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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솔 Jun 04. 2020

<아이 엠 샘>

All you need is Love.


부성애와 비틀즈, 촌스럽고 뻔하지만 그래서 마음에 더 드는 걸지도 모른다.


2001년 개봉작, 무려 19년 전 작품인 <아이 엠 샘>. '왓챠 플레이'를 끊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용자 취향 추천 영화에 자꾸만 뜨길래 궁금한 마음에 클릭하게 되었다. 국내로 들어오는 해외 영화의 특성인진 모르겠으나 썸네일이나 포스터만으로는 도저히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어서 줄거리를 확인해봤더니 왜 추천에 떴는지 단번에 알게 되었다. 최근에 장애를 다룬 영화와 고전 명작들을 편식해서 보다 보니 아무래도 이 영화가 추천에 뜬 것 같은데, 사실 막상 보게 되기까지는 꽤 고민했었다. 국내작이 아닌 이상 지적 장애를 다룬 영화는 거의 본 적 없고, 설령 장애를 소재로 한 영화를 봤더라도 가족을 중심으로 다룬 스토리는 아예 본 적이 없었다. 장애인 아빠와 똑똑한 딸 둘을 갈라놓으려는 사회, 영화를 보기 전부터 눈물이 날 것 같은 이른바 '치트키'가 들어가 있는 영화가 아닌가. 신파 장르에 아무리 호감이 있다고 한들, 시작부터 눈물샘을 꼬집는 영화가 마냥 반갑지는 않았던 셈이다. 주저주저하다가 틀게 되었는데 단순히 감동적인 신파라고 하기엔 순하면서, 무거운 메시지가 들어간 영화였던 것 같다. 야심한 밤에 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의 본론을 이야기하기 전에 장애를 다룬 영화가 왜 극한의 호불호를 가지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첫 번째는 바로 '눈물'때문이겠다. 사회에서 상대적으로 약자의 위치에 있는 장애인을 소재로 쓴다는 것은 영화의 기본 장르부터 결정짓는 일이기 때문이다. 간혹 때에 따라 코미디 장르와 엮이기도 하지만, 장애를 다룬 대부분의 영화의 근본이 드라마라는 점에서, 영화를 보는 두 부류가 갈리게 되는데 한쪽은 작위적인 감동에 질린 쪽이고 한쪽은 인간 본연의 감정을 애정 하는 쪽이겠다. 두 부류 모두 개인의 취향이니 옳고 그름을 따질 수는 없을 것이다. 두 번째는 희화화/비현실성이다. 영화를 만드는 대부분의 감독이 실제로 장애를 앓고 있지 않기 때문에 현실에서 마주친 이미지로 그 모습을 구성하는 일이 전부일 것이다. 때문에 장애인이 때론 비현실적인 모습으로 나오거나, 수동적이고 무기력한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물론, 이러한 부분은 감독 개인의 역량이 크기도 하겠지만 애초에 사회가 장애인을 바라보는 시선을 그대로 비춰주는 씁쓸한 반증이기도 하다. 때문에 장애를 다룬 영화는 개봉 전부터 논란의 여지가 된다. 흥행의 도구인가, 작품성을 위한 수단인가 수많은 논란거리에서 탈피하기 힘든 것 또한 사실이다. 하나, <아이 엠 샘> 영화는 호불호, 논란의 여지를 잠시 덮어두고 영화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본질을 전달하고자 노력한다.




영화를 보면서 꽤 놀랐던 점 중 하나는 장애인을 대하는 사회의 태도가 한국과 굉장히 다르다는 것이다. 기존 국내 영화가 답습해 온 장애인의 모습을 보자. 가족 말고는 의지할 곳이 없고 희생과 배려로 이루어진 환경과 장애를 딛고 일어선다는 설정 ... 아마 그것이 진부한 클리셰의 전부였을 것이다. 최근에야 이런 시선이 바뀌어 나가고 있지만 아직까지도 불편함이 남아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나, <아이 엠 샘>에서 주인공인 샘(숀 펜 분)은 세계적 프랜차이즈 카페인 스타벅스에서 일을 하며 승진을 하고, 변호사를 만나 법률 상담 서비스를 받으며, 장애인 친구들로 이루어진 모임에서 약속을 정하고 놀러도 다닌다. 능동적이고 자조적인 그의 모습은 겉으로 보이는 행동이 아니라면 그가 장애인이라는 것도 잊게 만들 지경이다. 장애인이라는 인물을 비교적 약자가 아닌 사회의 일반적인 한 구성원으로서 대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움 다름이었다. 덕분에 장애인을 사회적 약자로 만들어 무작정 동정의 눈길로 쳐다보게 하기보다 아버지라는 소명을 가진 한 사회인으로서 볼 수 있도록, 이야기에 더욱 초점을 맞추고 볼 수 있었다.




