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9화
1. 문득, 오래된 냄새가 떠오른다.
삶은 듯한 국물 냄새, 젖은 나무 냄새, 낡은 그릇에 비친 누군가의 얼굴.
그리고 그 얼굴을 닮아버린 나.
그 냄새 속엔 늘 숨이 섞여 있었다.
말하지 않아도, 이미 그게 시작이었다.
2. 가족은 목소리보다 먼저 스며든다.
손짓과 말버릇, 참았던 침묵이 내 안에 남아 있다.
나는 그걸 나라고 부르며 자랐다.
그게 내 언어의 처음이었고, 지금도 문득, 말끝에서 그들의 온도가 난다.
3. 멀어질수록 더 가까워지는 얼굴들이 있다.
잊으려 할수록 선명해지는 표정, 닮지 않으려 애쓸수록 따라오는 그림자.
가족은 그렇게 산다.
보이지 않아도, 내 안의 어떤 자리에 앉아 있다.
때로는 불빛처럼, 때로는 그림자처럼.
4. 가끔 그리움인지, 후회인지 모를 감정이 밀려온다.
그건 미움도 사랑도 아닌, 아직 이름 붙이지 못한 마음.
가족이란 건, 아마 그런 마음 하나쯤을 평생 품고 사는 일일지도 모른다.
5. 나는 여전히 그 안에서 숨 쉬고 있다.
다만 예전처럼 아프지 않을 뿐.
가끔 그 얼굴이 스쳐가면, 조용히 미소가 난다.
잊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 시작이 아직 내 안에서 아주 오랫동안 저물지 않아서.
가족은 내 안에 남은 시간의 얼굴이다.
사라진 줄 알았던 그 흔적이, 마음 깊은 자리에서 오래도록 온도를 남긴다.