤 한다. 그러다 보니 이런저런 소문과 뒷말이 많고, 심지어는 그녀들을 쉽게 보는 시선도 다분하다.
M은 내가 대리 때쯤 우리 부서 비서로 입사하여 2년 간 일을 했던 친구이다. 근무하는 동안은 딱히 왕래가 없었다가 곧 그만둔다는 얘기를 듣고 다른 팀 비서 분과 함께 같이 점심 자리를 마렸했는데, 그때 말이 잘 통해서 그 이후로도 가끔 만나서 서로의 사는 얘기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M은 키가 크고 늘씬한 스타일이었다. 얼굴도 작고 예쁘고, 성격도 시원시원해서 매력이 많은 친구였다. 그래도 다른 비서들에 비해서는 나이도 많고 자기 일 똑 부러지게 잘 하는 친구여서 여기저기 휘둘릴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회사에서 일하는 동안에는 항상 밝은 모습으로 업무를 하곤 했다.
그녀가 퇴사를 하고 어쩌다보니 다음 취업을 도와주게 되면서 우리는 조금 더 친해질 수 있었다. 딱 바랬던 곳에 취직하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다음 직장을 구하고 나서 취직턱을 내는 자리.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이전 회사 부서 사람들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야, 근데 있잖아. 그 K 차장은 진짜 최악이야."
K 차장님은 다른 회사에서 이직해 와서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분이었다. 잘은 모르지만, 어엿한 가정도 있으시고, 나에게는 그냥 모난데 없이 일하는 직장 상사일 뿐이었다.
"응?"
"왜 그 그룹 회식할 때, 나 갔던 적 있었잖아.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술도 좀 마시고 잘 놀고 집에 가는데, K 차장님이 같은 방향이라고 같이 택시 타고 가자고 하더라고. 그래서 나는 별생각 없이 그러자고 하고, 다 인사하고 택시를 탔거든. 그래서 나란히 택시 뒷자리에 앉아서 집에 가는데... 갑자기 내 손을 딱 잡는 거야."
"뭐어?? 진짜??"
"응. 나도 진짜 깜짝 놀랐다니까. 평소에 전혀 그렇게 안 보이는 분이... 가정도 있으신 분이... 갑자기 그래서 나 너무 놀래서 얼른 손 빼고, 근데 무서워서 아무 말도 못 하고 벌벌 떨다가 택시에서 내렸다니까."
나는 상상도 못했던, 정말이지 상상도 못했던 일이 그녀에게도 일어났던 것이다.
#3.
이전에도 글을 통해 소개한 적이 있는 내 친구 J.
J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있는데, 바로 노래방에 가는 것이다. 노는 것도 좋아하고, 술 마시는 것도 좋아하는 J인데, 노래방만큼은 한사코 가기 싫다고 하길로 조금은 의아했다. 한참 뒤에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J는 작은 개발 회사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아직은 멋모르던 사회 초년생 시절. 그녀는 자기 회사에 외주를 맡긴 대기업 담당자들과의 회식 자리에 끼게 되었다. 대부분이 아저씨인 자리가 편하지만은 않았지만 그래도 회사 입장에서는 '갑'이다 보니 어쩔 수가 없었다고 한다.
저녁을 먹고, 술을 마시다가 다 같이 노래방으로 이동을 했다. 우연인지, 의도된 것인지 그녀가 자리의 안쪽에 앉게 되었다. 그런 자리에서는 자기 차례가 되면 제자리에서 노래를 부르기보다는 앞으로 나가서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부르곤 한다. J의 차례가 돌아왔다. 안쪽에 앉은 J가 마이크를 잡으러 앞으로 나가려면 사람들의 무릎과 책상 사이를 비집고 나아가야 했다. 그 날 J는 치마를 입고 있었다고 한다. J가 앞으로 나가려는데, 그 '갑' 중 한 사람이 무릎을 전혀 비켜주지 않더라는 것이다. 대놓고 자기 허벅지 위로 J의 엉덩이가 쓸고 가게 끔 의도하고 있는 것이었다. J는 수치심이 들었지만, 그 자리에서 가장 약자였기에 어쩔 수가 없었다. 분위기상 노래를 안 할 수도 없고, 자기 차례가 올 때마다 그렇게 노골적으로 수치심을 유발하는 경험을 한 J는, 그 뒤로 노래방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겼다고 한다.
운이 좋게도 나는 내 동료이자 친구들로부터 회사에서 경험한 성폭력과 성희롱에 대해서 들을 수가 있었다. 남자인 나는 정말이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겉으로 보는 회사의 일상은 너무나 평화롭고 잔잔했는데, 뒤로는 이처럼 더러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충격적이었다.
그녀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다짐했다.
나는 절대로 회사의 동료, 선배, 후배들을 이성애의 대상으로 바라보지 않겠다고.
순수한 감정? 도대체 그 기준은 누가 정해준단 말인가? 나에게는 로맨스이지만 누군가에게는 폭력이자 고통이 될 수 있기에, 애초에 나 자신은 그런 일을 만들지 않도록 하자고 다짐했다. C 과장도, K 차장도, 그 '갑'들도. 모두 그 순간 자기의 감정은 순수하고 진실된 것이었다고 생각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니 나는 절대로 그런 사람이 되지 말자고. 그녀들의 고통스러운 이야기가 하나씩 쌓일 때마다, 이런 다짐은 더욱 확고해졌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사내 연애를 하지 않는다.
회사 동료, 특히 자기보다 직급이 낮은 이성에게 막무가내식 애정 공세를 퍼붓고 있는 이에게,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면서,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상대에게 자기의 감정을 강요하고 있는 이에게,
'비서'라는 이유로, 동료로서 존중하지 않고, 아무렇게나 대해도 괜찮다고 착각하고 있는 이에게,
'갑'의 위치를 이용하여 자기 욕구를 채우려는 이에게,
이성을 동료로 보지 않고, 뒤에서 물건처럼 품평하고 성적 대상으로 뒷담화 까는 이에게,
가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회사에서의 공적 관계를 사적 관계로 착각하고 인생의 마지막 용기(?)를 내려는 이에게,
꼭 이 말을 해 주고 싶다.
야이 미친 X들아, 작작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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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대상 출간, <서른의 연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