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서는
오전 3:01
그리고 그 30분 후, 반듯이 누워 계신 할머니 옆에 마주앉았다.
이제는 산소호흡기도 팔에 혈압측정기도 없다. 소변 측정기도 없고 바이탈 기계도 없다. 이름모를 기타 기계도 없다. 지하 배관이나 전봇대를 잇는 전깃줄마냥 복잡하게 이어져 있는 수많은 선들도 없다. 할머니와 나 사이에는 곱게 덮힌 이불밖에 없었다.
아버지 형제들이 오실 때까지 안치실 이동을 미뤘다. 아버지는 며칠 밤 고생한 몰골로 할머니를 보낼 수 없기에 짐을 싣고 집에 다녀오신다.
나와 할머니만 남았다. 병실에, 세상에.
몇 년 전부터 나는 출근할 때마다 할머니의 방을 살피는 버릇이 생겼다. 깊게 깊게 잠든 할머니의 가슴케를 살핀다. 수 초간, 지하철을 놓쳐도 상관없다. 그렇게 수 초간, 할머니 가슴 쪽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확인하고 집을 나선다. 퇴근하고 할머니 방에 TV소리가 나면 나는 내 할 일을 한다. 조용하면 또 다시 수 초간, 오르락내리락. 호흡을 확인한다.
그렇게 할머니를 부른다. 할머니가 화들짝 놀라 눈을 뜨고 왔냐고 물어보신다. 웃으신다. 어린아이처럼.
"이제는 대답도 안 해 주시네. 진짜 그렇네."
안 움직이시네. 평소 주무실 때랑 모습이 똑같은 탓이었다.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이성적이다. 할머니는 가셨다. 그런데 서운함을 느꼈다. 이제 얘기 들어준다니까. 언제나 할머니는 대화의 핵심은 얘기 안 하시고 빙빙 돌려 말씀하시니까. 그래서 내 시간 다 잡아먹으니까.
그런데 나는 지금은 괜찮아요. 시간 많다니까. 왜 말이 없나.
지금 말이 없는 이분은 생전이 말씀이 많으셨다. 그런 이분은 내 어머니나 다름 없다.
한 시간 정도, 일방통행의 대화가 이어졌다.
나는 엄마가 없다.
태어났을 때 내 곁에 있던 사람은 할머니와 할아버지였다. 이분들이 아버지고 어머니였다. 학부모 회의 때면 할머니가 오셨다. 엄마는 멀리 외국에 돈 벌러 가셨다고 담임선생님께 말씀드린다. 전혀 창피한 감은 없었고, 그냥 그 나이 때부터 고지식했던 나는 '아닌데, 엄마 없는데.'하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두 번째 엄마가 생겼다, ...가 5~6년도 채 못가서 없어졌다. 조속한 이혼 절차 후 뭐가 그리 서운했는지 두 번째 엄마'였던' 분은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막바지를 보내는 새벽녘에 집으로 전화했다. 한껏 욕지거리를 듣다가 나는 말했다. '엄마, 왜 그러세요.' 그러자 분이 안 풀렸는지 '내가 왜 네 엄마야?' 그러고는 몇마디 더 하고는 끊어버리셨다. '너는 엄마가 없다'라고 마치 선고를 당하는 느낌이었다. 나는 이미 아는데, 태어날 때부터 엄마는 없었는데. 하고
생모를 만났다. 그로부터 1년 뒤였다. 신촌 현대백화점 근처 1층 모퉁이 작은 카페의 치즈케이크 맛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치즈가 원래 짠 것은 알았지만 케이크인데 이렇게 짠가. 이렇게 습기가 찬 케이크라면 내놓지 않는 게 정상일 텐데. 그리고 또 몇 년이 지나고 연락이 끊긴다.
정정한다. 나는 엄마가 매우 많다. 아버지는 그이후로도 제대로 된 엄마를 만들어줘야겠다 생각했나 보다.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그때그때 나들이 갈 때마다 사람이 바뀌었다. 지금은 세 번째 재혼을 생각하고 계시지만 내가 큰 기대를 안 하는 이유는 아마 이 시절의 회한과 실망이 뒤섞인 채 버려진 책상 서랍에 쓰지 않는 노트같은 처량함으로 버려져 버린 '온전한 가족상'일 것이다.
친구네 어머니는 정말 좋은 어머니였다. 내 사정을 알아도, 몰라도, 가장 친한 친구들의 어머니는 내가 방문할 때마다 진심으로 아껴주셨다. '온전한 가족상'의 표본을 TV에서만 배우지 않고 실제로도 체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아, 응석은 저렇게 부리는 것이구나. 잔소리는 저렇게 듣는 것이구나. 어머니라는 것은 저런 것이구나. 하고.
