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혜원 사태 이후의 목포를 생각하다
‘아, 이곳이 가장 아름다웠을 때는 일제 강점기 시절이었겠구나.’
쇠락해 가는 목포의 모습을 보고 이런 장탄식이 나왔다. 손혜원 전 의원의 목포 부동산 투기 의혹이 불거졌을 때 취재 차 목포를 여러 번 찾았다. 손 전 의원 측이 부동산을 매입한 번화로 일대는 일제 강점기 시절부터 목포의 중심가 ‘본정통(혼마치)’으로 상업지구였다. 옛 초원관광호텔(현 초원실버타운) 옥상에 올라 이 지역을 드론으로 촬영하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목포역과 목포항의 중간에 있는 이곳은 서울로 치면 명동 정도에 해당하는 지역인데 1980년대까지 목포 상권의 중심이었다가 이후 쇠락한다. 보통 지방도시의 구도심이 쇠락하는 이유는 시청이나 도청이 이전하거나 신도시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부터다. 목포도 마찬가지다. 하당 신도시와 전남도청이 들어선 남악 신도시 쪽으로 상권이 이동하면서 구도심의 공동화 현상이 나타났다.
목포는 여기에 몇 가지 이유가 더해진다. 목포는 항구다. 항구도시의 핵심은 해상 운송이다. 그런데 목포 북항이 생기면서 목포항은 기능이 약화되었다. 또한 전체적으로 섬 인구가 줄어들면서 목포항을 통해 섬에 드나들던 사람들도 줄었다. 섬에 드나들던 사람들이 필요한 물품을 사고 섬에 들어가지 못하면 숙식도 하면서 번창했던 목포항 일대는 쇠락할 수박에 없었다.
수산업의 기준으로 보자면 신안의 섬들이 생산도시였다면 목포는 소비도시였다. 생산도시가 쇠락하면 소비도시가 쇠락하는 것은 불문가지다. 압해대교 건설로 신안군 섬들이 연륙 되면서 목포항을 이용하는 인구는 더욱 줄었다. 어업 인구 또한 줄어서 목포항 인근에는 항동시장을 제외하고는 선구점 정도만 겨우 명맥을 이어나갈 정도로 상권이 약해졌다.
번화로에는 빈 상가 건물이 즐비했다. 낮에는 그럭저럭 상가 꼴을 갖추고 있지만 밤이 되면 일제히 불이 꺼져 을씨년스러웠다. 번화로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쇠락한 이곳에 남은 고객은 이제 노인들뿐이다. 그래서 초원관광호텔이 초원실버타운으로 바뀌었고 거리의 큰 건물 중에서도 여러 채가 노인요양 시설로 바뀌었다. 손 의원 측근들이 이곳의 건물을 쉽게 매입할 수 있었던 비결은 이처럼 거리가 침체되었기 때문이다.
친구의 처가가 이곳이라는 얘기를 듣고 수소문해 어렵게 만났다. 이 지역에서 오랫동안 선구점을 해왔고 최근에 근대건축 문화재로 지정된 건물의 소유자이기도 한 그분은 “뉴스를 보고서야 손 의원이 이곳에서 건물을 샀다는 것을 알았다. 상권이 죽어서 돈을 줘도 안 들어갈 곳인데 그렇게나 많이 샀다고 해서 의아했다. 손 의원에게 건물을 판 사람은 팔고 나가는 것이 아니라 팔고 탈출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지난 20년 동안 이곳 땅값은 떨어지기만 했다”라고 말했다.
손 의원 측이 부동산을 집중 매입한 목포시 대의동 일대는 쇠락할 대로 쇠락한 목포 구도심의 중앙에 있다. 그곳에서도 주로 폐가로 방치되었던 건물을 손 의원 측이 매입했다. 손 의원이 그곳에서 기자간담회를 할 때 누군가 잘못 건드려서 기둥이라도 넘어지면 무너질 것 같았다. 기자들이 움직일 때마다 흙먼지가 일어나서 기자간담회를 마칠 즈음에는 목이 잠길 정도였다.
하지만 번화로는 조용히 쇠락하지 않았다. 목포시는 이곳의 활성화를 위해 그동안 여러 사업을 벌였다. 얼마 전까지 이 거리의 이름은 ‘1897 개항문화의거리’였다. 관련 사업도 제법 진행되었다는 것을 거리에 남은 여러 흔적으로 알 수 있었다. 손 의원이 집중 매입한 지구 양쪽으로는 ‘민어의 거리’와 ‘건해산물의 거리’가 있다. 이 거리도 이름에 걸맞은 행사가 열렸을 것이다.
