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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곰 Feb 02. 2020

드래곤나이트의 위상

드래곤나이트 03

“인간. 오늘 표정이 별로네?”


 “깨달았는가? 실은 그러하다.”


 용사는 팔짱을 낀 채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무래도 이 목숨을 걸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무슨 일인데?”

 

 잠시 후 드래곤이 마지못해 물었다. 용사가 일부러 뜸을 들이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무시하고 그냥 넘어가기에는 그녀의 호기심이 지나치게 강했다. 드래곤의 질문을 받은 용사가 고개를 들더니 자못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옥의 문이 열렸다. 마왕이 지상에 강림할 것이다.”


 “마왕? 누구?”


 용사가 약간 당황해하며 말했다. 


 “그대는 마왕을 모르는가? 지옥의 제왕, 악마 군대의 총사령관, 모든 악마의 어버이, 검은 악의로 뭉친 사념의 결정체, 혼돈과 파괴의 수장......”


 “잠깐만. 그런 칭호 같은 게 궁금한 게 아니라고.”


 드래곤이 짜증스레 날개를 한번 들썩였다. 이미 그 상황에 익숙해져 있던 용사는 잽싸게 한쪽 무릎을 꿇고 바닥에 앉아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그렇게 앉으면 꼴사납게 자빠지지 않고도 드래곤의 날개바람에 날아가지 않은 채 버틸 수 있었다. 드래곤이 다시 물었다. 


 “내가 알고 싶은 건, 지금 마왕이 대체 누구냐 하는 거야. 마왕의 이름이 궁금하다고.”


 용사가 당황하는 빛이 역력해졌다. 


 “이름 말인가? 전설에 이르기를 마왕의 이름은 그 자체로 마력을 지니고 있기에 누구도 감히 입에 담을 수......”


 드래곤이 노려보자 용사가 즉시 대답했다.  


 “워서 초우 시리수라유저, 라고 하더군.” 


 “아. 그 꼬맹이 말이군.”


 드래곤이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오백 년 전만 해도 코흘리개 애송이였는데 이제는 마왕 나리란 말이지. 꽤 출세했네.”




 한때 평화롭고 고요했던 너른 평야 한가운데 거대한 구덩이가 있었다. 성 하나를 통째로 집어삼키기에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거대한 구덩이는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이 패여 있어 밑바닥을 분간할 수조차 없었다. 그 구덩이의 가장자리를 타고 셀 수조차 없이 많은 악마들이 지상으로 꾸역꾸역 몰려나오고 있었다. 흉측하고 기괴한 외모의 악마들이 푸른 풀을 밟고 서서 킁킁대며 낯선 지상의 공기 냄새를 맡았다. 입가에 삐져나온 송곳니를 타고 검붉은 색의 침이 흘러내렸다. 


 악마들 중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자가 하나 있었다. 다른 악마보다 두 배나 되는 키와 덩치를 자랑하는 그는 한 손에 삼 미터가 넘는 거대한 칼을, 두 번째 손에는 창이라기보다는 기둥에 가까운 무기를, 세 번째 손에는 불길한 색으로 맥동하는 보석을 움켜쥐고 있었다. 그 검붉은 핏빛 보석이야말로 지옥을 지배하는 마왕의 상징이었다. 


 구덩이 속에서 악마들이 끊임없이 기어 나오면서 그들의 수는 계속 불어나고 있었다. 몇몇 상위 악마들이 날개를 펴고 하늘을 날면서 악마들의 대열을 정비했다. 그 모습을 보며 악마는 두 갈래진 검은색 혓바닥으로 자신의 입술과 뺨을 핥았다.


 그때였다. 악마들 몇몇이 하늘 한쪽을 손가락질하며 고함을 질러 댔다. 곧 대다수 악마들의 시선이 앞다투어 그쪽으로 쏠렸다. 그곳에는 푸른 하늘을 가르며 바람처럼 다가오고 있는 존재가 있었다. 영롱한 붉은색 비늘이 햇빛을 받아 찬란하게 빛나는 가운데, 드래곤은 그 거대한 몸집에 어울리지 않게 사뿐히 내려앉았다. 악마들로부터 백 미터 가량 떨어진 곳이었다. 삽시간에 악마들의 위로 육중한 침묵의 무게가 드리워졌다. 


 드래곤이 입을 열었다.


 “어이. 나다. 오랜만이네.”


 “누....... 누님?”


 마왕이 곤혹스러운 듯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마왕은 코와 입에서 누런 연기를 연신 내뿜으며 용사를 노려보았다. 용사는 찔끔했지만 굴하지 않고 그의 눈빛을 맞받으려 했다. 


 무리였다. 용사는 곧 먼 산을 쳐다보며 딴청을 피우기 시작했다. 잠시 마왕과 눈을 마주친 것만으로도 다리가 후들거리고 하반신에 힘이 빠졌다. 이곳에 오기 전에 미리 화장실에 다녀온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마왕이 뒤쪽을 힐끔 돌아보았다. 부하들은 그에게서 백 걸음쯤 떨어진 곳에 도열해 있었다. 자신의 목소리가 그들에게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마왕은 드래곤을 올려다보며 하소연했다.


