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다이어트를 결심한, 상처받은 영혼에게
바쁘고 힘든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가장 쉽게, 편하게 소소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방법은
바로 '먹는' 것이다.
맛집을 찾아가는 일,
하루 일을 잘 마무리했을 때 축하하는 행위,
또는 너무나 힘든 하루를 보냈을 때
야식을 먹음으로써 스스로를 위로하는 행위 등을 생각해 보았을 때
우리의 식생활은 먹는 것 이상의 일이다.
그런데 이러한 중요한 행복과 즐거움을 포기한 채
다이어트를 선택하기로 한 당신,
당신에게는 어떤 사연이 있어서일까?
왠지 위로의 손수건을 한 장을 건네야 할 것만 같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얼마나 고민이 되었으면
험난한 과정이 예상되는 -5킬로, -10킬로라는
고난의 길을 선택하기로 결심했을까?
같은 길을 걸어본 사람으로서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목표에 도달한다고 하여도 유지도 그만큼 쉽지 않은 것이라서
성공적인 다이어트란 불가능한 목표와도 같이 느껴질 때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도전하게 된다.
실패해도, 주기적으로
성공할 때까지 방법을 바꿔가면서라도 계속 도전하게 된다.
이미 여러 번 시도해 본 바 있고, 그때마다 벽에 부딪쳐 좌절했으면서도
또다시 다이어트를 결심하여 그 힘든 길에 들어서는 자신을 볼 때마다
잘 되길 바란다는 무조건적인 격려보다는,
다이어트를 성공하여 이루게 될 장밋빛 미래 같은
환상적인 상황을 가정해 보는 고무적인 말보다는
왠지 연민이 가득한 위로의 말을 먼저 건네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당신의 무엇이 다이어트를 지속하게 하는가?
실패에도 꿋꿋하게 다시 도전하게 만드는
당신의 '바닥' 경험은 대체 무엇이었는가?
나 역시
어릴 때부터, 청소년기 때부터 다이어트를 꿈꿔왔지만
많은 이들이 그러하듯 꾸준히 실천하지도, 목표를 이루지도 못했다.
일부러 밥을 적게 먹은 날은 모든 신경이 뱃속에 몰려있는 기분이 들었다.
야심 차게 시작했다가도 시간이 갈수록 짜증이 심해지고 힘에 부쳐서
며칠을 이어가지 못했던 경험들이 생각난다.
어느 순간부터는 합리화를 하며
굳이 다이어트를 할 필요가 없다고 스스로를 세뇌시키려고도 했다.
외모지상주의에서 비롯된 생각이라며 과도한 다이어트의 후유증을 이유로 들며 비판하기도 했으며,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방법은 다이어트가 아니라고 합리화했었다.
그랬다, 나는 내가 그만큼 나를 사랑하는, 나를 아끼는 사람이라고 자신해 왔었다.
항상 밝은 얼굴로 주위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며
주위 사람들과 원만한 관계를 형성해 왔기에
모두가 나를 좋아하는 호감형의 사람이며 나 역시 자신감 있게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사람의 내면이 외면보다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자부심을 가졌었다.
티브이에서 보이는 유명한 연예인들 중 통통한 사람들의
자신감 있고 행복해 보이는 모습, 아름다운 모습을 보며,
나도 그들처럼 충분히 매력 있고 괜찮은 사람일 거라고 생각해 왔던 것 같다.
그리고 나는 그런 나를 사랑하고 있다고 믿어 왔었다.
그런데 우연히 내가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동안 스스로를 속여왔다는 사실을, 내가 누군가를 처음으로 인식할 때 하는 무의식적인 행동을 통해 깨닫게 되었다.
보통 길에서 처음 보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파악하고 판단하기 위해 많은 이들이 눈과 얼굴, 차림새 등을 볼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서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나는 처음 만나는 모든 대상을, - 특히 여성의 경우 -
그 사람이 어떤 사이즈의 옷을 입을 수 있는가를 기준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그것은 단 한 번도 예외가 없을 만큼 견고하게 작동하는, 끔찍한 프레임이었다.
