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야마 - 아힘사, 작은 존재에서 시작하는 비폭력
집으로 돌아가는 골목길, 엄지손가락만큼 큰 똥파리가 출몰해 귓가를 웽하고 맴돌았습니다. 비명을 지르며 머리와 팔을 있는 힘껏 휘저으며 파리의 날갯짓에 한참 동안 허우적 됐습니다. 그렇게 허공에 팔을 휘젓는 모습이 스스로 생각해도 어찌나 우스꽝스러운지 갑자기 머쓱해졌습니다. 파리가 멀찍이 물러나 '피식'하고 비웃는 것만 같았습니다.
별것도 아닌 일로 호들갑을 떨 때가 많습니다. 파리는 나를 공격한 게 아니라 그저 길을 지나가는 중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엄지 손가락만 한 파리를 온 힘을 다해 공격하고 있었던 것은 바로 나였습니다.
파리는 익충입니다. 음식물, 동물의 사체, 배설물을 순식간에 분해합니다. 생태계의 청소부인 파리는 지구에 꼭 필요한 생명체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세상에 유익한 동물일까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걸까요?
프롤로그에서 미리 질문을 하나 남겨두었었죠. 기억이 나실지 모르겠습니다.
Q. 폭력 없는 삶은 어떤 삶일까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실눈을 뜨고 봐도 폭력이 난무합니다. 그 폭력은 힘의 논리에서 발생된다고 보입니다. 전쟁, 갑을 관계, 가정폭력, 학교폭력, 사회적 차별 등 걷잡을 수 없을 것만 같은 일들이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나의 내면에 점을 찍고 내가 행한 폭력을 살펴봅니다.
저는 여름에 살생을 자주 합니다.
여름이 되면 팔을 뻗어 바로 잡을 수 있도록 파리채를 근처에 둡니다. 윙 소리가 나면 신속하게 파리채를 들고 신중하게 힘을 조절한 뒤 위치를 포착해 내리칩니다. 파리를 압사시킨 뒤 별것 아니라는 듯 쓰레기통에 파리채를 털어 시체를 무심히 떨어뜨립니다.
저는 파리정도는 죽여도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윙 거리며 귓가를 간지럽히는 그 소리가 나를 괴롭히니까요. 충분히 파리채로 내리쳐도 된다고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아쉬탕가 철학에서 첫 번째 규율인 야마(Yama)는 '절제, 억제, 자제'의 뜻을 가지고 있고, 번역을 하면 '도덕적 금계'라고 해석됩니다. 파탄잘리 『요가수트라』에서는 야마(Yama)를 '보편적인 도덕적 규율', '타인과 세상과의 관계에서 반드시 지켜야 할 절제'로 풀이합니다.
간단히 말해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듣기만 해도 갑갑한 말이죠? 솔직히 말씀드리면 몸에 칭칭 야마라는 결계를 쳐서 나를 꼼짝 못 하게 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게다가 그 안에 금하고 있는 것이 다섯 가지나 됩니다.
아힘사(Ahimsa) – 비폭력
사티야(Satya) – 진실
아스테야(Asteya) – 도둑질하지 않음
브라마차리야(Brahmacharya) – 감각적 절제
아파리그라하(Aparigraha) – 탐욕을 버림
이쯤에서 그냥 요가 철학을 접어버리고 싶은 유혹을 느낍니다. 그래도 철학이라는 것이 지혜를 사랑하는 과정이라고 하니까, 지혜로운 노파가 되기 위해 유혹을 떨쳐봅니다.
오늘은 간단하게 아쉬탕가 철학의 뿌리 야마(Yama)에서 첫 번째 규율인 아힘사(Ahimsa) – 비폭력만 살짝 들어가 볼까 합니다.
세상에 모든 폭력을 바라보면 한숨만 절로 나옵니다. 그것이 남의 일인 것처럼 쯧쯧 혀를 찼는데, 사실 제 내면에는 많은 폭력들이 내재되어 있었습니다.
똥파리와 한 판 승부를 펼쳤던 날을 다시 떠올려봅니다.
저는 '파리를 죽여도 된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보잘것없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아힘사는 "이 세상에 보잘것없는 것은 없다"라는 인식에서 비폭력이 시작된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폭력을 정당화할 수 있게 되는 이유는 "그래도 된다"라고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그래도 되는 게 어디 있겠습니까.