 “누님. 내가 명색이 마왕이오. 나도 체면이라는 게 있지 않겠소.”


 “알아. 그러니까 너를 태워버리는 대신 이렇게 대화를 하고 있잖아.”


 드래곤의 대꾸에 마왕이 머쓱한 듯 머리를 긁더니 다시 간곡하게 말했다. 


 “누님. 내 말 좀 들어 보시오. 지옥의 문은 오십 년마다 한 번씩 열린단 말이오. 우리 악마들은 오십 년 내내 오직 이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오. 낙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지옥에서 유일하게 기분 전환이 되는 대형 행사니까. 인간들로 치면 뭐라 하더라....... 아, 그래. ‘기념일’ 같은 거요. 그런데 이런 날에 아무것도 하지 말고 얌전히 집으로 돌아가라 하면 애들 앞에서 내 체면이 어떻게 되겠소?”


 “...... 그것도 그렇긴 하네.”


 드래곤이 말했다. 그 목소리에 담긴 난처함을 알아챘는지, 마왕의 목소리가 한층 더 열기를 띠었다. 


 “누님. 내가 어릴 때 누님이랑 작열지옥에서 용암을 던지며 놀던 것 기억나시오? 빙한지옥 산 중턱에서는 눈썰매도 같이 타지 않았소. 그런 옛정을 봐서라도 제발 이번에는 한 번만 눈감아 주쇼. 딱 열흘만, 열흘만 지상에서 놀다가 들어가리다. 딱히 대단한 일을 벌이는 것도 아니지 않소. 그저 재미 삼아 인간들 목이나 좀 뽑고 뱃가죽이나 찢을 뿐이오.”


 마지막 문장을 말하며 마왕의 시선은 용사에게 향했다. 용사는 등허리가 얼어붙는 듯한 감각에 휩싸이며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의 목과 배를 어루만졌다. 곰곰이 생각에 빠져 있던 드래곤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너희들 사정도 이해가 가긴 하는데......”


 드래곤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용사가 찢어지는 듯한 소리를 냈다. 


 “절대 안 된다, 고귀한 드래곤이여!” 


 드래곤이 거대한 눈썹 한쪽을 치켜올렸다.


 “하지만 너도 들었잖아? 쟤도 나름대로 사정이라는 게 있다고.”


 용사는 목이 짓눌린 닭처럼 기묘한 비명소리를 내더니 다시 급히 외쳤다. 


 “하지만 드래곤나이트의 율법에 의하면 그대는 인간을 수호해야 할 의무를 지니고 있다!”


 “아 씨. 맞다. 그렇지.”


 드래곤이 투덜거렸다. 이번에는 마왕의 얼굴에 당황하는 기색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가 목을 가다듬더니 은근한 투로 말했다. 


 “하지만 누님. 내가 알기로 드래곤나이트의 맹약이라는 게 어느 한쪽이 죽으면 그 효력을 상실하는 거 아니오?”


 “맞아.”


 마왕의 의도를 짐작한 용사의 얼굴이 파랗게 질리다 못해 새하얗게 탈색되었다. 반면 마왕의 말투는 더욱 은근해졌다.


 “생각해 보시오, 누님. 누님 같은 분이 굳이 귀찮은 인간 하나 달고 다닐 필요가 뭐 있소? 그렇잖아도 누님이 드래곤나이트의 맹약을 맺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뜻밖이었소. 어쨌든 맹약은 중요하니 누님이야 저 인간에게 손을 댈 수 없지. 하지만 나는 아니잖소. 이참에 내가 저 인간을 제거해 드리면 어떻소? 누님은 잠깐 한눈만 팔고 있으면 되오.”   


 드래곤의 눈길이 용사를 향했다. 용사는 움직이지 못한 채 턱을 덜덜 떨었다. 드래곤은 한동안 용사를 쳐다보다, 뜻밖에도 한숨을 내쉬었다. 


 “에이. 그래도 그건 좀 심한 것 같네.”


 안도의 한숨은 깊고도 길었다. 대신 마왕의 얼굴에는 실망감이 가득했다. 마왕이 다시 드래곤을 설득하려 했지만 그녀가 가로막고는 말했다. 


 “잠깐만 기다려 봐. 이렇게 하는 건 어때?”




 왕은 긴급비상회의를 선언했다. 재상을 비롯한 장관들은 당장 가장 빠른 수단을 통해 회의에 참석할 것을 통보받았다. 주요한 신하들이 헐레벌떡 왕궁으로 말을 달렸고, 간혹 직접 달음박질을 치는 사람도 있었다. 올해 일흔여덟 살로 거동이 불편한 재상은 왕궁마법사의 의식을 통해 순간이동으로 소환되었다. 재상과 육부 장관들, 대장군과 왕궁마법단장까지 모두 아홉 명의 신하들이 모이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삼십 분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 앞에서 왕은 편지를 내밀었다. 발신지는 지옥, 발신인은 마왕이었고 내용은 간단했다. 


