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말레콘

14. 말레콘

#296 오월

by 조이진

5월

  핼리혜성은 떠났다. 그리고 인종 전쟁의 광기라는 가스를 쿠바에 자욱하게 남겼다. PIC는 흑인 정당을 불법으로 규정한 법안을 철폐하라고 요구했다. 그들은 흑과 백이 형제애로 뭉쳐 공화국을 건설할 때 흑과 백이 서로에게 함께 한 약속을 다시 주장하고 있을 뿐이라고 했다. 핼리혜성이 다녀간 2년 뒤 PIC는 무장 시위를 결정했다. 독립 10주년 기념일에 이들에 대한 지지도가 가장 강한 오리엔테에서 열린 무력시위는 지난 선거에서 흑인과 해방군 전역자들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받아 당선된 고메스 대통령에게는 위협적인 일이었다. 시위가 시작되자 “흑인들이 인종 혁명을 일으킨다!”라는 머리기사가 실렸다. 신문은 이 지역 주동자들이 흑인일 뿐 아니라 아이티 출신이기도 하다며 감정을 조장하고 갈등을 선동했다. 흑인 무장 폭도들이 백인 여자를 강간했다는 상투적인 사건 기사도 나왔다. 에스테노즈는 시위를 그렇게 묘사하는 언론을 상대로 “우리는 아무도 훔치지 않았고, 여성에게 말을 걸지도 않았고, 더군다나 백인을 공격한 일도 없었다. 이 시위가 인종 전쟁이라고 하는 것은 완전히 잘못된 모함이다”라고 인터뷰했다. 이 인터뷰마저도 흑인 시위를 강하게 진압해야 한다는 여론을 형성하는 연료로 이용되었다. 정부군 측 수 천명의 자경대는 백인들이었다. 폭동을 일삼는 흑인들 때문에 나라가 망할 것을 걱정해 자원한 이들은 해방군 때 흑인들과 함께 싸웠던 자들이었다. 정부군 지휘관 가운데는 마세오 장군과 함께 쿠바에 상륙했던 자는 500여 명의 자위 단원을 모아 산티아고 데 쿠바로 가는 배를 탔다. 그 배의 이름을 <조국Patria>호라고 불렀다. 정부군 최고 지휘자는 해방군 출신의 미국 제당 기업 총지배인 메노칼이었다. 그는 그 해에 있을 대통령 선거에 출마를 선언한 후보이기도 했다. 그도 3천여 명의 자위 단원을 이끌고 산티아고에 왔다. 또 다른 해방군 지도자 출신도 1,200여 명의 자위 단원을 모았다. 5월 27일 새벽. 4천여 명의 정규군과 경찰들이 그들에 합류했다. 

N8KHMRPFMGeIrCcVGCT9VPJdieqNDxYXvdjD5wznESMcv6t2rVa4ViOTxdZJ_rq-QxKDq4w6gCUu6SgzecxZT9q2JPilY-jan9BR1jxAeAMUBWLwGu-TOMBY3rW38wFz8HFlU_YOAQfalVLIK3VG2A.webp 윌리엄 테프트. 조선을 일본이 병합하는 것을 양해한 가스라-테프트 밀약을 맺었다.


