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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andmer Jul 09. 2023

일본 경제 부담 없이 읽기

일본의 발전과 잃어버린 30년 그리고 그 후는 어떻게 될 것인가


[ 글을 시작하기 전에 ]


일본이라는 나라는 패전의 잿더미 속에서 불과 20여 년 만에 세계 제2의 경제대국으로 올라서는 기적을 보여주어, 저명한 경제학자들도 일본의 자본주의를 부러워했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잃어버린 10년에서 잃어버린 20년 지금은 잃어버린 30년까지로 확대되고 있습니다. 


지속된 경기침체를 겪고 있으니, 뜨는 해에서 지는 해로 저평가받고 있는 변화무쌍한 일본을 어떻게 쉽게 판단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현재 일본은 잃어버린 30년을 극복하고 예전과 다른 형태의 경제적인 변화를 만들어내고자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 변화가 다시 재건되는 10년이 될 것인지 혹은 잃어버린 40년으로 이어지게 될 것인지 과거를 보고 미래를 파악해 보도록 하자. 


Ⅰ. 울고 싶은데 뺨을 때린 페리


청나라와 영국 사이에 일어난 아편전쟁에서 청나라가 영국에 패했다는 소식은 일본에도 들려왔습니다. 


동아시아의 대국이었던 청나라가 이 정도라면 일본이 서구 세력의 침략에 맞붙어 이길 수 있으리란 기대는 아예 접어야 하는 건 아닌가 하는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네덜란드 국왕은 일본에 편지를 보내 세계 상황의 변화를 알리면서 일본이 하루빨리 개국해야 한다고 권유했지만, 지금까지 고수해 왔던 쇄국정책을 포기한다는 것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은 결정이겠지요. 


당시 태평양까지 영토를 넓히고 있던 미국은 중국과 무역을 개시하기 위해 태평양 항로를 지나는 관문에 있던 일본에게 항구를 개항해 줄 것으로 요구하였습니다. 


1853년 6월 3일 미국의 함대 장관인 페리는 4척의 군함을 이끌고 우라가에 도착한 이후 미국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하였습니다. 


그것은 일본 근해에서 미국 선박이 조난을 당하거나 혹은 일본 항구에 정박할 경우에는 미국 선원을 보호해 줄 것과, 미국 배에 대한 연료, 식수, 음식과 석탄 보급, 그리고 자유무역을 조건으로 개항을 요구하는 일방적인 내용이었습니다. 


막부는 개국을 거부했지만 미국의 군사력 앞에 개항을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미국이 일본과 화친조약을 체결했다는 소문이 나면서 이론에 관심을 갖고 있던 많은 서구 열강들은 게 눈 참 추듯 앞 다투어 일본과 화친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서둘러 일본으로 들어왔습니다. 


막부는 이로써 지금까지 견지해 왔던 쇄국정책을 완전히 포기하고 개항을 통해 서양문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서양 열강들에게 당한 서러움을 이제는 근대국가 건설이라는 미명하에 동일한 방법으로 한반도에 보복한 것이었습니다. 


한편 일미수호통상조약은 천황의 칙허 없이 막부가 독단적으로 맺은 조약이었기 때문에 이에 반발하는 반막부 세력이 등장하면서 일본 국내는 진통을 겪었습니다. 


일부 다이묘와 무사들은 외세를 배격하고 천황의 권위를 회복하자는 존양왕이론을 주장하기도 하였으나, 이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 사쓰마번과 초슈번에서는 하급무사들이 실권을 잡고 영국과 제휴하여 막부를 타도한 후 메이지 정부에 의한 천황 친정체제로 전환하였습니다. 


Ⅱ. 메이지 유신


메이시 유신이 개시되면서 생사나 차, 금 등을 수출하였고 모직물, 면직물, 함선, 무기 등은 수입하는 무역형태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금이 해외로 대량 유출되면서 이로 인해 경제적 혼란이 야기되자 그 피해는 하급무사와 민중들에게 고스란히 전달되었습니다. 