영화는 두 인물의 대비를 통해 극의 전개를 극단적으로 이끌어간다. 주인공인 샘과 그의 조력자인 변호사 리타(미셸 파이퍼 분)의 모습을 중심으로 그려냄으로써 말이다. 7살의 지능으로 부족함이 많지만 시간과 사랑으로 자식을 키우는 샘, 그리고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이 여건들 사이에서 어쩔 수 없이 자식에게 무관심한 리타. 전혀 다른 두 유형의 부모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감정적인 영역만이 아닌 현실적인 영역 또한 함께 이야기하려고 한다. 둘 다 부모로서 자식에게 최선을 다하지만 부족한 면모는 여과 없이 드러난다. 영화에서도 이야기하려 하듯 누구든 완벽한 부모는 될 수 없다.  영화는 가장 원초적인 질문을 파고든다. '좋은 부모의 기준이란 무엇인가' 하고 말이다. 그리고 그 좋은 부모의 기준이라는 게 과연 합당한 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던진다. 개인적으로 샘의 면모에 눈길이 가는 만큼 리타의 면모에도 눈길이 꽤 많이 갔는데, 사회적으로 성공이라는 위치에 서서도 부족하다고 느끼는 그녀의 삶이 뭐랄까 현대 사회 부모들과 똑 닮아있는 것 같아 괜히 슬퍼졌다. 자식을 위해 노력했다고 하지만 결국 자식들에게 돌아오는 따가운 외면이 그녀를 더욱더 극한의 상황으로 몰고 간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영화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기 전까지 숀 펜 배우가 실제로 장애인인 줄 알았을 정도로 배우의 연기력에 대해서는 감탄밖에 나오지 않는다. '숀 펜이 영화의 모든 것을 결정했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디테일하고 섬세한 연기였다.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부터 손동작과 표정까지, 그리고 사회 앞에 무기력감을 깨닫은 장애인이 어떻게 소외되고 무너지는지 ... 평범한 인간으로서의 보편적인 감정을 뛰어넘어 아버지라는 이름 하에 엮인 의무감과 사랑에 대한 상실감까지 표정과 말투 하나만으로 완벽하게 드러냈다. 특히, 후반부 자신만의 공간에서 사회를 바라보도록 연출한 컷의 눈빛은 뭐랄까,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날카로웠다. 상실감과 자책, 애정에 비례하는 무기력함까지 단 몇 줄의 어눌한 대사와 눈빛만으로도 이 감정을 설명할 수 있다는 건 배우에게 가장 큰 무기가 아닐까 생각이 든다. 여담으로 숀 펜과 연기를 이어받는 다코타 패닝의 순박한 연기도 영화의 빛을 채워주는 요소 중 하나인데 이 둘의 연기를 가만히 보고 있자면 관객으로서의 역할이 아닌, 영화 속의 3자의 인물이 되는 듯한 기분이 든다. 괜스레 둘을 바라보고 있으면 덩달아 행복해지는 듯한 마법 같은 순간이 많이 담겨 있었다.




제시 넬슨 감독은 샘의 7살 지능을 그대로 드러내기 위해 유난히 불안정한 컷들을 많이 사용했다고 했다. 그래서 영화를 보면 좌우로 심하게 뒤틀리기도 하고, 무자비한 클로즈업을 단계별로 사용하기도 한다. 때문에 촬영이나 연출이 좋았다고 말하긴 어려울 것 같다. 아무리 명작이라 한들 구시대적인 연출이 현대와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한데, 감독은 재미있게도 촌스러운 촬영기법에 불편함을 느끼는 찰나 비틀즈의 음악이 배경으로 깔아놓는다. 누구나 이해하고, 누구나 끌릴만한 음악과 함께 극 전개에 속도감을 내기 시작한다. 작위적일 거라는 생각과는 다르게 스토리의 지향점을 찾아 이야기는 꽤 순조롭게 흘러간다. 이야기의 시작부터 비틀스가 존재했던 것이 바로 이런 이유였겠구나, 왠지 모르게 감독에게 납득이 가는 숨겨진 장치를 발견한 기분이 들었다.




