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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림받더라도 나보다 나은 여행가와 협업하는 이유

독이 든 성배인가, 꿀이 든 독배인가

by 고재열 여행감독

독이 든 성배 vs 꿀이 든 독배



여행감독으로 나선 지 5년이 넘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해외에 나가기 시작한 건 이제 겨우 2년 반이 되었다. 코로나 때문에 2년 반 정도는 해외에 나가지 못하고 여행 기획만 해야 했다.


배낭여행 1세대 혹은 어학연수 1세대, 해외여행 자유화 이후 ‘세계화‘의 복음을 입었던 세대. 1970년대 초중반의 2차 베이비붐 세대. 1990년대 초중반 학번으로 한 때 X세대 혹은 신세대로 부르든 이들. 그들에게 입학 30주년 즈음의 ’여행 연합 동아리‘를 만들어 보자고 하자 열렬히 환영했다.


하지만 그 환호는 코로나에 완벽히 묻혔다. 실전은 뛰지 않고 준비운동만 2년 반 동안 해야 했던 여행감독은 잊혔다. 마치 프로포즈 하고 2년 반 뒤에 데이트 신청을 한 것처럼, 이제 여행 가자는 말에 반응은 싸늘했다.


그래도 과감히 시작했다. ‘어른의 여행을 위한 좋은 플랫폼이 되는 여행클럽‘을 만들어 보기로 했다. 되도록 모든 여행에 시종일관 함께 했고, 답사여행을 바탕으로 다음 여행에 업그레이드시킬 부분을 궁리했다.


여행은 경험치의 세계다. 경험이 많은 사람이 고수다. 내가 안 가본 곳의 여행을 기획할 때 여행의 고수들과 콜라보를 한다. 이걸 바보짓이라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기껏 사람들 모아놓고 그들에게 고객을 다 빼앗길 거라고.


맞는 말일 수 있다. 하지만 붙든다고 붙들리겠는가. 더 좋은 여행이 보이면 그쪽으로 가는 것은 인지상정. 애초 ‘어른의 여행, 트래블러스랩’을 만든 이유가 좋은 여행을 코디네이팅 하겠다는 것이었으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좋은 여행만 고민하기로 했다.



루이나이웨이라는 중국 여성 프로 바둑기사가 한국이나 일본에 귀화하려고 했을 때 일본기원은 이를 막았다고 한다. 자국 여성 기사들을 보호하기 위해. 반면 한국기원은 받았다고 한다. 우리 여성기사들이 성장할 기회라고. 이후 일본 여성 바둑계에 비해 한국 여성 바둑계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고 한다.


여행도 비슷하다고 본다. 그들과의 콜라보로 노하우를 많이 배울 수 있다. 확실한 건 여행에 대해서는 그들이 많은 노하우를 가지고 있다는 것. 그래서 현지 여행사뿐만 아니라 이런 여행의 고수들과도 협업한다(사실 현지 여행사와 협업하는 것이 더 수월하긴 하다).


대부분의 여행사는 커스터마이징을 잘 안 해준다. 해주는 척, 되도록 자신들이 깔아놓은 여행 컨베이어 벨트를 지나가도록 유도한다. 그래야 일도 쉽고 이윤도 나기 때문이다. 물론 여행사가 여러 번 진행한 방식으로 하면 안정적으로 진행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 맞는 여행은 아닐 수 있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고 좋은 여행만 고민하고 있다. 여행의 고수라고 해서 모든 여행지를 다 잘하지는 않는다. 다들 자신의 전공 분야가 있다. 그들이 잘하는 것만 함께 하면 된다. ‘어른의 여행, 트래블러스랩’은 원래 플랫폼 모형이다. 여행사가 아니라 여행클럽을 만든 이유다.



또한 여행가마다 자신의 스타일이 있다.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다. 결국 여행 스타일이 맞는 사람과 함께 하게 된다. 와인도 비교 시음을 해봐야 맛 비교가 되는 것처럼 다른 사람의 스타일을 알아야 내 스타일을 선명하게 알 수가 있다. 협업은 트랩 스타일을 정립하는 데에도 도움을 주었다.


여행클럽을 만들 때 처음부터 고민의 방향이 달랐다. 맞춰주는 것을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맞는 사람을 찾는 것을 고민하기로 했다. 맞춰주려고 노력할 시간에 맞는 사람을 찾는 노력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맞는 사람을 찾기 위해서는 내 색깔이 선명해야 한다.


트래블러스랩 여행이 점점 더 선명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돈과 시간과 에너지를 의미 있고 가치 있고 재미있게 쓰는 여행, 이것이 트랩의 지향점이 아닌가 싶다. 단순히 돈을 아끼는 것이 아니라, 이것저것 많이 보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쉼이 있는 여행으로!


올해에도 더 많은 여행 고수들과 여행 콜라보를 하려고 한다. 그래서 좋은 여행을 더 폭넓게 고민하려고 한다. 독이 든 성배인지, 꿀이 단 독배인지, 일단 받아 마실 것이다. 취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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