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플레이션이 빚은 녹인다는 표현은 경제학에서 부의 재분배를 설명하는 아주 핵심적인 비유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물가가 오르면 돈의 가치가 떨어지기 때문에 과거에 빌린 돈의 수치는 그대로지만, 그 돈이 가진 실질적인 무게는 가벼워진다는 뜻이다.
구체적인 원리와 효과를 3가지 측면에서 정리해 보자.
1. 실질 가치의 하락 (화폐 가치 vs 부채 액수)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면 물가는 오르고 화폐의 구매력은 떨어진다.
하지만 내가 갚아야 할 대출 원금은 숫자로 고정되어 있다.
예를 들어 1억 원을 빌렸는데,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짜장면 한 그릇 가격이 5,000원에서 10,000원으로 2배 올랐다고 가정하면 과거에는 짜장면 2만 그릇을 팔아야 1억 원을 갚을 수 있었지만, 이제는 1만 그릇만 팔아도 1억 원을 갚을 수 있다.
빚의 숫자는 1억 그대로지만, 갚기 위해 들어가는 노력(재화/서비스)은 절반인 셈이다.
2. 실질 금리의 마이너스화
빚의 무게를 결정하는 것은 실질 금리다.
실질 금리 = 명목 금리(통장 금리) - 물가 상승률
은행에 내는 이자(명목 금리)가 5%인데, 물가는 10%씩 오른다면 실질 금리는 -5%이다.
앉아서 숨만 쉬어도 매년 부채의 실질적 가치가 5%씩 사라지는(녹아내리는) 마법 같은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3. 소득 상승과의 관계
인플레이션은 보통 명목 소득(월급)의 상승을 동반한다.
물가가 오르면 기업의 매출액이 커지고, 이에 따라 노동자의 임금도 상승한다.
월급 300만 원일 때 매달 150만 원씩 대출 원리금을 갚는 것은 소득의 50%를 쓰는 고통스러운 일이다.
인플레이션으로 월급이 600만 원으로 올랐다면, 똑같은 150만 원을 갚는 것은 소득의 25%만 사용하는 것이다.
빚이 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줄어들며 체감상 빚이 녹았다고 느끼게 됩니다.
이 현상은 모든 사람에게 유리한 것은 아니다.
승자는 (채무자)이다. 돈을 빌려 실물 자산(부동산, 주식 등)에 투자한 사람, 혹은 막대한 국가 부채를 안고 있는 정부이다.
정부는 인플레이션을 통해 세수를 늘리고 부채 부담을 줄이려는 유혹을 늘 받는다.
패자는 (채권자/현금 보유자) 돈을 빌려준 은행이나 개인, 성실하게 예금만 한 사람이다.
혹은 연금으로 생활하는 은퇴자로 이들의 자산 가치는 인플레이션이라는 보이지 않는 세금에 의해 녹아 없어진다.
이를 두고 인플레이션은 채권자의 주머니에서 채무자의 주머니로 부를 강제로 이전시키는 현상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일본의 경제 상황을 예로 들어 좀 더 알아보자.
일본 정부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부채 비율 (GDP 대비 약 250% 이상)을 해결하기 위해 실질적으로 고의적인 인플레이션 유지와 억제된 금리라는 정교한 전략을 사용하고 있다.
일본 정부와 일본은행(BOJ)이 구사하고 있는 이 전략의 핵심 메커니즘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명목 GDP 성장률 > 명목 금리 (역전 현상 유지)
가장 핵심적인 전략입니다.
빚의 규모는 과거의 숫자로 고정되어 있는데, 물가가 올라 경제 규모(명목 GDP)가 커지면 부채의 상대적 비중이 줄어든다.
일본은 26년 들어 명목 GDP 성장률이 약 4%대를 기록하는 반면, 10년물 국채 금리는 약 1.8%~2% 수준에 머물러 있다.
경제가 커지는 속도가 이자가 붙는 속도보다 빠르기 때문에, 정부가 추가로 빚을 내더라도 GDP 대비 부채 비율은 자연스럽게 하락하는 효과를 누리고 있다.
이를 경제학에서는 부채의 지속 가능성 확보라고 부르지만, 실질적으로는 인플레이션이 빚을 녹여주는 상태이다.
2. 금융 억압 (Financial Repression)
물가는 오르는데 금리는 그보다 낮게 유지하여, 돈을 빌려준 채권자(주로 일본 국민과 금융기관)로부터 채무자(정부)에게 부를 이전하는 방식이다.
물가 상승률(CPI)이 2%를 상회하는데 국채 금리가 그보다 낮다면, 정부는 실질적으로 마이너스 금리로 돈을 빌리고 있는 셈이다.
일본 국민들이 은행에 예금한 돈의 구매력은 떨어지지만, 정부는 그 낮은 이자로 거대한 빚을 유지하며 원금의 가치를 희석시킨다.
3. 세수 증대 (인플레이션의 보너스)
물가와 임금이 오르면 정부의 세수(소비세, 소득세, 법인세)는 자동으로 늘어난다.
26년 일본 정부는 기업 실적 호조와 물가 상승 덕분에 7년 연속 사상 최대 세수를 기록하고 있다.
늘어난 세수는 추가 국채 발행을 줄이거나 기존 빚의 이자를 갚는 데 사용되어, 부채 문제를 연착륙시키는 데 기여한다.
이 방식은 정부에게는 유리하지만, 일본 국민의 삶에는 큰 부담을 준다.
물가가 오르는 속도를 임금이 따라잡지 못하면 국민들의 실질적인 구매력은 감소한다.
이는 국가가 져야 할 부채의 짐을 국민의 주머니에서 충당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는 이유다.
만약 인플레이션이 통제 불능 수준으로 치솟아 금리를 급격히 올려야 한다면, 일본 정부가 내야 할 이자 비용이 폭증하여 재정이 파탄 날 위험이 있다.
26년 다카이치 사나에 내각이 확장 재정과 금리 인상 억제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 배경이다.
요약하면 일본은 적당한 인플레이션(2% 이상)을 유지하면서 금리는 그보다 낮게 묶어두는 방식으로 수십 년간 쌓인 거대한 부채의 무게를 조금씩 덜어내고 있다.
이것이 바로 현대판 인플레이션을 이용한 부채 녹이기의 전형적인 사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