  미국 대통령이 된 태프트는 플랫 수정안에 따라 미국이 또 개입해야 하는 순간인지를 따져보고 있었다. 오리엔테에는 식민지colony라고 불리는 수십 개의 기업 도시와 10여 년간 막대한 자본을 투자한 철도, 광산, 설탕 산업 시설이 있었다. 식민지마다 미국인들이 수 백 명씩 살고 있었다. 5월 24일 태프트가 미군 함정에 1,200명의 해병을 실어 관타나모에 상륙시켰다. 미국은 이번에도 ‘미국의 재산과 미국 시민의 생명을 보호’ 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미국의 파병은 고메스를 자극했다. 미 군정 사령관이 상륙하면 자신은 폐위될 터였다. 고메스는 국내 상황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으니 지금 미국이 개입할 때가 아니라며 태프트에게 항의했다. 고메스로서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검둥이들의 폭동 사태’를 자신이 적절하게 통제하고 있음을 증명해야 했다. 미국 시민의 안전을 지키려 온다는 미 해병대가 쿠바 군인들을 움직이게 했다. 1912년 5월. 진압부대에 실탄이 지급되었다. 군인들이 트럭에서 내렸다. 아무런 무기도 들지 않은 시위대의 머리를 쇠 곤봉으로 내리쳤다. 으깨진 머리에서 피가 쏟아졌다. 도망치는 자를 뒤쫓은 군홧발은 쓰러진 자의 흙 묻은 얼굴을 짓이겼다. 흑인들을 살육하는 군사 작전은 여러 날 계속되었다. 관타나모에서만도 50여 명이 죽었다. 관타나모 시장은 발포 작전을 실행하기 전에 기자들을 초청해 작전 현장을 생생하게 취재하게 했다. 이번 작전은 쿠바 정부가 새로 도입한 영국제 최신형 기관총의 연발 성능을 확인하기 위해 준비된 작전이었다.

images (59).jpeg 빅커스 기관총을 쏘는 영국 303 중화기 부대. 영국은 이 총을 쿠바에서 실전 테스트했다.

 시장이 발사 명령을 내렸다. 무장 폭도들이 진을 치고 있다는 움막에 군인들이 사격을 시작했다. 참관자들은 이날 테스트한 기관총의 연발 능력에 경탄했고, 기관총은 짧은 시간에 150여 명을 죽였다. 과녁이 된 자들은 무기도 지니지 않고 폭동과 관련도 없는 가난한 흑인 마을 농부들일뿐이었다.  발포를 명령한 관타나모 시장도 해방군 장군 출신이었다. 쿠바 전역에서 피부색이 희지 않은 자들은 모두 폭도로 간주하였다. 아무런 무기도 지니지 않은 흑인 농민들을 대상으로 한 살상은 계속되었다. 살해된 농민들은 대개 사탕수수 수확을 마치고 한 손에는 수확 도구인 마체테를 다른 한 손에는 해먹을 들고 퇴근하던 이들이었다. 들에서 농사를 짓고 있던 흑인도 별도의 절차 없이 현장에서 사살되었다. 오리엔테의 들녘은 시체에 엉겨 붙은 검은 피로 점점이 얼룩졌다. 쏟아지는 총탄을 피해 그들은 또다시 산으로 들어가 씨마루아보가 되어야 했다. 백인 정권의 PIC에 대한 군사 작전은 인종 청소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발포자는 백인이었고 군복 입은 자도 백인이었고 죽은 자들은 무장할 힘도 없는 흑인들이었다. 군대는 산티아고에 계엄을 선포했고 군인이 흑인을 죽이면 법적 책임을 따지지 않았다. 고메스 대통령은 PIC 활동을 다시금 인종 전쟁으로, 정부군의 대응을 시민사회 보호를 위한 투쟁으로 규정하면서 ‘인간성을 넘어선 과격하고 야만적 폭동’에 맞서기 위해 더 많은 자위 단원이 필요하다고 입대를 호소했다. 미국처럼 쿠바에서도 흑인들은 인간으로 취급되지 않았다.

에스테노즈의 시신을 부검하는 백인들. 이 사진은 엽서로 판매되기도 했다. 쿠바의 인종차별은 악화되었다.