그런 세월 동안 '엄마'의 자리에는 늘 할머니가 계셨다. 할머니는 일제강점기를 거쳐 6.25 전란에서 살아남으셨다. 고된 시집살이에는 미래가 없다고 생각하셨는지 서울로 상경해 옷을 만들었다. 한 땀, 한 땀 뜨개질로 맞춤복을 만들어 팔았다. 유명해졌다. 유명 백화점에 개인 부띠그를 열 정도로 성공한 디자이너가 되셨다. 그리고 수 년을 사업했지만 빚만 겨우 갚고 단독주택 하나만 남겼다. 나는 그집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그 집은 재산 분쟁으로 여러 명의로 찢겨졌다. 아버지는 형제들과 전화할 때마다 좋은 소리를 뱉은 적이 없고 좋은 소리를 들어본 적도 없으시다. 그런 아버지와 아버지 형제들이 싸움을 멈추고 장례 기간 내내 내 걱정을 한다. 그 큰집에서 혼자 지내게 될 텐데 괜찮겠냐. 내가 말했다. 그럼 박쥐 같은 동물들은 동굴에서 태어나는데 동굴을 무서워 하겠어요?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마치 할머니가 꿰매 놓고 가신듯 아버지 형제들은 화해의 물꼬를 튼다.
그래도, 자수성가한 할머니는 존경해야 마땅하지만 나는 할머니가 참 싫었다. 할머니는 욕심이 많으셨고, 까다로우셨다. 예민하셨다. 나는 까다로운 할머니가 싫었다. 아버지, 어머니를 갈라놓은 것도 싫었고, 할아버지를 잔소리로 매일매일 구박하는 것도 싫었다. 나는 괜찮은데 계속 내 걱정만 하는 것도 싫었고, 몸이 안 좋으시다면서 식사를 거르시는 것도 싫었다. 요양보호사 선생님이 마음에 안 든다고 거부하시는 것도 싫었고, 아버지 형제들 문제 때문에 매번 똑같은, 결론도 안 나오는 걱정거리로 나한테 얘기 좀 하자고 하시는 억지도 싫었다.
겨우겨우 모든 것이 끝나고, 단둘이 그렇게 병실에 있게 되었는데 이젠 들을 준비가 되었는데도 말씀은 안 하시고 자는 척하시는 것이 제일 싫었다.
할머니의 보살핌은 생채기에 임시로 붙이는 반창고 같았다.
반창고만 붙인다고 내 큰 상처는 잘 아물지 않았다. 아물었다 싶을 때 살짝 떼보면 오히려 더 아프다.
할머니의 보살핌이 그랬다. 내가 아플 것 같으면 보듬어주고, 칭찬해주고, 안 아프냐고 물어봐 주셨다. 나는 아픈 내색은 하지 않았다. 사실 크게, 빠르게 낫지는 않았다.
그래도 항상 곁에 계셨다. 늘 구급상자에 들어있는 그 반창고처럼. 언제나 바로 사용할 수 있는 반창고처럼.
그렇게 나는 현충원에 두 번씩이나 영정사진을 모시고 들어가게 된다. 국가유공자이신 할아버지는 17년 전에 먼저 오셨고, 할머니는 합장을 하신다. 할아버지 때는 아버지를 잃은 듯한 큰 충격에 얼이 빠져있었다. 이 나이에, 맨정신에 들어가게 되니 마취 안 하고 환부를 째는 듯한 고통이 스며들었다.
할머니가 사망 선고를 받으시고 나서 내가 바로 처리한 일은 아이러니하게도 대강 신청이었다. 당연한 것이다. 새벽녘이지만 체면이고 뭐고 없고 그냥 냅다 보냈다.
'저희 할머니께서 소천하시어 부득이하게 대강을...'
보내고 나서 아차 싶었다. '소천'이라니. 사전을 찾아 보니 기독교에서 자주 사용하는 용어란다. '하늘의 부름을 받아.' 우리 할머니는 종교가 없는데. 굳이 말하자면 불교를 좀 좋아하셨고. 편히 쉬시라고 기원을 했으면서 나는 우리 할머니를 천국에 강제취업을 시킨 꼴이 되어버렸다. 생전에 니트 디자이너셨고, 사업을 그만두시고도 미련이 남으셨는지 집에 있는 모든 천이라는 천은 꿰매면서 테이블 보며 양말이며 만들며 사셨으니. 머리맡에 항상 바느질 세트가 있었으니 그곳에서는 아마 천의무봉의 천사옷이나 선녀옷을 만들게 되실지도 모르겠다. 미안합니다. 할머니.
아니, 잘 지내세요. 어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