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의 여행, 트래블러스랩’ 여행클럽의 유럽 여행은 대부분 10박11일로 구성하고 있다. 마치 노래 한 곡에 적당한 시간이 있듯 여행 한 편도 적당히 끊어줄 타이밍이 필요하다. 우리 여행클럽 여행에 오는 ‘어른’들은 통상적으로 유럽 10일 정도에 적합한 여행 체력을 가지고 있다. 그보다 길어지면 면역력이 떨어지고 몸이 무거워지는 게 확연히 드러난다.
10박의 여행에는 적절한 박자와 리듬이 필요하다. 박자는 숙박지로 맞추고 리듬은 방문지로 구성한다. 청춘의 여행이 템포 빠른 랩이나 격렬한 록이라면(간혹 헤비메탈도) ‘어른’의 여행은 은근한 포크나 살짝 끌어올리는 발라드 정도로 비유할 수 있다. 어른의 여행엔 어른의 리듬이 필요하다. 젊은 유튜버들이 '어디어디에 가면 꼭 가봐야 할 곳' '꼭 먹어봐야 할 것'을 꼽곤 하는데 그런데 따라다니다간 가랑이 찢어진다. 숙박은 피치 못할 사정이 없는한 연박으로 구성한다.
이번 아드리아해 소도시기행은 다소 무리해서 왕복 일정으로 구성했다. 몬테네그로 코토르에 꼭 다녀오겠다는 욕심 때문이었다. 그러다 보니 박자와 리듬이 좋지 않았다. 답사 성격의 여행이라 이곳저곳을 체크해 보느라 일정에 좀 무리수가 있었다. 하지만 이런 수고를 바탕으로, 내년에 아드리아해 소도시기행을 재구성할 때는 더 좋은 박자와 리듬이 나올 것으로 기대한다.
이번 아드리아해 소도시기행은 기본적으로 아드리아해 해안선을 따라서 내려가는 일정으로 구성되었다. 슬로베니아-크로아티아-몬테네그로 차례로. 이런 구성은 가장 무난하지만 지루한 구성이기는 하다. 그래서 산과 바다를 엇박으로 배치했다. 슬로베니아에서는 블레드 호수와 트리글라브산에 방점을 찍었고 크로아티아 내륙에서는 플리트비체에 포커스를 두었다(안타깝게도 이번에 몬테네그로 내륙의 국립공원 지역으로는 어프로치를 못했다).
블레드 호수에서 가을을 제대로 만끽하고 왔다. 한국과 일본에서 놓친 가을을 슬로베니아에서 맞을 줄이야. 블레드 호수는 여름보다 가을이 더 좋았다. 날이 흐려 아득하고 아련했던 블레드 호수의 만추는 중세로의 시간여행을 이끌었다. 이번 아드리아해 소도시기행의 첫 시퀀스는 블레드 호수를 중심으로 구성했다. 여름에는 야스나나 젤린지 호수에서 더 좋은 느낌을 받았는데 가을의 블레드 호수는 나무랄 데가 없었다.
그런 기분이었다. 젊은 날의 압도적인 미모를 기억하는 여인이 중년이 되어 너무나 고혹적인 모습을 하고 다시 나타났을 때의 느낌. 여름날의 싱그러운 블레드 호수를 기억하고 있어서 만추의 호수가 더욱 아름답게 보였다. 목가적인 풍경 속에서 여유 있게 2박3일을 보내고 크로아티아의 섬 휴양지 크레스로 이동했다. 블레드 호수는 내년 동알프스 트레킹 때 다시 만나기로 기약하고.
트리글라브산은 지난여름 알프스어라운드 트레킹 때 마지막으로 갔던 곳인데 일부러 다시 찾았다. 돌로미테 트레킹을 마치고 2주 동안 알프스트레킹까지 했더니 일행들이 모두 지쳐 이곳에서는 트레킹 대신 호반 휴식을 취하느라 제대로 보지 못했었다. 야스나 호수에서 멀리 바라보기만 했던 트리글라브산에 가보았다.
이번에는 트레킹 여행이 아니라서 많이 걷지는 못하고 트레킹 포인트를 점검하고 왔다. 페르치니크 폭포 쪽 협곡으로 들어가 보니 고봉 바로 아래까지 임도가 있어서 트레킹이 용이한 편이었다. 트리글라브는 알프스산맥의 막둥이격인 산이다. 서쪽 몽블랑에서 큰 방점을 찍고 이어지는 알프스산맥은 트리글라브에서 마지막 획을 긋는다. 우뚝하고 웅장한 산들이 마치 원탁회의를 하듯 모여있어 인상 적이었다. 내년 동알프스(티롤) 트레킹 때 꼭 걸어보기로.
플리트비체 호수는 이번에 처음 가보았다. 물이 있는 풍경을 좋아해서 호수는 되도록 챙겨 보는데, 플리트비체는 압도적이었다. 뭐랄까 그림 같은 풍경을 넘어서, ‘그림도 이렇게 그리면 욕먹어’라는 말이 나올 정도의 풍경. 슬로베니아 블레드 호수의 만추에 충분히 감동했는데 플리트비체는 감동을 넘어서 경외감까지 든다. 내년 아드리아해 소도시기행 때는 산장에 묵으며 천천히 음미해 볼 예정.