  에스테노즈는 군 병력을 동원해 흑인들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하는 정부에 대항하기 위해 국민은 무장하자고 국민에게 고했다. 싸움을 원하지는 않았지만, 지금은 싸울 수밖에 없다면서 ‘우리가 태어나고 수 세기 동안 우리의 땀으로 씻고 자유를 위해 30년 동안 우리 피로 물들인 이 땅에서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불평등과 압제의 사슬을 끊기 위해 같은 쿠바인을 향해 총칼 들어 무장하는 심정이야 비통하지만 그래도 흑인들은 이제는 싸울 수밖에 없다고 호소했다. 에스테노즈는 PIC 운동은 쿠바 사회의 적이 아니라 쿠바를 쿠바답게 실현하는 운동이며 백인들은 흑인들의 저항을 야만적인 이기심 때문이라고 비난하지만 흑인들을 집단 살해하는 저들이야말로 악마성에 가득 찬 자들이라고 했다. 수배 중이어서 대중 앞에서 연설할 수 없었던 그는 추적자들에게 이런 내용이 담긴 원고를 남긴 채 사라졌다. 그의 마지막 성명서가 공개된 지 2주 뒤 그의 시체를 찍은 사진이 신문에 실렸다. 늘 흰색 정장 차림에 하얀 파나마모자를 쓰던 베다도의 신사는 알몸으로 검시 탁자에 눕히었고, 두 명의 백인 의사와 백인 정부군 장교들이 사체를 내려다보는 기념사진이었다. 사진상으로는 그의 이마 매우 가까이에서 발사된 총알이 뒤통수를 관통한 죽음이었다. 체포된 50여 명의 부하들이 발사 장면을 지켜보았다. 몇 조각으로 잘린 그의 몸통은 실밥으로 거칠게 꿰매 봉합한 흔적이 역력했다. 독립 영웅의 시체마저 모독한 이 사진이 전국 신문에 실렸다. 이 사진을 기념엽서로 만들어 판 자도 있었다. 시커멓게 꼬인 파리떼는 살을 파먹고 구더기가 썩은 살을 분해하고 있는 시신을 산티아고의 몬카다 병영 앞 광장에 전시했다. 그해에 6,000여 명이 넘게 학살당했다. 폭동에 가담한 무리를 그렇게 많이 죽였어도 정부군이 그들에게 몰수한 무기는 100점이 채 되지 않았다. 그마저도 마체테가 대부분이었다. 자유당 정부는 그해 16명이 사망했고 폭동을 일으킨 자들끼리 서로 총을 쏘아 죽었다고 발표했다.

  호세 마르티가 이끌던 독립 투쟁기에 흑과 백은 서로 섞여 땀 흘려 투쟁했다. 능력 있는 흑인은 빠르게 승진했고 흑인의 지휘 아래 백인들은 함께 싸웠고, 지휘관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전투를 치렀다. 호세 마르티는 흑과 백인 하나의 목소리로 인종주의를 혁파하자고 외치는 마음이야말로 혁명에 대한 사랑의 씨라고 말했었다. 호세 마르티가 죽은 지 20년이 채 안된 1912년의 집단 발포와 학살은 하나의 조국, 하나의 공화국을 위해 함께 투쟁했던 그들이 두 인종으로 나뉘어 쿠바가 30여 년간 꿈꿔온 혁명의 이상과 피 흘려 이룬 공화국의 성스러운 기초를 스스로 부순 사건이었다. 이 사건 뒤로 쿠바에서는 인종주의를 극복해야 한다는 생각은 늘 의심받고 회의적인 주제가 되어 왔다. 그래서 오늘날 쿠바의 역사 논쟁에서도 인종차별 극복이라는 주제는 쿠바에서도 가장 예민하고 논쟁적인 주제 중 하나로 남아있으며 1959년 쿠바 혁명의 가장 중요한 과제 가운데 하나였다.



+ 삼각대에 장착해 한 명은 쏘고 한 명은 탄약을 공급하고 다른 한 명은 탄약을 운반한 빅커스 기관총은 이날 실전에서 견고성과 10시간 지속 사격 능력을 입증함으로써 영국군은 세계 1차 대전에서 기관총 군단을 운용했고 또 전투기에도 장착해 사격 무기로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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