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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곰 Jan 31. 2020

드래곤나이트의 탄생

드래곤나이트 01

  용사는 마지막 힘을 다해 몸을 위로 끌어올렸다. 육중한 판금 갑옷을 입은 상체가 간신히 벼랑 위로 올라온 후, 오른 다리를 걸치고 낑낑댄 끝에 결국 정상에 도달한 용사는 그대로 누워 한참 동안이나 숨을 할딱였다. 


   “하악, 하악, 하악......”


   왕실의 마법사들을 총동원하여 경량화 마법, 중력 약화 마법, 근력 강화 마법 등 수십 가지의 마법들을 퍼부어 댔음에도 불구하고, 미스릴 판금 갑옷을 입고 깎아지른 벼랑을 등반하는 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갑옷을 포기할 수도 없었다. 설령 벼랑 끝까지 올라왔다 한들 드래곤의 브래스 한 방에 노릇노릇하게 구워져서는 웃음거리밖에 안 될 터였다. 


   ‘아. 그래. 드래곤.’


   그때서야 용사는 자신이 드러누운 곳이 드래곤의 둥지임을 상기했다. 누운 채로 눈알을 굴리자, 백 미터쯤 떨어진 곳에 웅크리고 있는 거대한 덩치가 보였다. 하나하나가 방패처럼 단단하고 보석처럼 빛나는 비늘, 하늘을 덮을 수 있을 만큼 거대한 피막의 날개, 머리에 돋아난 거대한 두 개의 뿔, 그리고 그 아래 빛나는 노란색 눈동자는 용사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용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손을 어깨 뒤로 뻗었다. 그리고 두 번쯤 더듬은 끝에 칼집에 든 검 – 찬란하게 빛나는 드래곤 슬레이어를 꺼내드는 데 성공했다. 수십 년간 괴물들과 싸워 온 오랜 경험이 그의 근육을 느슨하게 긴장시켰고 정신을 또렷하게 했다. 


   용사는 외쳤다.


   “드래곤! 나는 브루하스의 용사 바그네스 폰 바니반스! 지금 나의 이름을 걸고 네게 원하노니, 고래로부터의 맹약인 드래곤나이트의 율법에 따라......”


   “아, 됐어. 시끄러워.”


   드래곤이 투덜거렸다. 목소리가 천둥처럼 울리며 용사의 몸을 덮치자 그 압력만으로 용사는 하마터면 검을 떨어뜨릴 뻔했다. 크게 놀란 용사는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단순한 목소리만으로도 이 정도의 위력을 발휘할 정도면 이 드래곤의 나이와 힘은 측량하기조차 어려울 정도였다. 대체 몇 년이나 살아온 것일까? 삼백 년? 오백 년? 어쩌면 천 년?


   드래곤이 손가락(이라고는 해도 용사의 키보다 길어 보였다)을 뻗어 심드렁하게 용사를 가리켰다. 


   “드래곤나이트가 되고 싶다는 거지?”    


   “그, 그렇다.”


   용사가 위엄을 보이려 애쓰며 대답했다. 드래곤이 말했다. 


   “그럼 무기부터 바꿔. 창으로.”


   “뭐라고?”


   용사는 항의했다.


   “다, 당치 않은 말이다! 이 검은 수많은 드래곤을 격퇴해 온 드래곤 슬레이어로, 내 십칠 대 선조께서 드래곤나이트의 명예를 얻은 이후 가문의......”


   “그건 너무 짧다고.”


   드래곤이 짜증을 내며 말했다.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성질나니까.”


   드래곤의 두 날개가 한번 펄럭이자 폭풍 같은 바람이 불어 보며 벼랑 위에 놓인 바위들이 움찔거렸다. 직전에 추한 모습으로 몸을 바닥에 내던진 용사는 간신히 끈 떨어진 연처럼 날아가 버리는 꼴을 면할 수 있었다. 용사가 엉거주춤하게 다시 일어서자 드래곤이 손가락 두 개를 구부려 길이 육 미터쯤을 표시해 보였다. 