나는 감히 타인의 외모를 기준으로 그 사람의 삶의 행복과 불행의 정도를 판단하고 있었다.
하체비만이었던 나는 날씬한 하체를 가진 사람을 보며
나는 내게 허락되지 않은 자유로운 사이즈 선택권과,
활동 시 옷이 조이거나 말려 올라가 짧아지는 등의 옷매무새가 망가질 일이 없다는 점 등에서 오는 편안함을 부러워했다.
내가 삶에서 겪고 있는 불편함을 꿈에도 상상할 수 없을 그 사람은 분명 행복한 사람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반면에 나보다 하체가 튼튼한 사람에게서 나와 비슷한 불편함이 혹시라도 엿보일 경우 연민을 느꼈다.
내가 뭐라도 된 듯이 그 사람의 삶의 질을 낮추어 평가했다.
분명 그 사람은 불만스럽고 불행한 삶을 살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런데 나와 같은 하체비만인 이들 중에서도
예외적으로 유독 자신감에 가득 차 있거나
자신의 그런 신체적 특징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살아가는 담대한 이들을 보게 될 때
아예 차원이 다른 부러움을 느꼈다.
나에게 없는 자신감과 나에게 없는 그 사람만의 행복한 삶,
그것은 나의 프레임을 뛰어넘는 경이로움이었다.
그들에게서는 나에게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지만
나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그것'이었을 뿐이다.
나는 나에게 허락되지 못한 삶에서 오는 결핍을
마음속 가득 쟁여놓은 채로 타인을 평가하고 판단하며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스스로 자신감 있고 당당한 삶을 사는 척 연기해 왔었다.
타인을 쟀던 잣대로 매일, 매 순간 나를 재고 평가하며
나의 불행함에 절망하는 삶에 길들여져 있던 것을 깨닫지 못한 채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누군가 앞에서 발가벗겨지는 느낌이란 이런 것일까?
심지어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 앞에서 말이다.
평소처럼 1교시 시작 전,
학생들 앞에서 출석을 체크하고 조회 시간에 전달할 사항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가장 앞자리에 앉아있는, 평소 나를 반항기 가득한 태도로 대하던 녀석이
갑자기 내 얼굴을 장난스럽게 바라보며 자신이 듣고 있던 노래를 흥얼거리며 불렀다.
'엉덩이가 큰 그녀는 내가 좋댔어
누난 선생 나는 학생 바로 쓰자 조퇴서...'
후렴구에도 반복되며 이어지는 '엉덩이가 큰 그녀는 내가 좋댔어'라는 구절을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나의 반응을 즐기려는 듯 능글거리는 태도로 불러댔다.
나를 당황시켜 놀리려는 수작이 뻔했다.
의도한 대로 상황이 흘러가지 않도록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 했지만
생각과 달리 온몸이 수치심과 분노로 달아올랐다.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못 이겨 학생을 노려보았다.
나는 그때,
교사다운 태도로 냉정하게 학생을 저지한 뒤
교무실로 학생을 데리고 가 내가 받은 상처와 불쾌함에 사과하게 한 뒤
이 사건을 공론화하여 교권보호위원회에 넘기거나
최소 부모님께 연락을 드리고 학교로 오시라는 말을 했어야 했다.
그것이 옳았다. 나를 위해서도,
잘못된 행동을 한 그 학생을 가르치기 위해서라도.
하지만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로 부들부들 떨며 노려볼 뿐,
아무 말도, 아무 행동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 자리에 돌처럼 굳어버렸었다.
교실에 있는 모든 아이들이 그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하는 무기력한, 잔뜩 분노한 내 모습을.
생각할수록 정말 지우고 싶은 끔찍한 기억이다.
그때 내 머릿속에는 채 정리되지 못한 수만 가지 생각들이,
마음속에는 온갖 감정이 태풍처럼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평소 내가 나의 몸에 대해 갖고 있었던 부정적인 생각들을 들켰다는 생각에
그것을 순간적으로 부인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뚱뚱한 내 몸을 자책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런 놀림을 초래한 건 모두 내가 뚱뚱한 탓이라고.
