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의사가 부르는 오페라|별은 빛나건만 E lucevan le stelle
어렸을 때 당신은 무엇을 꿈꾸었나?
가끔 생각해 본다. 어렸을 적 꿈꾸던 미래의 내 모습에 얼마나 가까운 삶을 살고 있는지 말이다. 어렸을 때는 누구나 자기거대감을 느끼며 슈퍼맨을 꿈꾼다. 장래희망란은 대통령, 과학자, 외교관, 연예인, 변호사, 의사 등 소수만이 가진 직종들로 즐비하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부모 역시 자신의 아이들이 특별한 존재일 것이라는 희망에 부풀어 있다. 장래희망은 아이들의 희망과 동시에 부모들의 희망직종이다.
나와 부모님 또한 그랬다.
아이들은 자라나면서 자신의 힘에 한계를 느끼고, 자기거대감을 부모에게로 투영시킨다. 그러면서 “우리 아빠가 너네 아빠보다 싸움 잘해!”, “우리 엄마가 제일 예쁘고 똑똑해!”라는 다소 유치한 어록을 남기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많은 경험을 쌓으며 성장한 후에서야 비로소 온전히 자신이 쌓아 올린 자존감을 키워 나간다.
그때 그 시절, 커다란 산처럼 보였던 아버지의 등이 점점 작아지는 것 같은 느낌은 착각이 아니다. 부모의 신체적인 노화가 시작되고, 자식은 성인이 되어 정점에 오르기 때문이다. 호랑이 같던 아버지 역시, 작아진 자신이 아니라 점점 커지는 자식들에게서 자존감을 얻는다. 이번에는 부모님들이 “우리 아들이 또 연봉이 올랐대!”, “우리 딸이 유럽 여행을 보내주더라고!”라는 은근한 자랑을 남긴다.
장래희망란에 썼던 그 직업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부모님의 자랑이고, 부모님 역시 나의 자랑이다. 부모와 자식은 서로서로 자존감 지킴이가 되어주며, 부족한 점을 채워 준다. 그러나 오늘은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가 아니라, 그 시절 꾸었던 꿈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꿈은 이루어진다
아직 넓은 세상을 만나지 못했던 철 모르는 시절, 내가 꿈꿨던 나의 모습을 떠올려 보자. 아주 허황되고 주제넘어 밝히기 수치스러운 그런 꿈들을 말이다. 그런 꿈들이 성인이 된 지금 이루어졌는지도 생각해보자. 아주 겸허한 위버멘쉬가 아니고서야, 100프로 꿈을 이룬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싶다.
그런데 아주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았던 가슴속 한 편의 ‘꿈’을 중년이 되고 나서야, 그것도 아주 우연찮게 이룬 사람이 있다. 물론 영화 속에서지만 말이다.
오늘 ‘꿈’과 엮어 볼 영화는 우디 앨런의 <로마 위드 러브>다. 이 영화는 각기 다른 네 가지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다. 결국은 인간의 삶이라는 공통된 주제를 다루고 있으므로, 일종의 옴니버스 영화와도 같다고 생각한다.
네 가지 이야기 중 가장 마지막 편은 영화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한 커플이 서로의 부모님을 소개하는 상견례 자리에서 시작한다. 감독이자 극 중 등장하는 커플의 여자(헤일리)측 아버지로 열연한 우디 앨런은 은퇴한 음악 감독으로 나온다. 헤일리는 로마에서 미켈란젤로라는 이탈리아 남자와 사랑에 빠져 결혼까지 하게 되는데, 미켈란젤로의 아버지가 바로 ‘꿈’을 이룬 주인공이다.
미켈란젤로의 아버지 카를로는 장의사다. 인간의 죽음을 다루는 숭고한 직업에 이어, 아주 고급진 취미를 갖고 있다. 카를로는 샤워를 할 때마다, 오페라를 부른다. 그것도 아주 수준급으로 불러 젖힌다.(실제로 카를로 역할을 맡은 배우는 이탈리아의 국민 테너 파비오 아르밀리아토라고 한다.) 전직 오페라 음악 감독이었던 제리(우디 앨런)는 사돈의 반짝반짝한 재능을 놓치지 않고, 그를 무대 위로 세우려고 한다. 그러나 재능은 갖고 태어났지만 음악가로서의 애티튜드가 익숙지 않았던 카를로는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묵혀 놓았던 꿈을 포기해 버리려고 한다.
제리는 평생을 바쳐 커리어를 쌓아 온 ‘음악 감독’ 타이틀을 놓치기 싫어 묘수를 자아내 본다. 사돈의 노래를 처음 들었던 그때, 바로 샤워 부스 안에서 기가 막히게 오페라 아리아를 열창하던 카를로의 모습을 떠올리며 말이다. 결국 제리는 무대 위에 샤워부스를 설치하여, 카를로가 자연스럽게 노래를 부를 수 있도록 무대 장치를 설치하기에 이르고,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영화 속에서 우디 앨런은, 아니 제리는 부모가 자식에게 희망을 투사하듯 카를로를 성악가로 만들었다. 은퇴한 음악 감독 신세를 면하려 마지막 승부수를 띄운 것이다. 카를로는 제리에게 “아들의 치솟는 연봉”이나 “딸의 해외여행 투어 티켓” 같은 존재였다.
꿈은 결국 이루어졌다. 하지만 재능이 있어야 하고, 재능을 끌어올려줄 후원이 있어야 하고, 본인의 의지가 있어야 한다. 보통은 어떤 한 가지 이상의 요인이 결핍되어 꿈은 꿈으로 남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여건이 갖춰지면 꿈을 이루는 것은 시간문제다. 부모는 자식의 재능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하고, 자식의 재능에 맞는 꿈을 키워 주어야 한다.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을 투사하여 억지로 다른 길을 가게 해서는 안될 일이다. 자식은 자신의 재능을 고려하고 목표를 세우고, 의지를 갖고 무엇이든 실천해야 한다. 아무리 은수저로 밥을 떠먹여 준다 한들, 씹지 않고 급하게 삼키면 체하기 마련이다.
부모와 자식 간의 완벽한 호흡이 맞추어질 때 꿈은 이루어진다. 자식은 부모의 덕을 보고, 부모도 자식 덕을 보게 된다. 꼭 부모와 자식 관계가 아니더라도 재능 있는 자와 후원자 사이의 관계에는 객관성과 의지, 상호 존중의 태도가 동반되어야 한다. 그러면 반드시 서로의 덕을 볼 것이다. 그런 관계는 꿈이라는 목표로 함께 달려가는 2인 3각 경주를 함께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한 명이 쓰러지면 다른 한 명도 함께 쓰러진다.
끝으로 극 중 카를로가 샤워 부스 안에서 부른 곡은 푸치니의 오페라 토스카에 나오는 아리아 <별은 빛나건만(E lucevan le stelle)>이다. 이 노래는 총살형을 앞둔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과 보냈던 지난날들을 회상하며 부르는 노래다. 죽음을 앞두고 가장 행복했던 시간을 떠올리며 절규하듯 토해내는 이 곡은 마치 스완송과도 같다. 백조가 죽기 직전 딱 한 번 부른다는 아름다운 노래 말이다. 아무튼 이 노래를 부르고 나서, 제리와 카를로는 지난 삶과 이별하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으니, 영 뜬금없이 선곡한 아리아는 아닌 것 같다는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