궁핍한 생활이 지속되면 사회적 불만으로 바뀌게 마련입니다. 이에 더하여 막부의 권위가 이빨 빠진 호랑이처럼 땅에 떨어졌기 때문에 260여 년 동안 내려오던 에도막부는 막을 내릴 수밖에 없었고, 이제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Ⅲ. 일본 열도 개조론과 광란물가


일본열도 개조론은 1971년 12월부터 1973년 11월까지 23개월에 걸친 경기 확대 기간을 말합니다. 


대도시 인구집중이나 태평양공업지대로 공장이 집중되는 것을 완화하기 위해 전국 각 지역에 인구와 공장을 균등 배분하여 공해문제를 해결하고 동시에 교통망을 정비하기 위해 공동 투자를 통해 고속도로와 신칸센 망을 전국으로 확장하여 고도성장을 재현하고자 한 것입니다. 


이를 위해 전국 각지에서 산업 개발을 실행하고 대규모 공공사업을 전개하기 위해 극단적인 금융완화를 실시하였습니다. 


그러니 마땅한 투자처를 찾아 못하던 유동자금이 얼씨구나 좋구나 하고 일거에 토지 투기로 몰리게 되었고 당연히 전국 땅값은 폭등하게 되었지요. 


그런데 오른 것은 땅값만이 아닙니다. 노동자 임금도 덩달아 오르고 맹렬한 인플레가 전국을 휩쓸면서 당시의 다나카 정부 표현대로 광란 물가를 일으킨 것이지요.


일본열도 개조론은 대대적인 인플레를 일으키는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하면서 일본 경제를 침체에 빠트리고 말았습니다. 


전국 방방곡곡이 땅 투기의 대상이 되면서 토지가격은 연평균 30% 이상 상승하였고 1972년 11월 14일 동경 증권시장의 거래 총액은 100억 주를 넘어서는 등 거품이 낀 국민 자산이 증가하였습니다. 


우리는 흔히 일본의 버블 경제 하면 80년대 후반을 떠올리지만, 사실은 일본 열도 개조론이 버블경제의 시초였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은, 다나카의 일본 열도 개조론 때문에 인플레이션과 광란 물가가 일어났고 록히드사로부터 뇌물을 받아 부정부패의 대명사로 낙인찍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인들이 일본 역사에서 존경하는 인물을 꼽을 때 그가 항상 10위권 안에 포함된다는 사실입니다. 


Ⅳ. 오일쇼크


1972년 10월 6일 제4차 중동전쟁이 일어나자 OPEC는 원유고시가격을 인상한다고 발표하면서 석유를 정치적인 무기로 사용할 것을 선언하였습니다. 


1974년 1월 1일에는 오일가격을 무려 세배로 인상하고 극단적으로 공급을 제한하는 수단을 취하면서 일본의 고도성장도 발목이 잡히고 말았습니다. 


이로 인해 세계 각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심각한 인플레와 불황이 겹치는 스태그플레이션에 빠지게 되고, 그 가운데서도 에너지의 대부분을 수입원유에 의존하던 일본경제가 입은 피해는 특히 컸습니다. 


물론 미국도 마찬가지였죠. 그래서 오일쇼크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 경재뿐만이 아니라 정치와 사회현안에 대한 논의를 결정하는 선진경제권 최고기구인 G7이 탄생하게 된 겁니다. 


오일쇼크를 계기로 1974년 대형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면서 소매 물가뿐만 아니라 도매 물가 역시 급상승하였습니다. 


일반 소비자들이 가격 급등에 따른 공황에 빠지면서 화장지나 세제, 경유 등 일용품을 구매하기 위해 앞 다투어 슈퍼로 향했습니다. 


생산 요소 가격의 급등을 소비자에게 일부 전가시킨 것이 다시 소비자 물가 상승으로 이어져, 이번에는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임금상승을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상품부족현상은 소비제품뿐만 아니라 공업용 원재료에 이르기까지 확대되면서 가격상승을 부추겼습니다. 


임금과 물가가 순차적으로 나선계단을 오르듯 급등하고 기업은 생산을 축소하는 스태그플레이션 상태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거의 100% 석유를 수입에 의존하던 일본 경제가 오일 쇼크에 어떻게 대처했길래 경기침체를 넘기고 세계 정상의 자리에 올라설 수 있었던 걸까요?