여기에
그 녀석이 이런 나의 약점을 꿰뚫어 보고 내 몸을 놀림으로써
나를 떠보고 싶어 했다는 것에서 오는 충격과 비참함이 더해졌다.
뿐만 아니라
내가 교권 및 명예훼손 등을 이유로 이 일을 문제 삼게 된다면
이 문제를 놓고 여러 선생님들, 학생이나 학부모들이
은연중에 나의 몸을 이슈삼아 내 몸에 대해 판단하는 말들을 수없이 입에 올리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더해졌다.
이 모든 것들이 한 데 섞이고 모여 수치심으로 단단히 응축되자
나는 거대한 무력감을 느껴버렸고
내가 택할 수 있는 가장 비겁한 방법을 택하고 말았다.
바로 외면하기였다,
외면할 수 없었지만 외면하려는 몸부림으로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굳어버린 듯 무력하게 그 자리에 서 있었던 것이다.
내가 나를 조금이라도 더 사랑했다면
주저하지 않고 화를 내며 그 녀석을 혼냈을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만큼의 용기를 낼 자존감도 남아있지 않았다.
평소에 무의식적으로 소중하게 생각지 않았던 내 몸에 대해
보호하고 변호할 힘이 조금도 없었다.
그날 나에게 가장 큰 상처를 준 것은
학생의 악랄한 놀림이 아닌
그렇게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하고 있었던 나의 태도였다.
그 기억은 두고두고 나를 끊임없이 상처 입혔다.
나의 자존감의 바닥을 본 그 경험을 통해
나는 내가 분명히 달라져야 한다고,
나는 나를 더 사랑해야만 한다고 느끼게 되었고
다이어트를 결심하였다.
단언컨대내가 몇 킬로그램이든지, 내가 어떤 사이즈를 입든지 상관없이
살이 찐 내 몸을 충분히 사랑하고 있었다면
아마도 나는 혹독하게 이를 악물며 다이어트를 결심하고 실천해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식도락을 인생 최고의 기쁨으로 여기는 내가
사람들과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다니는 행복을 소중히 여기는 내가
오랜 기간 자진해서 포기해야 했던 그 끔찍한 다이어트를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이어트를 결심하게 된 당신,
당신이 힘든 결정을 하게 된 이유가
세상과 자신을 바라보는 어떠한 왜곡된 프레임을 깨달은 순간 때문일 수도 있고,
당신이 당신 자신을 지적하는 세상과의 싸움에서
자신의 입장에서 온전히 편들어 대변하지 못한 순간 때문일 수도 있고,
이 모든 순간들 때문이 아니더라도
지금보다 더 당신을 더 사랑하고 싶은 마음 때문일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나를 더 사랑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혹독한 수단을 택하게 된 당신.
그러나 분명한 것은 당신의 몸은 잘못이 없다.
살찐 당신의 몸을 탓하거나 미워하지 말라.
당신을 위해 나름대로 애쓰고 살아오면서도
사랑받지 못한 안타까운 존재이다.
자신을 온전히 사랑하지 못하고 살아온
당신이 지닌 아픔을 알기에
당신을 위로하고, 손 잡아주고 싶다.
토닥토닥해주고 싶은 당신에게
내가 실천했던 다이어트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그리고 10킬로 이상이라는 감량 결과보다도
내가 원하는 나를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느낀 점들과
내적으로 성장해 온 이야기들에 방점을 찍어 들려주고 싶다.
그 과정에서 겪었던 힘듦과 좌절,
순간순간을 극복해 나갈 수 있었던 작은 지혜들을 나누고 싶다.
다이어트를 결심한 당신이 힘들어하며
또다시 자기 비하의 구렁텅이를 향해 내달릴 때
팔을 뻗어 손잡아주고
잠시 쉬어가라며
기댈 수 있는 작은 어깨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사진 출처 : Unsplash의 Brooke L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