   “이 정도 길이의 창을 만들어. 미스릴 재질로. 끝에는 가시 박힌 공을 매달고.”


   길이 육 미터에다 끄트머리에는 가시가 박힌 공이 매달린 창이라니, 생각만으로도 우스꽝스러운 무기였다. 용사가 항의했다. 


   “불가하다, 드래곤이여! 그런 무기로 어찌 우리의 적을 격퇴할 수 있단......”


   “두 번 말하게 하지 말랬지.”


   드래곤이 노려보며 말하자 용사는 입을 다물었다. 드래곤이 어깨 한쪽을 들썩이더니 한숨을 쉬었다. 그 서슬에 입가에서 검붉은 유황 불꽃이 피어올랐다. 


   “애초에 말이야. 드래곤나이트인지 나발인지에서 중요한 건 우리들이잖아. 너희들이 무기를 휘두를 기회 따위가 어디 있단 말이냐, 너 작고 연약한 인간이여?”


   용사가 우물쭈물하다 소극적으로나마 반박에 나섰다. 


   “하지만 드래곤나이트는 검을 사용해야 한다! 그게 아니면 도저히 멋이 나지 않는단 말이야!”


   “그건 내가 알 바 아니지.”


   드래곤이 딱 잘라 말했다. 


   “결정해라. 무기를 바꾸고 드래곤나이트의 맹약을 맺을 테냐, 아니면......”


   드래곤이 혀를 내밀어 입맛을 한 번 다시자, 턱 사이로 날카롭게 솟아난 수백 개의 이빨이 보였다. 용사는 자신도 모르게 간담이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 내 한입거리 식사가 될 테냐?” 


   용사는 즉시 대답했다. 


   “무기를 만들겠다, 강대한 드래곤이여.”


   “좋아. 얼른 그걸 만들어 오라고. 그러면 드래곤나이트의 맹약을 맺어줄 테니.”


   드래곤이 말한 후 긴 목을 구부려 어깨 쪽에 대고 눈을 감았다. 용사는 한참 동안이나 머뭇거리다 간신히 용기를 내어 말했다. 


   “드래곤이여. 하나 묻고 싶은 있다만.”


   “뭐지?”


   드래곤이 눈도 뜨지 않은 채 말했다. 용사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대체 그런 무기가 필요한 이유가 무엇이냐?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금속인 미스릴로 만든, 육 미터 길이에 가시 달린 공이 달린 괴상한 무기가 필요한 이유 말이다.”


   “아, 그거?”


   드래곤이 귀찮다는 듯 한쪽 눈을 뜨더니 말했다. 


   “요즘 등이 간지러워서 말이야. 날아다니다 내가 등을 긁어달라고 하면 그걸로 긁어 주면 돼. 너희 선조는 미스릴이 부족하다고 고작 사 미터짜리를 만들어 왔는데, 길이가 부족해서 제대로 긁어 주지 못하더라고. 몹시 짜증 났지.”


   용사는 침묵했다. 문득 그는 십칠 대 선조의 최후에 대한 기록을 떠올렸다. 영예로운 드래곤나이트였던 그는 그 명성에 걸맞지 않은 끔찍한 최후를 맞이했다. 날아가던 드래곤이 갑자기 몸을 뒤집는 바람에 오백 미터 상공에서 추락하여.......


   드래곤이 다시 눈을 감으며 꼬리를 슬쩍 저었다. 


   “제대로 만들어 오라고. 좀 시원하게 긁을 수 있는 놈으로.”


   용사는 결심했다. 왕을 어떻게든 쪼아대서, 왕국의 예산과 왕실의 숨겨진 보물까지 모두 긁어서라도 반드시 육 미터짜리 미스릴 창을 만들 것이라고. 


   아니, 기왕이면 칠 미터짜리가 더 좋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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