한 번 세 가지 정도로 요약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일본산 제품은 오일쇼크 이전에도 품질과 디자인에서 세계 적인 수준에 올라와 있었지만 여전히 중급품 대접을 받고 있었습니다. 


최고제품을 쓰던 소비자들이 일본상표를 눈여겨보지 않았기 때문이었지요. 


그런데 석유 파동 이후 경기가 침체되자 상대적으로 소득이 줄어든 소비자들이 품질은 좋고 가격은 저렴한 일본제품에 눈을 돌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소비형태가 바뀐 것이지요. 한번 써 봤더니 품질과 실용성, 그리고 디자인에서 경쟁력이 있던 일본제품에 소비자들은 그런대로 만족하였고, 이들은 충성심 높은 고객층으로 변해 경기가 회복된 후에도 여전히 일본 제품을 선호하게 되었습니다. 


둘째 미국 기업들의 게으름이 더했습니다. 이미 정상의 자리에서 군림해 왔던 미국 전자업체들은 경쟁력 강화를 위한 투자를 등한시하고 부동산이나 금융 골프 등의 사업 분야에 진출하기 시작했습니다. 


반면 일본 전자업체는 선진기술을 도입하고 OEM 제품 생산경험을 통해 일본기업에 비해 상대적으로 고임금 수준을 유지하던 미국 기업들이 도태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미국 전자업체 들은 기업을 매각해야 했고, 이 틈을 노린 일본기업들이 이들 기업을 인수 또는 합병하면서 미국이라는 선진시장에 직접 침투해 들어갈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였습니다. 


[ 글을 마치며 ]


일본이 세계 무대에 등장하게 된 계기는 결국 미국과 유럽 세력의 일방적인 개항 때문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일본에 선진 문물이 들어오게 되었고 미국과 유럽의 기술력을 바탕으로 발전을 거듭할 수 있었습니다. 


일본은 기술 발전을 기반으로 아시아 제패라는 야욕을 꿈꾸게 되었고 미국과 유럽과의 맺었던 불평등 조약을 한국이나 중국에도 그대로 적용해 발전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모두가 알다시피 2차 세계대전 패전국이 되면서 그동안은 경험하지 못했던 일본 열도 침략을 경험하게 되고 국제무대에서 되살아나기 힘든 것 같은 상황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지만 한국 전쟁이 발발하고 중국의 참전을 토대로 미국도 한국 전쟁에 참전하게 되고 일본은 한국 전쟁의 병참기지로서의 역할을 하면서 재건의 토대를 마련하게 됩니다. 


일본은 2차 세계대전을 기반으로 경제 대국으로 부활할 수 있었고 미국과 독일의 선진 기술을 지속적으로 습득해 미국에 근접하는 강대국이 됩니다. 


이후 버블 경제가 탄생하게 되고 일본은 미국과의 플라자 합의를 통해 엔화 평가를 다시 하게 되고 (엔저에서 엔고로) 경쟁력을 잃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반도체 경쟁력과 제조 경쟁력을 아시아의 다른 나라들에게 넘겨주게 됩니다. 


이후 중국이 일본의 빈자리를 차지하게 되고 현재는 중국이 미국에 이어 G2의 국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미국과 중국은 G1의 자리를 놓고 다시 경쟁하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일본이 세계 경제에 중요한 국가로 부상하게 되는 과정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직 진행된 것은 특별히 없고 어떻게 진행이 될 것인지 좀 더 지켜봐야 하겠지만 일본의 현재 행보는 예전과 달리 자신감에 차있고 과감한 결단을 매번 내리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처럼 세계 역사는 순환하고 반복되며 다양한 곳으로 기회가 변화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경제 대국이 탄생하게 되기도 하고 그곳에 새로운 기회가 자리 잡고 있다고 보입니다. 


경제와 정치는 한 몸 같아서 서로 원인과 결과를 공유하고 영향을 준다고 생각됩니다. 


앞으로도 꾸준히 세계 경제의 변화와 정책적인 변화를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하고 습득할 수 있도록 해야겠습니다. 


참고 도서 : 일본 경제 부담 없이 읽기 (강철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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