번화로와 나란히 뻗어 있는 영산로는 ‘빛의 거리’여서 도로 위에 아치형 조명시설이 설치되어 있다. 루미나리에가 전국을 강타할 때 목포에도 ‘빛잔치’가 열렸는데 이곳에 시설을 한 업자는 영특하게도 영구 설치를 해서 매년 유지보수 비용을 받아갈 수 있게 해 두었다. 이렇게 영구적인 ‘빛의 거리’를 조성했음에도 불구하고 한 번 불이 꺼진 도시는 다시 일어설 줄을 몰랐다.
이런 번화로의 몸부림 중 하이라이트는 차이나타운 조성 시도였다. 목포국제여객터미널에 중국 크루즈선이 들어선다는 이야기가 나오자 이곳을 차이나타운으로 조성하자는 움직임이 일었다. 100여 년 전 일본인들이 조성했던 거리가 살아남기 위해 중국인들의 거리로 바뀌었다면 역사의 아이러니가 될 뻔했다. 암튼 이런 요란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한번 죽은 상권을 다시 살려내지는 못했다.
하지만 번화로가 이런 모습만 있는 것이 아니다. 번화로는 가운데 목포진공원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나뉘는데 손 의원 측이 건물을 산 오른쪽은 일제 강점기에 상가였다. 반면 왼쪽은 일본인들이 거주하던 ‘남촌’으로 구 일본영사관 건물과 구 동양척식회사 건물 등 적산가옥이 많이 남아있다. 해방 이후에도 이곳은 목포의 대표적인 부촌으로 발전했다. 조선내화 창업주였던 이훈동 회장의 저택을 비롯해 보해양조 사장의 저택 등 목포 유지들
의 집이 대부분 이 동네에 있다.
사실 손 의원 전에 목포의 도시재생은 번화로 왼쪽 구역 즉 주택가를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번화로 왼쪽 구역에 사는 원로 공예가를 만나보았는데 그는 “목포의 진짜 얼굴은 손혜원 의원 측이 구입한 상가 쪽이 아니라 이곳 주택가 쪽이다. 타지에서 손님이 와서 목포를 보여준다면 가장 번듯한 곳부터 보여주는 것이 맞지 않나. 이쪽은 이미 레스토랑이나 카페가 들어서서 활성화되어 있다. 그런데 손 의원 측이 부동산을 산 상가 쪽에만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라고 지적했다.
손 의원의 부동산 투기 의혹이 불거졌을 때 목포 시민들이 여론은 대체로 손 의원에게 온정적이었다. ‘손 의원이 침체된 목포를 위해 나름 애썼다’는 쪽이 중론이었다. 기자 간담회장 앞에서 손 의원을 비난하는 1인 시위를 하려는 사람이 플래카드를 펼치자 목포 시민들이 그를 간담회장에서 떨어진 곳으로 밀어내기도 했다. 현지 지역 언론도 대체로 우호적이었다.
그 이유는 목포의 소외감이었다. 목포는 인구가 감소하고 있는 대표적인 도시 중 한 곳이다. 번화로 인근의, 수십 년 동안 방치된 조선내화 구 목포공장 부지에서 동네 어르신들이 담소를 나누고 있었는데 그중 한 분이 버려진 공장 굴뚝을 가리키며 “목포에는 큰 기둥이 저 세 개뿐이네. 근디 셋 다 연기가 안 나는 굴뚝이네. 목포가 그런 도시네”라고 말했다. 여수(여천)에 화학산업단지가 들어서고 광양에 제철소가 들어섰지만 목포는 이렇다 할 성장의 계기를 갖지 못했다. 그런 목포의 소외감이 손 의원의 투자에 우호적인 여론을 만들어냈다.
목포 출신인 고 김대중 대통령은 생전에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으로 하는 것이 정치”라고 말했다. 목포가 지역구인 박지원 민주평화당 의원이 ‘목포를 너무 사랑한 죄’로 ‘투기의 아이콘’이 되었다는 손 전 의원을 평가하는데 이 잣대를 빌어올 수 있다. 손 전 의원 재단과 측근 그리고 일가의 목포 부동산은 ‘서생적 문제의식’의 산물일까 아니면 ‘상인적 현실감각’의 결과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2년이 지난 지금 후자에 가깝지 않나 싶다. 그때 했던 기부 약속은 감감무소식이다. 법원의 유죄 판단보다 나는 기부 약속이 더 중요한 기준이라고 생각한다.
손 의원 사태를 겪으며 목포 시민들은 여러 번 상처를 입었다. 목포의 오피니언리더들은 손혜원이라는 이름을 지우고 비로소 보이는 것에도 주목해 달라고 부탁했다. 손혜원 이슈가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블랙홀이 되었는데 목포는 손 의원만 바라보고 있는 도시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한 지역 어르신은 “TV를 봉께 목포가 손혜원 입만 보고 있는 그지였는갑소, 목포 그렇게 간단한 곳 아니여라”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