 ‘내가 지상으로 강림했음을 너희 인간에게 알리노라. 내 너희의 왕궁을 약탈하고 마을을 파괴하고자 하였으나, 너희가 감히 넘볼 수 없는 고귀한 존재가 우리를 막아섰기에 그리 하지는 않겠다. 대신 열흘 동안 우리끼리 잔치를 열고자 하니 너희는 술 일만 통과 돼지 오백 마리, 소 오백 마리, 닭 천 마리를 평야로 보내라. 혹시 술 한 통이나 닭 한 마리라도 부족하다면 그 이후의 일은 책임질 수 없다.’ 


 좌중은 침묵에 휩싸였다. 왕이 침묵을 깨뜨렸다. 


 “대장군.”


 “예, 전하.”


 “악마들과 맞서 싸운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가?”


 대장군은 잠시 망설이다 솔직히 말하기로 결정했다. 


 “왕국의 전 병력이 일치단결하여 맞서 싸운다면 이틀은 버텨낼 수 있습니다.”


 대장군은 이틀이 지난 후에 어떻게 되는지는 굳이 이야기하지 않았다. 왕은 재무장관에게 고개를 돌렸다. 


 “장관. 이것들을 준비하는 데 얼마나 걸리겠소?”


 “목숨을 걸고 사흘 안에 준비하겠습니다.”


 재무장관은 정말로 목숨을 걸 기세였다. 왕이 고개를 끄덕이는데 문득 재상이 입을 열었다. 


 “이걸 누가 가져왔습니까?”


 “용사님일세.”


 왕이 대답했다. 그때서야 신하들은 용사가 왕의 옆에 왠지 모를 불편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것을 깨달았다. 재상이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채 목쉰 소리로 외쳤다. 


 “오오 그대 거룩한 용사시여! 우리를 수호하는 위대한 드래곤나이트시여! 그렇다면 저 악마들이 말하는 고귀한 존재가, 우리들을 악마의 손길로부터 보호하고 그들이 우리를 해칠 수 없도록 약속을 받아낸 이가 바로 그대십니까?”


 용사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발끝을 꿈지럭거렸다. 그리고 오른쪽 팔꿈치를 긁고, 왼 팔뚝을 주무른 다음 시선을 어중간한 곳에 고정시킨 채 대답했다. 


 “아, 음, 뭐.......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대가 이 나라를, 죄 없는 수백만 백성들의 목숨을 구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용사님!”


 재상은 밀려오는 감동을 이기지 못하고 마침내 흐느끼고 말았다. 왕의 눈가에도 눈물방울이 그렁그렁하게 맺혔다. 왕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용사여. 지난번 지옥문이 열렸을 때 나는 열 살도 되지 않은 꼬마였소. 그러나 그때의 참혹함은 지금도 생생히 기억난다오. 나의 할아버님께서는 악마들과 맞서 싸우다 전사하셨고, 나라는 완전히 폐허가 되었소. 그런데 그대가 그런 참혹한 일을 막아 주었으니 내 어찌 답례해야 할지 모르겠소이다. 정말 고맙소.”


 그러더니 뜻밖에도 왕은 용사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당황하던 신하들도 곧 그들의 주군을 따라 함께 무릎을 꿇었다. 용사는 머쓱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무어라 중얼거렸지만 그 소리는 왕과 신하들의 귀에까지 들어가지는 않았다. 




 악마들은 약속을 지켰다. 열흘 동안 평원에서 신나게 마시고 즐긴 후, 악마들은 열흘째 되는 날 자정에 모두 구덩이 속으로 뛰어들었다. 마지막 남은 한 마리까지 모두 뛰어든 것을 확인한 후에 마왕이 다가와 말했다. 


 “체면을 세워 줘서 고맙소, 누님.”


 “뭘 그런 걸 가지고.”


 드래곤이 어깨를 으쓱였다. 마왕은 그 옆에 선 용사를 한동안 노려보다 시선을 돌렸다.


 “그럼 누님. 또 봅시다.”


 “그래. 조심해서 가.”


 마왕이 날개를 펄럭이며 구덩이 아래로 날아 내려가자, 땅이 진동하며 뒤흔들리더니 거대한 구덩이가 저절로 메꿔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진동이 그치자 그곳에 남은 것은 흙과 모래가 뒤섞인 거대한 흔적뿐이었다. 용사가 시험 삼아 발끝으로 구덩이가 있던 자리를 꾹꾹 눌러보았다. 대지는 견고하고 흔들림 없었다. 


 “고맙다, 드래곤이여.”


 “뭘 그런 걸 가지고.”


 드래곤이 똑같이 대답했다. 용사가 잠시 망설이더니 다시 그녀를 불렀다. 


 “드래곤이여.”


 “왜?”


 그녀가 용사를 내려보았다. 용사가 입을 열려다 말고 머뭇거렸다. 그리고 다시 입을 벌렸다 다물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다, 드래곤이여.”


 “싱겁기는.”


 드래곤이 투덜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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