파리 한 마리는 지구를 청소하여 생태계를 깨끗하게 해주고 있습니다. 오히려 생태계를 교란시키고 파괴하는 것은 우리 인간입니다. 인간은 세계의 주인이라고 단단히 착각을 하고 삽니다. 인간이라는 집단적 의식아래 자연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한 민족이라는 의식으로 뭉쳐 다른 민족에게 폭력을 감행합니다. 단체라는 공동체 의식에 입각하여 다른 단체를 공격하기도 하고, 가정 안에서는 부모의 권력으로 폭력을 행사합니다. 더 나아가 스스로를 억압하기에 이릅니다.
<감정의 늪>이란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 부족한 글이지만 참고해 주세요. 04화 감정의 늪 (brunch.co.kr)
아이에게 휘두른 폭력성에 대해 돌이켜 생각하며 쓴 글입니다. 이 글을 쓰면서 실제로 폭력행위를 하지는 않았지만,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폭력성으로 인해 표출된 감정 또한 상대에게 폭력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나도 모르게 행해지는 타인을 향한 폭력성은 결국 잘못된 시선과 인식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아힘사를 통해 돌이켜봅니다.
무의식에는 학습된 폭력성이 고스란히 저장되어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폭력을 행하게 하는 잘못된 인식을 나도 모르게 배우는 거죠. 나도 모르게 파고든 잘못된 사고체계는 폭력적인 태도를 취하도록 내 안에 설계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인식과 시선을 가져야 할까요?
경계를 나누지 않는 것과 생존하는 모든 것은 소중하다는 인식이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다가 어느 날 저는 혼란에 빠졌습니다.
저는 모기를 굉장히 싫어합니다. 초대하지 않은 모기 한 마리가 허락도 없이 집으로 들어와 제 몸 곳곳에 빨대를 꽂고 맛있게도 피를 쭉쭉 흡혈하니까요. 웽 소리가 들리는 즉시 불을 켜고 충혈된 눈은 치켜뜬 채 모기를 죽일 태세를 갖춥니다. 제 피를 빨아먹은 모기를 발견한 순간 살금살금 최대한 기척을 없애고 다가갑니다. 천천히 손바닥을 가져가 적절한 타이밍에 탁 내리쳤을 때, 팍 하고 터지는 피를 보며 전율을 느낍니다.
이런 제 마음은 아힘사가 부족한 걸까요?
모기도 생명인데 폭력을 행하여 살생을 했으니 저는 폭력적인 사람인 걸까요?
파리와 모기를 보면서 저는 딜레마에 빠졌습니다.
요가철학에서의 아힘사는 완벽하게 폭력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최소한의 폭력으로 자신을 지킬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제시합니다.
저는 모기를 차단하기 위해 갖가지 방법을 사용하여 벌어진 창틀을 모두 메웠습니다. 작년에 저는 모기를 하루에 5마리 이상 잡았는데 올해는 어쩌다 한 마리를 잡는 걸로 여름을 마무리했습니다.
이 행위가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제 나름대로 고통을 줄이며 살생을 피하는 방법을 선택한 것입니다. 아힘사에 대해 공부하면서 인식을 좀 바꿔보고 싶었습니다.
폭력을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 '모든 생명은 소중하다'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고 말이지요.
내가 소중한 만큼 다른 존재도 소중합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뿐만 아니라 살아있는 모든 것을 소중히 해야 합니다.
'폭력에 대한 합리화를 금지하는 것'이 아힘사(비폭력)가 아닐까 저는 결론을 내려봅니다.
"그래도 된다"라는 합리화를 없애야 합니다.
나를 소중히 해야 합니다. 또한 그만큼 다른 존재도 소중히 해야 합니다.
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시작해 그 마음이 세상으로 퍼져나갈 때 비폭력의 사회가 완성될 수 있을 겁니다.
파리와 모기는 한낱 가치 없는 존재라 여겼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던 잘못된 시선을 알아차렸습니다.
비폭력은 소중함을 아는 사람만이 지킬 수 있는 금계입니다.
거대한 세상에 미세한 존재인 우리가 작은 것을 하찮게 여길 정당성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작은 것이 거대할 수 있고 거대한 것이 미세할 수도 있으니까요. 세상은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모든 철학은 시선에서 시작됩니다.
생태계의 청소부인, 세상에 꼭 필요한 존재인 파리. 세상에는 어쩌면 불필요한 것은 없을지도 모릅니다. 단지 인간의 기준으로 익충, 해충을 가르고 있는 게 아닐까요?