아드리아해 해안선을 따라 내려갈 때는 줄줄이 눈깔사탕이 되지 않도록 유의했다. 여행 아이템이 줄줄이 비엔나 소시지로 반복되면 초반의 감동이 급격히 반감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되도록 섬에 숙소를 잡아서 동선을 섬으로 뽑아냈다. 크로아티아는 그리스 다음 가는 해양대국이라 페리 특히 차도선이 발달되어 있어 섬을 드나드는데 불편함이 없었다(다만 비수기라 배 운항 횟수가 적었다). 적절한 단절감이 주는 여행 기분을 내볼 수 있었다.
이번 아드리아해 소도시기행에서는 크레스 크르크 우글란 섬에 들어가 보았는데, 덕분에 여행의 리듬이 느슨해져서 좋았다. 페리로 불과 20~30분이면 어프로치가 되는 섬이지만 단절감을 충분히 주었다. 섬에 여장을 풀면 여행이 휴양이 되는 느낌이 든다. 국내도 마찬가지다. 다들 '시간이 멈춘 듯한 느낌이 든다'라고 말한다.
크로아티아 해변도 가능한 두루 돌아보았다. 로빈 - 풀라 - 리예카 - 자다르 - 스플리트 - 마카르스카 - 플로체 - 두브로브니크. 크로아티아 해변은 같으면서 달랐다. 모두 아름다운 '아드리안 블루'를 품고 있었지만 어떤 곳은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좋았고, 어떤 곳은 포구가 좋았고 또 어떤 곳은 은근한 습지가 좋았다. 이중 내년 숙박지로 점찍은 곳은 리예카와 마카르스카다.
리예카는 크레스와 크르크섬 데이투어를 할 수 있는 기점 항구라서 다시 이용하기로 했다. 특히 숙소가 마음에 들었다. 비수기 5성급 리조트 호텔의 가성비를 십분 활용할 수 있어서 좋았다(이번에 이용하지 못한 미슐랭 원스타 레스토랑도 내년엔 꼭 이용해 보기로~). 쌀쌀한 계절이라 스파와 사우나가 자못 매력적이었다.
마카르스카는 크로아티아 포구 중에서 한국인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서양 포구의 형태를 하고 있어서 머물기로 했다. 아마 크로아티아 포구를 그리려면 이렇게 그릴 것 같은 포구, 방파제에서 멍 때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는 곳이었다(이번에는 자다르 앞 섬에 숙소를 잡았는데 내년엔 마카르스카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마지막 하이라이트는 역시나 유럽 부자들의 핫플인 몬테네그로 코토르. 풍경이나 호텔이나, 확실히 코토르가 아드리아해에서는 넘사벽이다. 여기서 비수기 플렉스를 해보면서 여행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아드리아해 록발라드의 고음부를 코토르가 담당해 줄 예정이다.
테라 사태를 일으킨 권도형의 도피처로 알려진 몬테네그로는 요즘 유럽 신흥 부자들의 휴양지로 부상하고 있는 곳이다. 모나코니 니스, 키프로스처럼. 부자들을 모으는 세 가지, 낮은 세금 고급 리조트 그리고 좋은 기후. 부자들이 모여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은? 해변의 고급 요트들.
아드리아해를 따라 내려오는 해안선 3국 중 슬로베니아의 국민소득이 가장 높다. 그다음이 크로아티아고 몬테네그로가 가장 가난하다. 하지만 휴양지 수준은 역순이다. 슬로베니아는 소박하고 크로아티아는 좀 더 화려하고 몬테네그로에 오면 화려함의 정점을 찍는다.
몬테네그로의 대표 휴양지는 코토르와 부드바인데 그 중간인 포트 보카 주변에 고급 휴양지와 럭셔리숍이 몰려있다. 비수기인데도 이곳만은 화려하다. 뭔가 동떨어진 별세계를 보는 느낌. 럭셔리한 여행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지만, 비수기에 아드리아해를 따라서 해보는 건 꽤 괜찮은 듯.
아드리아해 지역은 전체적으로 음식이 훌륭했다. 슬라브인들이 내려와 정착했지만 음식은 로마와 베네치아 공화국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 슬로베니아 음식은 이탈리아 북부 산악지역 음식과 많이 닮았고, 크로아티아 음식은 베네치아랑 닮았다. 몬테네그로도 이탈리아 음식의 영향이 진했고.
이번 여행 참가자 중에서 이탈리아 여행을 마치고 온 부부가 있었는데 전체적으로 음식이 이탈리아보다 더 낫다고 평했다. 대체로 스파게티는 이탈리아보다 잘 못하는 편, 피자는 비교적 잘하는 편, 해산물 요리는 무척 잘하는 편! 유럽에 해산물 요리가 풍부한 나라가 많지 않은데 아드리아해 국가들은 비교적 풍부한 편이었다. 오징어구이를 엄청 먹고 왔다. 특급 호텔 음식 가격이 이탈리아 관광지 수준의 물기여서 좋은 음식을 골라먹기 좋았다.
취소자가 너무 많아 적자여행이었지만 1도 후회되지 않는다. 유럽 여행의 좋은 여행의 리듬과 박자를 하나 찾았기 때문이다. 내년에도 이맘때 아드리아해를 다시 돌아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