부성애란 만들어지는 것인가, 타고나는 것인가. 어느 쪽이 정답인지는 알 수 없지만 부성애라는 것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초월적인 감정이라는 것만큼은 확실히 알 것 같다. 루시를 끌어안고 자신의 이야기를 딱 한 번만 들어달라고 호소하는 그의 얼굴과 몇 마디 되지 않지만 애절하게 들리는 그의 모습은 '부성애'란 단어의 의미 그 자체를 드러내는 듯하다. '사랑'의 감정을 가장 중요시 여기는 그의 태도는 현시대 부모뿐만이 아닌 모든 사람들들에게 날카로운 지적을 그대로 보여준다. 타인의 감정을 함부로 해하지 않길 원하고,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는 확고한 기호를 보이고, 사랑한다는 표현의 의미를 무엇보다 중요시 여기는,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게 만드는 그의 모습은 영화에서 표현하려는 '7살의 지능을 가진 사람'보다 더 큰 의미를 포괄하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든다.




누구보다 가족이 소중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이 엠 샘>이 가족영화임에는 분명하고 이러한 주제의식을 드러내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영화가 단순히 가족에 대한 소중함의 메시지만을 담고 있는가.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영화 속 사회가 요구하는 요점은 '아이를 올바른 환경에서 키우게 하는 것'이었다. 학업과 성장, 인격과 사회관계 다양한 이유를 제시함으로써 장애 아버지에 대한 무능력함을 상기시킨다. 때문에 사회 복지 기관에서 아이를 포기하길 권유하지만 샘은 포기하지 않는다. 오직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말이다. 영화 속에서 루시가 워낙 똑 부러지는 아이였기에 샘과 함께 남기를 선택할 수 있었지, 현실이었다면 복지라는 이름으로 지어진 거대한 벽 앞에서 개인이 얼마나 무기력해질지 감히 상상조차 가지 않는다. 그렇다고 영화 속 인물들의 선과 악을 가르는, 그러니까 양육권을 빼앗으려는 쪽을 악, 아이를 그대로 키우길 원하는 쪽을 선으로 그리는 그런 이분법적인 생각은 잠시 접어두자. 현실로 돌아와 객관적으로 바라보았을 때 과연 양 쪽 부류에 어느 쪽을 선과 악으로 가를 수 있을까 ... 나는 잘 모르겠다.




드라마라는 장르임에도 불구하고 법정 신들의 긴장감도 잘 살려냈다. 때문에 관객이 주인공을 따라 긴박한 감정을 함께 공유할 수 있었고, 순차적으로 흘러가는 진행 단계를 스탭에 맞춰 쉽게 따라갈 수 있었다. 법이라는 사회 기본 구조 틀을 활용함으로써 사회가 개인의 감정에 함부로 침범할 수 없을 거라는 단호한 감독의 의지도 엿볼 수 있었다. 영화를 보며 꽤 많은 눈물을 흘렸지만 이 영화가 비단 눈물을 흘리기 위한 영화로 비치는 것을 선호하지는 않는다. 앞서 말했듯 단순히 부성애를 주제로 한 가족 드라마라고 하기엔 현실사회의 리얼리즘이 도드라져 있기 때문이다. 여담으로, 나는 영화에 다른 영화들을 갖다 붙여 비교하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이 영화가 종종 국내 영화 <7번방의 선물>과 비교되는데 감독 고유의 색깔과 표현하고자 하는 방식이 다를 뿐 무작정 작품의 우위를 따지기는 어렵지 않나 생각이 든다. 혹시 <7번방의 선물>을 재밌게 본 사람이라면 이 영화는 좀 더 다른 시각에서 <아이 엠 샘> 그 자체를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사진 출처 : I am Sam . In Mov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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