존재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을 겁니다. 한낱 우리가 그 깊은 뜻을 어찌 다 헤아리겠어요?
'크든 작든 모든 존재는 소중하다'라는 인식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는 것.
그것이 야마에 첫 번째인 아힘사(비폭력)입니다. 나를 지키면서 폭력을 최소한으로 줄이며 살아가는 것이 아힘사를 실천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지금 요가철학 아쉬탕가 8단계에서 뿌리가 되는 야마(Yama). 그 가운데 첫 번째 규율 <아힘사(비폭력)>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잊으셨을까 봐 다시 짚어봅니다.)
아힘사를 이야기하면서 저는 예전보다 조금 겸손해진 것 같습니다. 우리는 개개인이 독립적이지만 함께 살아갑니다. 그렇게 공생하기 위해서는 아힘사(비폭력)를 꼭 실천해야 합니다. 한 사람의 시선이 변화할 때 세상이 변하니까요.
세상을 크게 보지 않으려고 합니다. 작은 존재들을 소중히 여기며 만들어내는 작은 세상을 바라보려고 합니다. 그 작은 세상이 모여서 좋은 세상이 만들어지겠지요? 크게 생각하면 어려우니까 저는 모기와 파리에서 시작해 보았습니다. 여러분도 아힘사의 시선으로 주위의 작은 존재를 바라보려고 노력해 보세요.
그렇게 하나의 점을 찍어보는 겁니다. 아무것도 아닌 점이 어디로 연결될지 기대가 되지 않나요?
여기서 그냥 끝내면 아쉬우니까 요가 아사나로 마무리를 해볼까 합니다.
아힘사의 시선을 가지기 위해 자신을 낮추고 겸손해지는 아사나를 소개합니다.
웃타나아사나 (Uttanasana)입니다.
서서하는 전굴 자세예요. 산스크리트로 ut는 "강하게, 강렬하게", tan은 "늘이다, 펼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곧게 서 있다가 상체를 깊게 접어 아래로 늘여주는 동작입니다.
웃타나사나를 실행해 볼까요?
하나. 타다아사나(산자세)로 곧게 섭니다.
둘. 숨을 내쉬며 엉덩이에서 접듯 상체를 앞으로 숙이고, 척추를 길게 늘여 아래쪽으로 뻗어줍니다.
(주의) 등이 굽는다면 조금 올라온 상태에서 척추를 펴보세요.
셋. 손바닥이 바닥에 닿으면 좋겠지만, 무릎 뒤·정강이 또는 블록을 놓고 그 위에 손을 두어도 충분합니다.
넷. 머리는 무겁게 내려놓고 목에 긴장을 풀어줍니다.
그리고 호흡을 하세요. 깊고 길게, 복부와 허리 뒤가 부드럽게 늘어나는 걸 느껴 봅니다.
잘 익은 보리가 고개를 깊이 숙이듯이 머리를 낮추고 자신을 부드럽게 만들어보는 거예요.
작은 것을 바라보며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사람으로 변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 내면에 찍은 점은 지금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곧 온몸으로 번져 세상밖으로 퍼져나갈 거예요.
철학은 지혜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죠?
지혜를 추구하며 나아가는 과정이 철학이고 그 과정에서 삶은 조화로워지니
첫 번째 점이 퍼져 조금 더 지혜로워졌기를 바라봅니다.
다음 시간에는 아쉬탕가 철학의 뿌리인 야마(Yama).
두 번째 규율 <사티야(Satya): 거짓을 벗고, 진실을 말하는 용기>에 대해 이야기 나누어보겠습니다.
미리 질문을 던집니다.
Q. 진실을 말하는 것이 두려울 때가 많습니다. 그 두려움으로 진실을 묻어버렸을 때도 많고요.
내 안에 거짓을 가득 채우고 전혀 다른 이야기를 풀어놓을 때도 있어요.
두려움을 뚫고 진실을 말해본 적이 있나요?
다음 시간에는 두려움에 가려진 진실, 두려움을 뚫고 드러낸 진실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그럼.. 다음 시간에 이야기 나눠요.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이야기 예고>
사적인 요가 철학이야기
아쉬탕가 철학의 뿌리인 야마(Yama)에서의 두 번째 규율
<사티야(Satya): 거짓을 벗고, 진실을 말하는 용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